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2

그들은 검은 숲 너머 산 위에 하얀 성당처럼 빛나고 있는 호스피스 건물에 들어섰다. 입구를 찾는 일도, 입구 안으로 들어서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폭도들은 버릇처럼 잔뜩 수그린 머리를 들이밀며 접수대로 다가섰다. 희게 질린 여자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면 그들은 그녀를 망설임 없이 부술 것이었다. 여자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접수대에서 일어나 그녀 뒤쪽에 있는 하얀 벽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두드린 뒤 응접용 소파 쪽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곧 접수대 뒤쪽으로 연결된 기다란 통로와 통로 안쪽에 늘어선 엘리베이터들을 언뜻 볼 수 있었다. 한때 소녀의 엄마를 잡아두었던 입구, 순종적인 기다림만으로 열리지 않았던 입구는 그토록 싱겁게 속을 드러내었다. 마치 이러한 방식이 적합한 열쇠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러나 그들은 순순히 안쪽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미 들어선 입구를 그들은 안쪽에서부터 망가뜨렸다. 반쯤 열린 유리문을 개머리판으로 찍어 부수고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접수원의 작은 머리 역시 같은 방법으로 깨뜨렸다.

그녀는 머리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대로 죽은 체 했지만 그들이 그녀의 속옷만 벗겨 오물을 게워내듯 파괴욕과 함께 일어선 욕구를 해소했을 때,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길고 비참한 신음을 흘렸고 그들은 낄낄거리며 그녀의 목을 졸랐다. 타인의 말을, 이처럼 번듯한 건물의 입구를 무참히 무너뜨린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들을 외면하던 귀와 입술, 눈에, 언제나 사내의 삼분 오십초를 기다리던 얼굴에,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무언의 호소를, 새의 죽음을 무시하고 떠나가던 관객의 얼굴에 그들은 세 발의 총알을 박아넣었다.

여자의 머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고수머리 사내의 새끼 발가락 역시 폭발과 함께 날아갔으나 그는 절정에 취해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지상에 없었던 것과 같은 그녀의 하얀 얼굴, 수십년의 세월과 고난을 지표하며 깊어진 주름, 그날 아침 사진첩에서 열 살 무렵 소녀의 당당한 얼굴을 알아보고 회한에 젖어들었던 서글픈 눈과 머지않아 물집이 들어차 말을 할 때마다 통증에 시달리게 되었을 입술을, 이제는 보이지도 실재하지도 않는 여자의 부분들을 두고 돌아섰다.

접수대 안쪽으로 들어가는 군인들은 종말의 시기에 지상에 나타난 검은 메뚜기떼처럼 보이기도 했고, 종말을 피해 물 속으로 뛰어드는 잿빛 쥐떼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하튼 마구잡이로 엘리베이터에 들어차 사면의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은, 사면의 거울이 응시하고 있던 그들은 제 창조물을 사랑하며 돌보는 선한 신은 아니었다. 그들은 거울의 차디찬 응시를 견디지 못하고 사면의 거울을 모조리 때려부수었다. 오랫동안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산산조각난 거울 파편들이 손등 곳곳에 박혔지만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평행한 벽을 따라 서 있는 네 개의 엘리베이터 속으로 개미 떼처럼 흩어진 그들은 병원 곳곳에 오물처럼 흘러넘쳤다.

건물은 지하까지 합쳐 5층이었다. 각 층은 칸막이도 없이 훤히 뚫린 광장 같은 공간이었다. 간이형 침상들 수십 개가 열을 맞추어 배열되어 있었다. 간호사, 혹은 의사의 기벽적인 취향에 맞추어져 정확한 간격을 두고 서로에게 떨어져 있는 환자들은 그들을 향해 도래한 각다귀떼의 악마같은 얼굴과 그보다 더 악마 같은 침묵에 놀라 미친 듯이 눈을 굴리며 허우적거렸지만 내적인 고통에 사로잡혀 지친 이들은 감히 몸을 일으켜 도망을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중환자들은 모르핀에 의지해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에게 남아 있는 반사적인 기민함을 내바친 상태였기에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어느 층에서든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종말의 공포에 깨어난, 그가 기대하지 않은 죽음에 질겁한 의식이 무뎌져버린 신경망을 미친 듯이 두들겨댄 덕에 미동도 하지 않던 몸을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된 노인은 간이침대에서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와 비쩍 마른 가슴을 매끄러운 흰색 바닥에 대고 철부지 아이처럼 다리만을 침대에 매단 채 허우적거렸다. 그들은 가엾은 도망자들이 도피에 대한 욕구에 충실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들이 생애 내내 도망쳤듯 중병환자들도 그들을 피해 도망칠 수 있도록. 그들이 고향 혹성으로부터 내몰렸듯 중병환자들도 그들의 안온한 침상으로부터 내쫓길 수 있도록. 그들은 도망자들의 얼굴이 자신들과 닮았다고, 비쩍 마르고 고통과 마약에 동시에 도취된 얼굴이, 예기치 못한 기적에 폭력적으로 깨어난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울을 보듯 환자들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누구와도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었다. 거울상조차도 그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묵시록의 천사들과도, 종말의 각다귀들과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그들의 현존성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그들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무용한 도망을 계속하는 환자들을 그들은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단 하나의 손짓만으로 그들의 도피는 끝나고 말 것이다.

