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펠리와 정복과 혁명의 바깥의 물방울 – 사내와 폭력 1

겁탈당한 소녀가 헐벗은 몸으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지르는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 고수머리 사내는 중절모 아래에 죽어 있던 새끼 비둘기를 보았을 때와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사랑과 기쁨, 환희와 같은 긍정적인 단어들을 현화하고자 했던 의지가 선의지일 수 없다는 깨달음. 홀로가 되지 않기 위해, 마음껏 사랑받고 이해받기 위해 버둥거렸던 몸부림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적막감. 그가 마술을 할 때마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누군가는 겁탈당하고 죽어간다는 것. 살아남기 위해 그는 누군가를 죽여야 했고, 그의 생존과 그의 행복은 곧 다른 이의 순결에 대한 약탈일 수밖에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가 갈망하는 대상은 그를 욕망하는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비둘기 새끼를 죽인 마술사, 기가 막힌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술사, 삼분 오십초의 계산에 진 마술사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그는 무(無)조차 될 수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아닌 자를 사랑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가? 사내는 막사로 걸어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대로 좋은가? 그는 이대로 남은 평생을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새끼 비둘기를 죽이지 않고서는 마술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실패뿐인 존재로. 그는 더 이상 한 마리의 비둘기도 세계의 프레임 바깥으로 날려보낼 수 없을 것이다. 중절모의 좁은 공간 속에서 몸부림치다 지쳐 쓰러지고 차라리 죽어버린 비둘기 새끼처럼, 어째서 그는 비둘기 새끼처럼 쉽게 죽어버릴 수 없는 것일까? 그는 한 여자를 겁간했고 한 생명을 죽였다.

사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자라오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먹고 마시며 생을 이어나갔다. 당장이라도 말린 육포를 씹어 삼키는 일을 관둔다면, 무수한 입자와 균들이 노니는 생의 배양액을 마시는 일을 그만둔다면 그는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자 속 작은 동굴에서 단식하여 죽어버린 비둘기처럼. 예정되어 있던 간식을 받지 못하고 굶어 죽어버린 비둘기처럼. 그래, 그 비둘기는 때를 놓쳤기 때문에 죽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굶었기에, 단식하였기에 죽은 것이다.

사내는 붉은 흙을 으스러뜨리면서 단식 광대들의 묘기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에 갇혀서 열흘이고 서른날이고 오로지 순수한 물만을 마시며 계속 단식하는 광대에 대해. 그는 그런 광대의 존재를 소설 속에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사내가 보기에 그런 광대질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식욕을 끊어내고 그를 동물로 만드는 고기들을 거부하고 오로지 제 살 속에 깊은 굴만을 파내려가며 속을 들여다보면 되는 것이다. 바깥을 향해, 사냥감과 사냥꾼을 향해 열려있는 외감을 모두 닫고 내감의 문만을 활짝 연 채로 빈약한 속을 굴착해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사내는 물마저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서커스가 될 것이고, 죽음에 열광하는 숱한 관객들은 사내의 단식에 환희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죽음의 아슬아슬한 위기에서도 생을 쟁취하는 미묘한 순간이라는 것, 결국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기적적인 생존자이지 숱한 자살의 현장은 아니라는 것을 사내는 잘 알고 있었다. 외줄을 타는 묘기를 부리는, 금장이라도 넘어질 듯 출렁거리는 줄 위에서 간신히 발을 내디디는 줄타기꾼이 어떠한 위기에 처하든지 관객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심지어 그가 고꾸라져 떨어진다고 해도 환호하리라. 다만 줄타기꾼이 광대로서의 생을 망각하고 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죽음, 연극의 끝에 도사린 죽음은 공연이 아닌 실제이다. 관객은 보다 실제같은 것을 원할 뿐, 시뮬라크르가 아닌 실재 자체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를 가득 메운 핏자국과 고기 굽는 냄새, 무대 위를 쏘다니는 벌거벗은 살덩이, 무대 위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진짜여서는 안되며, 설령 그것이 진짜 물자체라면 반드시 무언가 다른 것에 대한, 보다 멀고 아득한 철학에 대한 은유여야 했다. 예컨대 짐승의 피는 그저 짐승의 피일 뿐 아니라, 몸의 철학, 탈육체성의 재전유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내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앞으로 내밀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모두 원점인 셈이군.

