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붉은대기 혹성

버스 안에서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환상과 싸우고 있던 군인들이 정복할 수 없는 혹성들로 보내질 때도 그들은 익숙한 멀미에 헛구역질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질려버린 낯으로 검은 숲 한복판에서 내렸다. 그들의 얼굴에 더 이상의 공포는 없었다. 수백 번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하나의 단순한 사건과 정서는 무한히 증폭되어 견딜 수 없는 무게를 가지게 되므로 그들은 두려움을 포기하였다. 다가오는 절망은 이미 겪은 절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도래할 일들을 모두 체험하였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두려움이라는 것은, 어둠 속 미지의 움직임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확고한 불안과도 같은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여왕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들의 신이었고 그들의 신은 모든 것, 모든 운명과 절망, 고독과 슬픔까지도 갖춘 자여야 하므로. 그들은 그들 신의 모방품이었다. 그녀보다 작고 희미한 결정으로 반짝이는 그들의 몸에는 그녀가 가진 절망과 고독, 슬픔과 불안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나 그녀의 것에 비하면 하잘 것 없이 어슴푸레한 빛깔로 부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코코펠리 여왕이 무엇을 한탄하는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후회하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과 같은 고독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은 가장 강렬한 감정은 사랑이나 자비, 은혜가 아닌 고독이라는 것을. 그들은 고독을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군인들은 우주선 버스에서 내려 스무 명 정도의 인원이 머물 천막을 펼치고 그 속에 몇 개의 침상을 들여놓았다. 그중 몇은 낯선 토양 위에 드러누워 익숙한 천막의 녹빛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어야 할 것이었다.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무엇이라도 될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확고한 예감의 형태로 짐작하고 있는 무엇이라도.

밤중 잠든 어른들 사이를 빠져나와 소년이 검은 숲 속을 서성인 것도 그러한 예감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소년은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었다. 강렬한 예감과 현실, 한밤의 꿈과 한낮의 몽상은 서로의 살결 속으로 파고들어 피부를 잃고 뒤얽혔다. 몽롱한 세계의 연들이 서로를 엮고 풀며 갈수록 단단한 매듭으로 조여들었다. 소년은 더 이상 예감과 현재를,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다. 소년이 꿈과 같은 풍경에 쉽게 녹아들어간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검은 숲의 끝자락은 황홀한 붉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년은 마법처럼 반짝이며 일렁이는 대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하얀 구름들이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소년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소년은 고양이를 다루듯 구름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얀 구름이 금방이라도 몸을 젖혀 세우고 이빨을 드러낼까 두려워하며. 그러나 정말 두려워하지는 않으면서. 그는 구름이 그를 깨물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물고기처럼 대기를 떠도는 축축한 구름들을 매만지다가 소년은 온통 시뻘건 빛에 젖어든 소녀를 발견했다. 소년은 소녀가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흘러들어온 외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핏빛 대기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으므로. 그녀는 벗은 몸을 붉은 호숫가에 담근 채 발그스레한 살을 조금씩 드러내며 수영읋 하고 있었다. 생기 넘치는 살덩이가 탐스러운 열매처럼 물속을 떠도는 모양을, 수면 아래에서 언뜻언뜻 내비쳐지는 몸서리치게 붉은 빛깔을 소년은 홀린 듯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검은 눈이 소년의 눈을 마주보았을 때에도 소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눈조차 대기와 호수물에 젖어 한없이 붉게만 느껴졌다. 이곳의 달도 그처럼 붉은 빛깔일까,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녀는 피처럼 번들거리는 물을 뚝뚝 흘리며 호숫가에서 걸어왔다.번들거리는 나체에, 살아서 만개한 육신에 당장이라도 짐승과 벌레들이 달겨들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에서 감도는 과육의 향기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소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낯선 이를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사냥감을 바라보는 짐승처럼, 혹은 방랑자를 굽어보는 붉은 구름처럼.

소녀는 눈부시게 하얀 구름들을 젖은 피부로 밀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소녀의 금빛 머리칼, 얼굴을 뒤덮은 선홍색 반점들과 길고 얇은 목, 커다란 체격과 길쭉하고 구부정한 다리가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다. 소녀는 소년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큰 키였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을 때, 수면처럼 반짝거리는 혀의 색은 입술처럼 검었다. 소년은 황급히 달려들어 그녀의 검은 입술에 붉은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소년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장밋빛으로 물든 대기 속에서 붉고 찬란한 빛깔로 물든 소녀를 보았을 때부터. 아니, 그녀의 피부색으로 젖어든 대기 속으로 처음 헤엄쳐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의 금빛 입술, 황혼에 젖어든 치아는 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연극과 마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려는 듯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속삭였다. 소년은 대기 속에 흩어진 밀어를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년은 그의 몸을 넘치도록 잠식해 온 연정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소녀에게 들이밀며 물었다. 너야? 하고. 소녀는 불가해한 언어를 내뱉었지만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그녀였다. 소년의 첫 출정 때 두고 온 유령, 매혹적인 노래만을 남기고 사라진 유령, 소년은 다른 군인들이 모여 있는 검은 숲속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파란 피부 속에서 일렁거리는 멀미와 같은 붉은 비밀을 가둔 채로.