기막힌 환각과 환청에 오래도록 시달려 온 그들에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아무도 당신을 죽이러 들지 않고 아무도 당신을 원망하며 절규하지 않아요, 라고 말해줄 간호사는 이곳에 없었다. 유리문을 부수고 접수원 여자를 겁탈하는 소동 중에 접수원 여자가 어딘가 비상 연락을 취했는지, 아니면 위층까지 그 소란이 다 들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로이 몸을 운신할 수 있는-혹은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달아난 뒤였다. 의사나 간호사, 호스피스에세 근무해야 마땅할 다른 직원들은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병자들이 있었다. 오랜 환상에 지쳐버려 더 이상 환상을 믿지 않게 된, 그러나 끝없는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는 병자들. 그들은 병자들에게 그들이 두려워 마지않는, 동시에 바라 마지않는 기적을 선보여주기로 했다. 사내는 병자의 어깨를 군홧발로 짓눌렀다. 그를 신호로 다른 군인들도 아직 병상에 누워 몸만을 부질없이 움쩍거리는 병자를, 침대에 말라빠진 발만 매단 채 버둥거리는 병자를, 엘리베이터 앞쪽까지 기어가는 데에 성공한 병자를, 열리지 않는 문에 대고 작고 늙어빠진 머리를 부딪혀대는 병자를 만졌다. 병자들은 한결같이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하나의 파동이 다른 매질을 울리며 지독한 흐느낌을 전달하며 공명하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악기처럼 병자들은 공명하듯 일시에 울었다.

병자들은 버둥거림을 멈추었고 앞으로 전진하여 그들의 환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헛된 희망을 버렸다. 대신 그들은 기겁한 얼굴로 그들의 환상을-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이제는 환상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악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병자들이 오래도록 시달려온 악몽, 그들을 병자로 만들던 끔찍한 환상들은 현존하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머리를 짓찧어대던 노인은 검은 머리 여자의 군화와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흐느꼈다. 환자들은 그들에게 정말 종말이 온 것이냐고, 이제 끝난 것이냐고 물었지만 군인들은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흐느낌과 언어를, 정확한 발화와 발화오류를 구분하지 못했고 슬픔과 희망을, 절망과 고통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악몽에 사로잡힌 병자들의 목을 꺾고 그들의 배를 뚫고 눈구멍을 후벼파며 체현하는 고통으로 더럽혔다. 그들은 병자들이 그 수난을 겪고도 살아남기를, 그래서 끝까지 고통스럽기를, 오래도록 제 안에서 떠도는 기억에 괴로워하기를, 악마와 악몽, 그들의 파괴를 증명하기를 바랐으나 오랜 투병생활에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노인들은 고문과 같은 접촉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들은 영과 몸의 이분법을 잊고 딱딱하게 석화되어버린 늙은 영혼들을, 무책임하게도 제 삶보다 커다란 영역을, 그들이 말년에 죽어가는 육체를 뉘었던 공간보다도 너른 자리를 이리저리 뒤틀린 사지로 차지하는 살해당한 마음들을 한 자리에 쌓아 놓았다. 아이의 장난감을, 혹은 서류철을 모아두듯 등과 가슴을 맞대도록 눕혀 집적했다.