사내는 의도적으로 다리를 뻗는 동작에 따라 이어지는 몸의 흔들림과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참을 수 없는 비의도적인 경련 사이를 오가면서 비틀거렸다. 흔들림은 불길하면서도 치명적인 예감처럼 격렬해졌다. 나무의 둥치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개의 그림자를 보았다. 소녀와 소녀의 물그림자 사이의, 아니, 소녀와 소년 사이의 결합을 묵묵히 지켜보던 죽음의 그림자였던 사내처럼. 사내는 그림자 쪽으로 다가섰지만 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니, 아니다. 개는 사내의 등 뒤에 누운 채 사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그의 군화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등 뒤를 볼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가련하게 더러운 피륙을 펼친 채 사내의 경련에 따라 덜덜 떨고 있는 개의 악취를 느낄 수 있었다.

사내는 단식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었다. 한번 단식을 시작한다면 그는 끝까지 기다리고 말 것이다. 수백 번의 삼분 오십초가 지나가도, 사내는 예기치 못한 순간을 찾아내지 못하고 끝없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관객들은 사내가 얼마간의 삼분 오십초를 기다리고, 삼분 오십초가 흐를 때마다 그가 가지게 될 명성을 기다리고, 삼분 오십초가 지날 때마다 그에게 몰려들 관객들을 기다리고, 삼분 오십초가 지날 때마다 더욱 값비싸고 기름진 음식으로 부풀게 될 미래의 든든한 위장을 기다리고, 삼분 오십초가 지날 때마다 그와는 멀어지게 될 굶주림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그 지독한 단식 끝에 사내가 기다리는 것은 오직 삶일 뿐 다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오직 긴 굶주림 끝에 찾아올 죽음의 순간만을, 죽음만을, 그래,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가 죽고 나면 관객들은 그들이 헛돈을 날렸다는 것, 거리에 널리고 널려 있는 흔한 자살쇼를 보러 이곳까지 수고스레 왔다는 것,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위대한 단식광대가 아니라 굶주림에 지쳐 죽어 있는 숱한 걸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겠지. 그에 대한 비평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왔던 기자들은 한 줄의 기사도 내지 않고 돌아가고 말겠지. 너무도 흔한 죽음에 대한 기사는 아무도 읽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사지 않는 기사를 그들은 결코 쓰지 않으니까. 사내의 시신은 내버려질 것이고 아무도 사내의 단식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사내의 죽음은 발치에 채이는 무수한 쓰레기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것으로 좋은가? 정말?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이제는 아무도 겁탈하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은 채, 그가 견뎌야 했던 실존의 고통을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한 채 그대로, 마치 삶이 그에게 어떤 아픔도 아니었던 것마냥 쉽게 죽어버려도 되는가?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들, 사지를 찢어내고 온몸을 으스러뜨리더라도 갖고 싶었던 것,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 울고 울리는 것, 해치고 상처입는 것, 끝내 그에게는 다가오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 순간들, 언제나 오해와 착각으로 전락해버렸던 찬란한 성취의 순간들, 그 모든 비참한 아픔이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죽어도 좋은가?

아니, 아니다. 그는 더 살아남을 것이다. 그는 천성적인 예술가였으므로 그에게 지워졌던 고통은 모조리 표현하고 죽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순간을 직접 만들고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의 예기치 못한 순간을 강요하고서.

사내는 어느덧 흙먼지에 더럽게 변해버린 군막사 부지로 돌아왔다. 군인들은 더 이상 잠도 자지 못하고 그렇다고 이렇다할 임무도 없이 군막사 주위를 망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침낭과 함께 낙엽처럼 널브러져 있는 이들은 오랜 불면에 지쳐 눈을 뜬 상태로 허공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 역시, 이곳에 도착하고 난 뒤, 잠에 대한 강박이 불러일으키는 잠에 대한 저항보다 더욱 강하게 드밀고 들어오는 피로에 지쳐 오래도록 잠을 자고 난 뒤에는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그는 들어갈 수 없는 잠의 입구를 향해 눈을 돌리는 일이, 눈꺼풀을 감고 잠의 동굴 입구만을 끈덕지게 노려보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게 괴로운 일인지, 얼마나 격한 두통과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응시하는 일, 타인에게는 쉽사리 열리는 잠과 무의식의 문이 정작 그 문의 주인인 사내만은 소외하며 굳건히 닫힌 채, 마치 그 안에는 어떤 입구도 없다는 듯, 검은 문의 미로 속에 어떠한 꿈의 궁전도 무의식의 안온한 평안도 없다는 듯 잡아채는 그 위장술이 얼마나 역겹고 서글픈지도 알고 있었다.