소년은 보초 서는 일에 자원했다. 지독한 어지럼증과 풍토병에 시달리던 군인들은 평소처럼 무기력한 태도로 그들에게 주어진 미래에 순응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닥쳐오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나서서 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이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면, 그들이 가장 원치 않았던 운명, 그럼에도 그들을 한결같은 흔들림 속에 실어가던 버스의 세계가 다시 그들에게 도래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무방비한 잠에 빠져든 이방인들을 내버려두고 꿈의 크고 붉은 품을 쫓아 달려나갔다. 과육의 속살처럼 새하얀 달이 부푼 나신을 훤히 드러내며 떠오를 무렵 소년은 새벽 점호를 하듯 잠든 사람들의 부재를 확인하며 그들의 이름을 세 번씩 연달아 불렀다. 그들이 끝내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것을, 그들이 현상의 세계로부터 먼 곳으로 파고들어 더 이상 작은 기척이나 소음에 깨어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소년은 군모를 벗고 잽싸게 소녀를 향해 달려갔다.

소녀는 언제나 붉은 호수에서 익사한 유령처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의 옆에, 어둠에 검붉게 일그러진 호수의 살 속으로 자그마한 발을 넣고 앉아 그녀의 끝없는 재잘거림을 들었다. 그녀의 말소리는 아무런 가사도 없는 악기소리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침묵만으로 소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반주하며 핏빛 하늘에 흩어진 별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소년이 밤과 소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들도 소년의 여린 눈막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년이 침묵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소녀의 속삭이나 밤의 적요가 화답하였고 소녀가 노래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소년의 침묵과 밤의 눈길이 함께했다. 그들 세 이방인은 한 자리에 앉아 그들의 연주를 계속하였다. 소녀는 소년의 침묵을 들었고 소년은 소녀의 노래를 들었다. 소년은 군인들의 지친 불면이 아니라 소녀가 꾸는 푸른 꿈을, 창백한 유령을, 찬란한 절망을 돌보는 보초병이었다. 밤은 소년과 소녀가 네 개의 여린 눈에 나누어 담은 푸른 유령을 지키는 검은 개였다. 밤은 그들 모두의 침묵과 노래를 부드럽고 차가운 새벽의 육신으로 감싸 돌보았다. 소년과 소녀, 밤은 검붉은 핏빛으로 엉글어져 살과 목소리, 침묵과 존재를 섞었다.

소녀가 간혹 눈물을 흘릴 때 소년은 소녀의 시꺼먼 눈과 눈물을 핥아 주었다. 처음으로 맛본 눈물은 짭조름했다. 사막의 호수 속에 넘쳐흐르는 소금의 생명처럼. 생리혈과 오줌이 지닌 짠맛, 삶을 위해 배설하는 생의 역동이 지닌 짠맛이었다. 소년은 소녀와 헤어져 혼자 있을 때마다 입술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자신의 눈물을 삼켰지만 소녀의 눈물을 핥을 때처럼 아플 정도의 짠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년은 눈물을 마시는 버릇을 버릴 수 없었다. 소년은 언제든지 울 수 있었기에, 눈물로 바꿀 수 있을 만한 절망은 언제나 그 육신 속에 도사리고 있었기에 눈물을 삼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군인들은 소년의 눈물을, 시도 때도 없는 울음소리를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언제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언제라도 지긋지긋한 절망을 눈물의 예감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의 세 번의 호명과 점호였다. 소년이 계속해서 불침번을 자청하는 일을 말리는 이들은 없었으나 소년이 이름을 부르는 일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독한 멀미가 가시고 나자 그들은 시차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현기증과 같은 병적인 수면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고질적인 불면에 사로잡혔다. 꿈의 세계로 도피하지 못하고 눈꺼풀 아래의 검고 단단한 허상 위를 떠도는 감은 눈들을 어둠 속에서 소년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소년은 평소처럼 세 번씩 이름을 불렀지만 몽롱한 허상 속에서 실체와 잠, 지독히 선연한 현상의 감각에 짓눌려 시달리는 그들은 제 이름을, 이제는 허울뿐인 이름, 내버려진 이름, 비참한 이름을 돌볼 여력조차 없었다. 그들은 소년의 호명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의 이름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낯선 대기에 적응하지 못해 기적과도 같은 잠을 이어가는 몇 명의 사내와 여자를 제외하면 완전히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소년이 그들의 불면을 내버리고 작은 발로 흙의 부드러운 살결을 두드리며 달려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플라스틱처럼 반들거리는 생경한 빛깔의 나뭇잎들을 헤치며 숲을 걸었다. 검은 숲에 있는 생물들은 너무나 이질적이었고 그래서 도저히 살아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밟고 지나가는 붉은 흙과 색색의 혈관들이 엉겨붙은 나무줄기는 모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조 보석처럼 아프게 반짝였다.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플라스틱 열매들, 결코 썩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을 단단한 빛깔들, 제 살을 깨뜨려 금이 간 빛무리들이 수천 갈래로 조각난 달빛을 떠벌리며 한밤의 비밀을 누설하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들의 붉은 숨에 묻어난 생의 비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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