병자들이 흘린 피와 오물이 하얀 바닥을 더럽히며 넓게 퍼져나갔다. 죽음 직전 병자들의 촉각을 통해 그 존재를 입증받은 악몽들은 산 채로 죽어가던 유령들의 짓무른 등이 떨어져나간 침상에 몸을 누인 채 백색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우린 지옥에 가게 될까? 하고 검은 머리 여자가 물었을 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지옥에 가기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지옥에 가기 않기 위해 잘못된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목을 조르고 서로의 얼굴을 터뜨리고 서로의 악몽이 되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를 겁탈하고 서로를 차지하고 서로를 으스러뜨리고 서로를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증인이 되어줄 수는 없었다. 그들의 자폐적인 언어는 다른 누구도 설득할 수 없으므로.

백색의 등이 그들의 눈 속을 어지럽히고 병실을 더 어둡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잠들 수 없었다. 검은 머리 여자는 홀로 일어서 군복을 벗고 갈빛의 피부에 병자들의 생이 마지막으로 배설해낸 피와 오물을 덧발랐다. 개중 어린 군인들은 그녀의 반짝이는 살이 타자의 오물로 더러워지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아니, 어린 놈들 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불면에 어두워진 그들의 시야에 그녀의 흐릿한 나신은, 오로지 물기 어린 반짝임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피부는 더 찬란하고 신비롭게 보였다. 한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온 오물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흡수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배설된 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야 할 오물이 다른 피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끈적한 피와 싯누런 오줌과 녹색의 변이 건강한 피부 위에 덧발리고 무수한 살결의 틈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죄보다 선행하는 역겨움의 의미를 직감한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악몽의 밤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실제로 여자는 그 자리에 앉아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검은 머리 여자를 두고 다른 층으로 거미처럼 퍼져가며 똑같은 살육을 계속할 때도 여자는 환자들을 쌀포대처럼 쌓아 놓은 자리에, 시신더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들이 흘린 피와 오물을 몸에 발라대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남긴 식사의 흔적을 깨끗하게 정리하려는 사람처럼.

사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한 것은 살육이고 파괴일 뿐이었으므로. 생존을 위한, 삶을 위한 식사, 불가피한 도륙이 아닌 혼란과 죽음만을 위한 폭력이었으므로. 검은 머리 여자가 갑작스레 성녀처럼 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지켜보았다간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라도 보게 될 것 같아, 그랬다간 정말 입맛을 잡치게 될 것 같아 고수머리 사내는 다른 살육자들을 이끌고 다른 층으로 건너갔다. 엘리베이터의 밀폐된 공간 안에 들어가자 그들은 갑작스럽게 그들 역시 검은 머리 여자와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것을, 그들의 군복과 군복이 가려주지 못한 손등, 목과 얼굴 역시 병자들의 배설물로, 그 악취로 물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물을 갓 넘긴 군인은 앳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의 뒷머리를 잡고 치켜들며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군인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 난동의 의미를, 이 파괴가 가진 불변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임을, 죽음에 쫓기는 자가 아니라 죽음을 쫓는 자임을,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자가 아니라 죽음을 갈망하며 허우적대는 지상의 유령임을 피력하기 위해. 하지만 그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 끝에 고인 눈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역겨운 체액, 역겨운 오물, 역겨운 내장들이 있어야 할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룩주룩 비질대며 나올 뿐만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검은 머리 여자의 몸을, 오물에 젖어 눈부시게 반짝이던 아름다운 나신을 떠올렸다.