사내는 막사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섰다. 사내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큰 발소리를 내며 걸었다. 흙과 낙엽을 짓찧어 뭉개버리듯 폭력적인 걸음걸이었다.

사내가 연설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낯선 행성의 방랑자들은 마치 오래 전 고수머리 군인이 마술사였을 시절 그의 모자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비둘기 새끼의 날갯짓을 쫓아 달려든 어린 관객들처럼 사내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일어나요. 우린 유령이 아니야. 여기서 이렇게 썩어갈 거요? 무얼 위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버린다고 해서 이 혹성 사람들이 무얼 알아줄 것 같소? 아무도 우릴 기억하지 않을 거요. 코코펠리마저 우릴 잊었소. 날마다 버스에서 흔들거리면서 멀미와 환각과 싸워가며 우리가 얻은 게 뭐란 말이요? 결국엔 이런 낯선 땅에 내버려졌을 뿐이지. 결국 우린 버려진 거요.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지시도 내려주지 않았소. 그들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혹성이라는 영토가 아니라 우리라는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것뿐이었다는 거요. 우린 그들의 기대대로 고향과 먼 곳에서 죽어가겠지. 지금 우리 꼴을 보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령처럼 배회하며 돌아다니는 꼬락서니를! 여기서 풀 뿌리 하나라도 직접 채집해서 먹은 사람이 있소? 지나가는 사슴새끼 목이라도 따서 먹어본 사람이 있냐는 말이야. 아무도 없지. 우린 그저 습관 같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고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준 육포만 질겅거리면서 죽어갈 뿐이라고. 이렇게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소. 육포는 언젠가 떨어질 거고 운이 좋다면 우리가 먼저 죽어버리겠지만 정말 그게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오? 운 좋게 죽어서 유령이 되는 일, 그게 지금 우리 상황이랑 다를 게 무엇이냔 말이야. 우린 이미 유령인데.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죽어서 다시 유령이 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봐야 하지 않겠소.

그럼 뭘 어쩌자는 말이오? 일어나라는 사내의 말에도 어리둥절하게 사내의 얼굴만을 올려다보던 몽롱한 군중 사이에서 고수머리 사내의 바로 앞 자리에 앉아 울분에 찬 연설을 가만히 듣고 있던 검은 머리 여자가 물었다.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을 텐데. 당신 말대로. 그곳에서도 여기서도 우린 유령에 지나지 않으니까.

누가 그냥 가자고 그랬소? 그렇게 쉽께 끝낼 순 없지. 우리도 세상에 흔적을 남겨 보자고. 우리가 유령이 아니라는 걸, 우리도 물리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광학적-촉각적 존재라는 걸 증명해 보자고. 난장을 부리잔 말이오.

혁명은 실패할 거요. 하고 검은 머리 여자가 음울하게 대꾸했다. 난 벌써 감옥에서 수십 명의 동료들을 잃었어요.