그년을 죽여버렸어야 했어, 하고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이러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이런 꼴을 당하자고 온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그들은 또 이해해야 하는가? 난데없이 포악하고, 그것으로 끝낼 수는 없는가? 그의 마술과 도래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순간과 죽은 비둘기새끼를 남겨두고 떠난 관객들처럼 그렇게 모두 잊고 떠날 수는 없는가. 검은 머리 여자는 병자들의 오물로 병들고 피부에 독처럼 차오른 궤양을 앓다 뒈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그녀의 눈부신 나신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씨팔 그는 또 기억하는 쪽인가? 침과 오줌, 피와 변을 질질대며 죽어간 노인네들을 그는 마네킹을 부러뜨리듯, 유리문을 부수어버리듯 그렇게 망가뜨리고 잊으려 했는데 그가 난도질했던 말라빠진 인형들 속에 그렇게 축축하고 끈적한 액체가 들어차 있었을 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렇게 시뻘건 피, 그렇게 싯누런 오줌, 그렇게 역겨운 무른 변이 그들의 틈새로 밀려나와 여자의 틈새로 되돌아갔고 사내의 피부 속에도 배어들고 만 것이다. 사내는 지독한 지린내와 달고 역겨운 변의 냄새에 치를 떨며 구역질을 참았다. 이제와서 뱉어낼 수는 없었다. 애송이처럼 헛구역질이나 해대자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나? 그가 죽인 사람들의 육신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영혼의 껍데기만을 놔두고 온통 풀어져 사방으로 꿈틀거리며 퍼져나간 액화된 살을 흠뻑 뒤집어쓰고 그들의 악취와 그들의 악몽에 전염되어 벌벌 떨며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몇 층이었지? 하고 사내는 아직 뒷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애송이에게 버럭 물었다. 금방까지만 해도 헛구역질을 하고 있던 청년은 갑작스레 조숙해진 얼굴로 사내를 향해 도리질을 해 보였다.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사내도 그의 언어를 이해했다. 돌아가면 그들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녀처럼 붉게 변한 그녀의 생살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고 그들은 악몽을 붙들어 왔던 최면으로부터 내쫓겨 죄와 오물 속에서 돼지처럼 기어다니면서 헤매어야 할 것이다. 행군을 멈추어선 안된다. 폭력은 한 마을, 한 국가, 한 혹성 전체에 전염병처럼 퍼져야 한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고 한 부락을 불태우면 노략이며 세계를 불태우면 신의 심판이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그들 속에서 퍼져나갔다. 사내도 들어본 적이 있는 문구였다. 그러나 사내는 그들이 벌써 검은 머리 여자의 영향에 물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영웅 행세도 구원자 행세도, 신의 놀이도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유령으로서 유령이 저지를 수 없는 난장을 만드려는 것뿐이었다. 지상에 그들의 발자국을 찍고 그들의 소란을 내지르고 그들의 피와 그들의 살을 전염병처럼 퍼뜨리려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었을 때, 사내는 어느 층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바깥으로 나섰다. 그가 죽인 자들의 역겨운 생의 악취를, 죽음의 냄새가 아닌 생의, 꿈틀거리며 기어오르는, 반짝이며 온몸을 뒤덮는 지독한 단백질, 효소와 호르몬, 생명 작용의 극악한 악취를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헛구역질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하지만 헛구역질은 안 되었다. 무언가를 토해내려고 하는 순간 그는 타자의 살이 아닌 제 살을, 얼마 남지 않은 그 자신의 살덩어리를 뱉어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면 그는 무엇이 되는가? 마술사도 군인도 아닌 병자가, 악몽만을 기다리며 악몽에 사로잡혀 죽어간 비극적인 궁둥이에서 새어나온 오물밖에, 그밖에 아무것도 아닐 테지.

사내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던 무리를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둥근 살의 공처럼 한 자리에 모여 꿈틀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지독한 피의 악취가 진동했다. 사내는 악취와 비명이 제 몸에서 풍겨오는 것인지 유난히 휑덩그레한 이 층에서 나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대한 육체의 구 속에서 다성부의 아우성 같은 비명들이 터져나왔다. 사내는 저를 따라 밀폐된 악취의 공간에서 내린 군인들을 이끌고 녹빛의 꿈틀거리는 육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들어가지 마세요. 그의 어깨를 붙들고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어린 소년처럼 작고 연약한 소리였다. 사내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앞으로, 그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육체의 틈바귀를 열고 들어갔다. 안 돼요. 제발. 하며 미약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말리는 소리는 점차 불어났다. 안 돼요. 안 돼요. 무언가 비극적인 결말을 짐작한 듯, 차라리 빨리 끝을, 최악을 경험하고 죽어버리고 싶다고 애원하는 무력한 목소리. 육체가 만들어내던 원의 가장 내밀한 곳에 들어선 뒤에도 사내는 한동안 그의 눈앞에 이지러진 광경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다. 붉고 난잡한 추상화처럼 보이는 얼룩들 속에서 형상의 경계와 운동의 방향을 짐작하는 일은 그가 한참 동안 멍하게 한곳만을 들여다보며 서 있는 동안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뒤쪽에서는 사내를 저지하려는 미약한 부름들이 점차 희미해져갔다. 사내를 에워싸던 다성부의 비명들 역시 갑작스레 잦아들었다. 사위가 서리처럼 차가운 침묵으로 변해버린 뒤에야 사내는 제 앞에 놓인 영상의 의미를 냉정하게 해석해낼 수 있었다.

사내가 그 무질서한 얼룩들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는 그 추상화를 수술장면이라고 부를 것이다. 군인들과 같은 녹빛의,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위장을 위한 얼룩 하나 없이 말끔한 민무늬의 수술복을 걸친 의사가 선홍빛 살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공포에 떨리는 손을 억지로 다잡으며 살을 갈라내고 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면서도 창백한 얼굴을 그가 섬세하게 베어내는 여자의 상처에만 고정한 채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사내는 갈라진 상처 위로 드리운 눈부시게 하얀 젖가슴을 보고 이 병약한 집도사에게 불운하게도 온몸을 내맡긴 살덩어리가 여자임을 알았으며 그 위로 곤히 잠든 채 누워 있는 얼굴, 놀랍도록 섬세하고 매혹적인 음영들을 보고서 그의 가련하고 심약한 폭도들이 그를 저지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여자는 최초의 원죄를 잉태하고 있는 어머니였다. 파리하게 질린 집도의는 여자의 배를 갈라 그 속에서 곧 다가들 세상의, 이미 시작부터 끝나버린 비극적인 대기의 악취에 압도당해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고 있는 핏덩어리의 절규를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제 목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투성이의 참극과는 무관하다는 듯, 에로스에게 끌어안긴 채 잠에 든 아름다운 프시케처럼 고적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사내는 그녀의 무관심성에, 제 샅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투와, 제 살을 끄집어 벌리며 밖으로 나가려고, 아니 나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여자의 우아한 잠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신처럼 순결하고 무심한 잠, 악몽과 악취와는 연이 없다는 듯 선홍빛 살과 새하얀 가슴, 피로 난자된 아이의 출생과는 무관하다는 듯 새파란 수면 아래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잠, 오로지 그녀의 얼굴 위에만 새하얗게 고여 있는 진주와 같이 영롱하고 정결한 잠.

사내는 아직도 손을 바들바들 떨며 그의 주위를 둘러싼 유령과 같은 군중들을 유령이라고 애써 믿으며 수술을 계속하고 있던 집도의를, 간신히 손을 들어 탯줄을 잘라내던 집도의를 밀쳐 넘어뜨리고 여자에게 달겨들었다. 여자의 잠에, 여자의 순결한 얼굴에, 비명도 신음도 없이 적요한 낯에. 입을 맞추면 그녀는 동화 속의 공주처럼 깨어날까? 성모처럼 일어나 제 고통을 훤히 드러낸 채로 그녀의 벌려진 뱃속으로 그들의 더러운 악몽을 품어 얼러줄까? 그녀의 태에서 막 끄집어 올려진 핏덩어리도 굶주린 그들의 양식으로 자비롭게 내어줄까?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녀의 곤한 잠과는 무관하게 원죄를, 실존을, 중력을 잉태한 붉은 살에서 벌어진 참상을 묵묵하게 받아들일까?

사내는 그녀가 마을의 유명인사이며 숱한 소문 속에서 많은 이들의 은밀한 매혹의 대상이며 영원에 가까운 잠에 빠져든 채 사람들의 입술 사이를 떠다니며 신의 빛만으로 잉태한 성모처럼 수면 중에 소문만으로 시뻘건 살을, 그녀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절규하는 소란을 임신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저 하얗고 눈부신 잠이 그녀와 놀랍도록 잘 어울리며 그녀는 앞으로도, 그녀의 선홍빛 살점이 파헤쳐지고 난도질 당하며 그녀의 자궁 속에서 몇 명의 낯선 생이 잉태되더라도 여전히 곤한 잠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는 직감에 사로잡혀 그녀의 식물처럼 고요한 입술을 바라보았다. 엷은 눈꺼풀 아래 그녀의 눈은 분명히 사지가 달린 나무의 이파리처럼 여리고 자애로운 녹색일 것이다. 사내는 그가 가늠할 수 있는 영원 동안 그녀의 빛처럼 섬세한 잠에 빠져들어 결코 그녀를 잊을 수도, 그녀의 곤한 잠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황홀에 젖은 몸으로, 결코 그녀와 같은 잠에 빠져들 수는 없는 몸으로 서글프게 자인하며 그녀의 얼굴을, 성모처럼 자애로운 잠을 총으로 쏘아 맞추었다.