처형당했나요? 검은 머리 여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요. 모두 자살했어요. 우린 이전 왕의 폐위를 바라면서 혁명을 일으키려 했죠. 모든 준비가 완벽하다고 여겼어요. 그는 폭군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무력한 왕이었고 그 때문에 수백만 명 혹성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으니까. 각 시의 관료들을 상대로 받아낸 성명서도 가지고 있었고 비밀리에 입수한 폭탄을 우린 결행의 밤에 가슴과 배에 매달고 잠들었죠. 아니, 사실은 아무도 잠들지 못했을 거예요. 혁명을 앞둔 투사들은 그들의 머릿속에 밀어닥치는 엄청난 상념들과 그만큼이나 거대한 침묵의 알력다툼을 이기지 못해 다만 그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견뎌내는 일밖에는 할 수 없는 법이니까. 사실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우린 잠들지 못했죠. 그래도 곧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살로 이루어진 폭탄을 터뜨리고 광합성으로 합성된 산소를 생물들의 호흡기에 강제적으로 퍼트리는 식물들처럼 무차별한 군중들이 우리의 살과 함께 우리의 이상과 함께 산산조각 나게끔 할 계획이었으니까. 선택받은 살과 선택받지 못한 살 모두 영원한 이상과 함께 죽어가기를 바랐으니까. 그날 아침 우린 몸 속에 폭탄을 숨기고 최종 협상을 빌미로 잡힌 왕과 고위 대신들과의 면담에 참석했죠. 이전 국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양복을 빼입고 말이죠. 소식을 들은 건 왕국의 정원에 들어섰을 때였어요. 하고 여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왕님 말이에요. 지금의 코코펠리 여왕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뚝 떨어졌다고. 마치 신의 계시처럼. 그건 우리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이었어요. 만약 우리가 왕과 우리의 몸을 모두 터뜨리고 난 뒤, 썩은 살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난 뒤 그녀가 도래했더라면 우리의 혁명은 그 무엇보다도 찬란한 불꽃이 되었겠죠. 새로운 생명을 일깨우는 젖은 황무지가 되었을 거예요. 하다못해 여왕이 한 시간이라도 늦게 떨어졌더라면, 그럼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우린 모두 화려하고 숭고한 죽음을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여자는 욕설을 하며 짐승의 뼈를 내뱉듯 날카로운 어휘들을 토해냈다. 그년이, 아니, 여왕님이, 아니, 세상이 모든 것을 망쳐 놓았어요. 우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우리의 행위는 무용했음이 극적으로 증명되었죠. 그날 바로 여왕의 즉위식이 열렸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그녀의 등장은 계시처럼 완벽했고 그에 반해 우리의 혁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으니, 우린 곧바로 왕의, 아니 여왕의 정원에서 쫓겨났죠. 우린 몸 속에 품었던 폭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오랜 주문에서 풀려난 듯 몽롱했죠. 겨울여왕의 품에 끌어안겨 얼음성으로 갔다가 갑작스레 그녀로부터 내쫓긴 카이가 된 것 같았어요. 자신이 여왕의 애동도, 여왕의 애인도 아닌 하잘 것 없는, 눈 먼 소년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기분이었죠. 이제는 얼음 궁전도 마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왕도 게르다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한때는 여왕의 애동이었고 게르다의 연인이었던 우리가, 새 왕의 개국공신이었고 옛 왕의 반역자여야 했을 우리가, 결국엔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가 대체 무얼 할 수 있었겠어요? 우린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는 왕국의 뒷골목에서 자폭장치를 눌렀어요. 동료들은 그렇게 죽었고 우리의 하잘 것 없는 결속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것이 역겹게 타오르는 검은 살덩어리로 증명되었죠. 내 폭탄은 불발이었어요. 그래서 난 살아남았고 다시는 자살을 할 용기를 낼 수 없었어요. 군에 들어온 건 혹시 여왕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길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어요. 그년, 아니에요, 그녀에게 우리가 하려 했던, 그녀를 위한 혁명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완전히 실패해버린 혁명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검은 머리 여자는 애처롭게 흐느끼며 짓뭉개진 언어를 늘어놓았다.