프론트에서 다리를 벌린 채 머리를 잃고 널브러진 입구의 여자처럼 잠의 여인 역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녀가 무심하게 내팽개쳤던 선홍빛의 탐스러운 육체만이, 피와 오물에 젖은 살만이 신비로운 잠의 부재 아래에 남겨졌다. 아이는 제 어미의 죽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자지러질 듯 울어젖혔고 사내는 아이를 안아올려 절규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붉고 축축한 혀를 어루만졌다. 잠이 사라진 여자는 더 이상 신비롭지도 순결하지도 않았다. 정육점에 내걸린 창녀들의 살점처럼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피투성이의 살덩어리, 뱃가죽이 훤히 열린 고깃덩이는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수술 중에도 피 한방울 튀지 않고 깨끗했던 집도의의 수술복이 붉은 피얼룩으로 범벅이 되었다. 더 이상 그의 녹색 수술복은 군인들의 얼룩투성이 군복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사내는 아직까지도 졸도할 듯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아이의 침에 젖은 손가락으로 아이의 눈물을 닦고 피와 온기, 애정과 악몽에 굶주린 유령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주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겨들어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순결한 녹빛 눈에 입을 맞추고 연약한 몸뚱이를 주물럭거리며 아이에게 비밀스러운 저주와 축복의 말들을 동시에 쏟아부었다. 잿빛 머리의 늙은 여자 군인은 그녀의 말라빠진 젖가슴에 아이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으며 등이 굽은 남자 군인은 피와 오물, 화약의 악취가 진동하는 손으로 아이의 침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달고 역겨운 이방의 비명에,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차단할 여력조차 없는 연약한 귀에, 훤히 드러난 소리의 동굴에 안달이 난 유령들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실존을 선고하든, 비명과 난장의 증인 역할을 강제하든, 아이가 청중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든 없든, 그 아이가 백치로 태어났든 귀머거리로 태어났든, 벙어리로 태어났든 장님으로 태어났든, 그래서 그들이 그 애에게 부과하려 한 악몽의 진상을 아이가 한 순간조차도 목격하지 못했든 그들이 부드러운 귀를 어루만지며 퍼붓는 눈물 섞인 고백이 증언과 호소가 떨리지 않고 단단하게 멎어 버린 텅 빈 귀 사이로 흘러나가 피와 함께 줄줄 흘러나가 버리든 단단하게 굳어버린 석고상 같은 어미의 젖을 먹지 못하고 임신조차 하지 않은 늙은 젖가슴에 부재하는 양분을 빨아먹지 못하고 순식간에 굶어 죽어가는 소음과 공포에 까무라쳐 죽어가는 연약한 생이 평생 그들의 호의와 악몽을 잊어버리게 되든 말든 그것은 사내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유령들의 갈급한 애정에 찬 손길을 견디지 못해 눈을 까뒤집고 죽어버린 아이의 시신 앞에서 유령들은 흐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늙은 군인이 군복 속에, 제 늘어진 가슴 사이에 아이의 단단한 시신을 집어넣고 일어서자, 유령들은 서서히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순진한 절규로부터 관심을 거두었다. 간혹 늙은 군인의 불룩한 배를, 그녀의 상의 끝자락에 비어져나온 작은 발을 힐금거리던 이들도 이제는 그들의 죄를 나누어주지도 그들의 고통을 증언해주지도 못할 어린 이방의 생명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잠과 얼굴이 사라져버린 여인의 선홍빛 육신을 헤집고 물어뜯으며 겁간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축축하고 거뭇한 피에 물든 육신, 벌어진 피부 벌어진 내장 벌어진 자궁에서 생의 애액을 끊임없이 누설하는 육체, 그녀의 벌려진 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구처럼 보였다. 그들은 잠을 두고 사라진, 버림받은 육신에,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헐거운 생의 구멍에 몸을 파묻으며 흐느꼈다. 겨우 일상적인 삶의 순간, 배회의 시간, 굶주림의 결핌, 고통과 가난의 결여 따위를 그들의 절정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잠을 미루듯 환희를 유예하면 언젠가 그들을 위한 예기치 못한 순간이 반드시 다가오리라고 믿는 허황된 착각 속에서 무용한 순간들을 계속해서 감내해왔던 오랜 기다림을 해갈하듯 그들은 여자의 끔찍하리만큼 거대한 성기를 둘러싸고 여자의 오물과 피에 젖어들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사내는 그의 폭력을 예감하고 어린아이처럼 덜덜 떨며 안돼요, 하고 속살거리던 입술들이 어떻게 그토록 폭력적으로 여자의 살을 물어뜯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이들이 그들에게 그리하였듯, 그들은 이해하지 않고 함께 움직이는 방법을 배웠다. 작고 연약한 진드기가 맹수의 내장을 갉아먹고 우글대는 동료들과 함께 저마다의 영토를 흐물흐물하게 분해하여 흡혈하는 것처럼 가련한 떨림들은 파괴적인 운동으로 변하여 병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깨부수었다. 이것이 그의 예기치 못한 순간인가? 사내는 자문했다.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이건 혁명도 복수도 아니야. 하고 사내는 홀로 되뇌었다. 검은 머리 여자와 같이 이 층에 주저앉아 오물 속에서 모든 것을 끝장낼 수는 없었다. 우린 하나의 생도 새로 잉태하지 않을 거야. 새로운 문구도 새로운 이념도 새로운 언어도 없어. 오로지 무책임한 경멸과 파괴뿐. 생도 죽음도 돌보지 않는 난장뿐.