무얼 바랐던 건지도 이젠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결국 우리의 혁명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왕국의 뒷골목에서 벌어진 자살 소동이었을 뿐이었는걸. 우리가 나누었던 이상, 우리의 왕국, 우리의 세계, 우리의 미로를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하고 우리만이 끌어안고 죽어버렸는걸. 새로운 이념은 검은 살의 감옥 속에 갇힌 채로 불타 사라져 버렸는걸. 그때 난 그들의 검은 살과 함께 타들어가 죽어버린 게 틀림 없어요. 이젠 무얼 그리 애타게 부르짖었는지 무얼 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지독한 실패의 순간만이, 살점이 역겹게 짓물러 타들어가는 냄새만이 날 계속 따라다닐 뿐이에요. 난 아직도 사람의 살이 타들어가는 악취를 맡아요. 그건 그리 숭고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했죠. 가엾은 카를은 가슴쪽에 달았던 폭탄이 불발해서 휑하게 구멍이 뚫린 배로, 이제는 무엇도 소화시키지 못하고 무엇도 배설하지 못할 끔찍한 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내장을 질질 흘리면서 타들어갔죠. 그가 내게 무어라 비명을 질렀던 것 같은데. 그게 여왕 만세였는지, 죽은 왕은 물러가라였는지, 살려줘였는지, 죽여줘였는지, 구해줘였는지 모르겠어요. 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죠. 다행히도 다른 동료들은 모두 즉사했어요. 난 그 전까지 카를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었는데 그 순간만은 카를의 흉측한 얼굴만이 내 세상이었죠. 그 애의 비명과 그 애가 타들어가는 냄새와 그 애의 훤히 열린 배, 생식기 아래로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시뻘건 내장이 관능적이라고 느꼈고 그런 생각이 치가 떨리게 역겨웠고 난 어째서 여왕이 그렇게 일찍 도착한 건지, 어째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야 했던 건지, 또 난 어째서 아직도 살아 있는 건지, 분명히 자폭 버튼을 눌렀는데, 한 번 누르고 두 번 누르고 열 번을 누르고 스무 번을 누르고 아직도 계속해서 누르고 있는데 왜 아무것도 터지지 않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고 난 끝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지, 설마 끝은 이러한 상태로 영원의 순간으로 파고들어 영영 끝나지 않는 채로 계속되는 건지, 이곳에서 난 여왕이 즉위식을 마치고 혁명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열린 새로운 시대를 연설하고 우리의 죽음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삶을 살게된 사람들이 여왕의 이름을 연호하며 오직 그녀의 존재만으로 가능케된, 우리의 죽음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혁명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그녀 자체만으로 완전무결한 유토피아를 살아갈 때까지 이 끔찍한 비명과 악취는 계속되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계속해서 되묻고 있었죠. 어째서 그녀는 그렇게 일찍 도착한 것일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녀는 먼저 도착해야만 했을까?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게, 그래서 아무도 우리를 돕지 못하게. 난 그녀를 증오하기에 이르렀어요. 우리의 죽음이, 이 시뻘겋게 흘러내리는 역겨운 냄새가 모두 그녀의 존재 때문에, 그녀의 너무 이른 도착 때문에 벌어진 참상인 것만 같았죠. 하지만 그녀를 저주해 보았자 바뀌는 건 없었어요. 미친 듯이 계속해서 누른 탓에 초소형 자폭스위치는 망가져버렸고 난 내 안에서 터뜨릴 수 있는 게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아 버렸죠. 그동안 믿어오고 믿게 하려던 것들이, 그동안 내 살과 피를, 우리의 결속을 이어주던 폭발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깨달아 버렸어요. 다시 여왕을 만나러, 아니 한 번이라도 그녀를 만나고 우리의 죽음에 대해 일러주러 군에 들어왔다고 했지만 그것도 거짓인지 몰라요. 그날 어째서 그렇게 빨리 도착하셨어요? 하고 물어 보았자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어요? 그녀에게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혁명, 우리의 실패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인데. 우리의 실패는 그녀의 실패가 아니고, 그녀의 즉위는 우리의 성공이 아니었는데. 단 한 순간의 어긋남, 그 한 번의 어긋남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고 또 모든 것을 누설했죠. 내 증오는 그녀의 증오가 아니고 그녀를 향한 증오도 될 수 없다는 걸. 아직도 생살이 타들어가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이건 내 몸속에서 폭발하지 않고 도사리고 있는 폭탄이 제 폭발이라는 역할에, 실패한 역할에 몰두하여 그 존재의 성공을 열망하면서 뿌리는 환상의 악취라는 걸 알고 있어요. 모든 것이 실패했죠. 삶도, 혁명도, 폭발도, 죽음도. 그리고 혁명이라는 것은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우린 모두 실패자들이니까. 인과의 세계로부터, 노력과 성과의 법칙으로부터 쫓겨나 널브러진 우연의 조각들만을 탐식하며 겨우 생을 이어나가는, 겨우 죽음을 향해 미약한 걸음을 이어가는 실패한 망령들일 뿐이니까.