피 앞에서 서성거리며 헛구역질을 하는 이들에게 사내는 연설을 시작한다.

열 살이 지난 뒤에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믿으시오? 열 살 이후에도 죽지 않고 매번 새로운 하루들을 갱신하여 누적하며 자라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적어도 우린 그런 삶을 살지 않았소. 기껏해야 열 살, 그게 아니라면 훨씬 오래 전에,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어미의 자궁 속에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오랜 고독과 침묵에 질려버린 채 죽어 있었소.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은 모두 우리를 비껴간 것이었고 우리를 울릴 수는 없는 것이었소. 우리가 소음과 함께 떨며 울어 보았자 우리를 돌보는 사람은 없었고 우리는 버려졌다는 상실감에, 타인의 소음에 벗대로 끼어들었다는 지독한 수치심에 흐느껴야만 했소. 이곳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오? 그들이 삶이라는 몽상에 잠겨서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다면, 아직도 삶이 실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면 그건 언제고 깨져야 하는 엷은 비눗방울 속의 무지개와 같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그들을 위해 죽이시오. 아니, 사내는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다시 소리쳤다. 우리를 위해 죽이시오. 오직 우리를 위해서. 오직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살육과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죽음만을 위해 죽이시오. 여태껏 우리를 소외시킨 소음들이 그러했듯. 그들의 비명은 듣지 마시오. 오직 우리 속에서 밀려오는 울분에만 귀를 기울이시오.

그의 말에 귀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제가 지껄이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내는 깨진 창문을 내다보다 딱정벌레의 등처럼, 하수구처럼 시꺼먼 두 눈과 마주쳤다. 상하가 뒤집힌 눈,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으며 그에게 스쳐가는 모든 현상들을 일시에 괄목하는 눈, 추락하는 눈, 자살자의 눈이었다. 사내는 그 눈이 나무둥치의 뒤쪽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오던 검은 그림자라고 확신했다. 사내는 차가운 창문 틀에 배를 대고 허리를 굽혀 검은 눈동자의 행방을 쫓았다. 사지가 뒤틀린 채 뭉그러진 얼룩이 보이는 듯했다. 사내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움칫거리며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호스피스 병동은 환자들에게 생애 마지막의 햇볕이라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려는 듯 성령의 입김을 드리우기 위해 온통 투명하게 제 속을 내보이고 있던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높고 훤하게 뚫린 창문들로 뒤덮여 있었다. 군인들이 난동을 피운 탓에 창문들은 모두 엉망진창으로 깨어져 있었다. 제 몸을 엄습해오는 고통과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들이던 너른 창 밖으로 투신한 추락자 역시 온몸이 유리조각처럼 바스러진 채, 다시는 이어 맞출 수 없는 뼛조각들을 이리저리 나르는 혈류를 토해내며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검은 눈동자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산조각난 유리조각과 뼛조각들 살과 꿈의 난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내는 유리창 너머의 허공마다 알알이 들어차 사내를 응시하고 있는 뒤집힌 검은 눈동자들을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둘러보았다. 지독한 현기증에 헛구역질이 차올랐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토해내서는 안되었다. 창 밖에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떠다니고 있는 무시무시한 검은 동공들, 오로지 죽음만을 향해 질주하는 영상들, 그러나 사내의 응시에 갇혀 떨어지고서도 떨어지지 못한 채 맺혀 있는 음울한 눈동자들, 사내는 그 눈을 쥐어 터뜨릴 듯 하나하나 무시무시한 얼굴로 쏘아 보았다. 곧 끝을 낼 것이다. 그는 아직 깨어지지 않았으며 추락할 수 있을 만큼 높이 올라가지도 않았다. 깨어진 것, 추락한 것, 산산조각이 나 기계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동작이 아닌 헛된 경련만을 바르작거리며 죽어가는 쪽은 그를 위협하는 죽은 눈동자들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사내는 다시금 주문처럼 되뇌었다. 새까만 얼룩과 같은 눈동자들에는 선명한 핵이 있었다. 흐릿한 시야와 붉은 안개가 낀 창밖에 별보다도 선명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 속의 시꺼먼 구멍이 사내를 두렵게 했다. 눈동자들은 창문마다 분열하고 운동하며 증식하고 해체하는, 살아 있는 세포처럼, 배양액 속에 담긴 태아처럼 굴고 있었다.