다른 군인들은 그저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여자의 연설을 홀린 듯 듣고 있을 뿐 어떤 감정적인 호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몽롱한 얼굴을 떠도는 감정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여전히 심각한 잠의 결핍에 취해 있는 것인지, 사내와 여자의 연설이 불러일으키는 망상적인 환희와 고통에 도취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사내는 그들이 연설에 매혹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은 머리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다름아닌 사내의 연설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녀는 믿고 싶기 때문에, 사내의 꿈같은 환상에 몸을 온전히 맡기고 싶기 때문에 계속해서 부정하려 하는 것이다. 사내가 그녀의 부정을 말끔히 씻어내기를 기다리며. 그녀의 실패를 부정해주기를 기다리며.

이전의 혁명이 실패했던 까닭은 그들의 시신 위에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려 했기 때문이오. 우린 그럴 필요가 없소. 새로운 여왕이 이곳에 도착하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지. 당신은 여왕을 기다렸기 때문에 여왕에게 배신당한 거요. 우린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거요. 누구도 우릴 기다리지 않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기다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우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거요. 새로운 미래를 꿈꾸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정치를 새로운 이념을 새로운 삶을 기대하지 않을 거요.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 자들에게 비명을 강요할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침묵을 이끌어 낼 것이오. 우리는 지상에서 유령처럼 숨어 사는 일을, 폐기 불가능한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버려지는 일을 그만둘 것이오. 아무도 우리를 버릴 수 없고 아무도 우릴 쓰레기로 만들고 우리를 해치고 우리를 더럽히고 우리를 부정할 수 없소. 우리가 우리를 버리고 우리가 우리를 쓰레기로 만들고 우리가 우리를 해치고 우리가 우리를 더럽히고 우리가 우리를 부정하는 거요. 우린 체제를 변혁시킬 생각이 없소. 무정부주의를 주장할 생각도 없소. 우린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저 끝을 향해 질주하는 거요. 빌어먹을, 닫혀있는 문들을 전부 부숴버리고 빛도 그림자도 투과시키지 않는, 우리를 비껴서 나 있는 창문들을 전부 깨부수고 어디에나 들어가고 어디에서나 나오는 거요. 지상을 뒤덮은 오물처럼, 한때 지상에 도래했다는 멸망의 홍수처럼. 하지만 홍수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없을 거요. 우리조차 살아남지 못할 거요. 우린 아무런 언어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제 살과 몸을 전염시켜 퍼뜨리는 페스트처럼 우리의 죽음을 퍼뜨리는 거요. 아무도 우릴 들을 필요 없게, 그들이 우리의 죽음을, 우리의 비명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와 함께 죽을 수 있도록. 그저 무너뜨리고, 파괴하고, 상처입히고, 죽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흔적이오. 우리에겐 자손도 미래도 없소. 일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를 배제했고 우리가 매일 밤마다 부쳤던 편지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게 뭐요? 혁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일러줄 판관은 어디에도 없소. 판관 뿐이겠소?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리의 흔적으로 남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소. 누구든 우리의 혁명을 기록할 수 있을 거요. 자, 글을 써요. 하지만 남기기 위해서 쓰지 말고 오로지 사라지기 위해서 글을 써요. 우리의 파괴가 우리의 종말이 끝난다 해도 우리의 글을 읽어줄 사람은 아무데도 없을 테니.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우리의 난장을 읽어내지 못할 테니. 그러니 지독한 우수와 고독, 고통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글을 써봤자 소용없을 거요. 그건 하릴없이 모래장난을 하며 견고한 성을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쌓고 무너뜨리는 일과 한치도 다를 바가 없소. 그래도 우리와 함께 죽어간 사람들은 우리의 흔적을 앓고 우리의 글을 앓고 우리의 고통을 앓고 우리를 읽지 않아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를 알게 되겠지. 그걸로 된 거요. 제기랄, 그러니까 내 말은 쓰레기가 되자는 거야. 하다못해 쓰레기도 땅을 더럽히는데 우린 이렇게 무해하게 썩어버릴 텐가? 쓰레기의 유령이 되어버릴 텐가?

사내는 어느덧 미소짓고 있는 군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생으로부터 쫓겨난 이후,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세상이 자신을 매혹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유아기 이후 다시 생에 제 몸을, 생의 살을 제게 귀속시키며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망가뜨림으로써 처음으로 살아볼 것이다. 그들은 죽임으로써 살고 죽음으로써 살 것이다. 죽음의 난장 속에서 처음으로 삶을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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