사내는 창문을 향해 총을 난사했지만 이미 깨져버린 유리 바깥으로 허망하게 날아가버리는 총알은 무엇도 깨부수지 못하였고 거꾸로 뒤집힌 눈들은 그런 사내를 비웃듯 차갑게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한 일방적인 응시는 그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시사하는 듯했다. 나무 등치에서 훔쳐본 소녀와 소년의 입맞춤, 서로를 껴안고 애원하는 그들을 훔쳐보던 사내에게 머물 입맞춤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내의 입술은 입맞춤을 위한 애무의 자리가 아닌, 오로지 어눌한 언어와 무용한 탐식의 구멍일 뿐이었다. 그 구석자리에서부터 쫓아온 그림자는 사내를 옭아매고 사내를 괴롭히며 그의 목구멍 속에 시꺼먼 손아귀를 쑤셔대며 구토를 종용했지만 그는 시꺼먼 눈동자들에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무수히 이지러진 깨진 창문 너머에서 관찰당할 뿐 자살자를 어루만지는 강물처럼 서글프게 서로를 쓰다듬는 소녀와 그녀의 그림자상 사이의 애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는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텅 빈 자리를 허망하게 연결지으려는 방관의 눈짓들은 사내의 휑하게 열려 있는 시간 너머로 빗겨들어갈 뿐이었다. 소녀의 허벅다리에, 그를 움켜쥐고 호응하지 않는, 오로지 그의 착각 속에서만 그를 어루만지는 차가운 살결에 맞비비는 늘어진 성기는 폭력과 학대 이외에는 무엇도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사랑도 증오도, 가장 비참한 관계조차 아니었다. 사내가 이어내려 허둥대며 몰아붙이던 실타래는 어떠한 관계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굴욕적인 성기, 헐벗은 살과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살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늘 방관할 것이고 응시할 것이지만, 텅 빈 검은 눈들 속에서, 자살자의 정지한 시간 속에서 그의 얼굴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응시하고 응시당할 뿐, 마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삶은 시작부터 저주였으며 그는 장애와 같은 폭력과 절망, 흉악하게 일그러진 외모와 비참하게 말라 비틀어진 내면을 가지고 태어났다. 사막을 축축하게 적실 우물은, 밤하늘에 퍼져 있는 아름다운 별들을 머금은 우물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사내가, 갈증에 미쳐버린, 그러나 스스로 물을 구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꽉 다물린 입구를 부수어 깨뜨리는 일밖에 없었다. 말갛고 달콤한 애액이 아닌 오물에 절은 더러운 진창이, 뭉그러진 내장과 오줌이 새어나오는 깨진 우물의 귀퉁이에 입술을 대고 굴욕적으로 꿇어앉은 무릎 아래에 머리를 부딪히며 게걸스레 훔쳐먹는 수밖에. 그들은 노략하고 훔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홀로 죽는 수밖에. 아니,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처음부터 죽음밖에,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자살밖에는 없었다. 지금 그들의 난동은 그저 패악이며 폭력이며 학살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폭력에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난장이 혁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서로에게 일러주어야 했다. 이건 혁명이 아니라고. 다행히도, 그리고 서글프게도, 말라 비틀어진 추악한 면면들을 보는 순간 그들은 모든 진실을-절망이라는 유일한 진실을 상기해냈다.

문제는 언제나 자살이다. 그들이 하는 짓거리는 모두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 유일한 권리, 유일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임무인가? 권리인가? 자유인가? 그것은 더는 유예되어서는 안 될 순간, 그러나 끊임없이 미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다. 그들은 아직 충분히 높이 올라서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발짝, 단 한 발짝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한 발짝의 추락도, 한 발짝의 비상도, 한 발짝의 종말도 없다. 아직은. 그러나 기다림이 그들에게 끝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그들을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지 않았듯. 그저 한결같은 공동묘지에, 들리지 않고 듣지 않는 소음의 고장에 내팽개쳐 버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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