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아이의 물방울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기억해?

아이는 네 손가락을 움켜쥐고 이야기했다.

응. 그녀가 끝내 춤을 추지 못했다는 데까지 이야기했어.

그래. 피륙을 구겨 넣은 유리병에서는 값비싼 향기가 났어. 난 그걸 머리에 끼얹고 바깥으로 나갔지.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나를 쳐다봤어. 거리를 떠돌던 개들은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찡그렸지. 벌집 모양으로 생긴 후각 신경들 때문에 그들은 사람보다 더 괴로웠을거야. 난 향기에 괴로워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서 향수를 팔았어. 어떤 이는 값을 지불했지만 어떤 이들은 가래침을 뱉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내 머리칼을 잡아당겼지.

그게 춤하고 어떤 관련이 있는데.

아무런 관련도 없어. 있었더라도 당신을 설득시킬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 계속 이야기해 줘.

내 머리는 망신창이가 되었어. 더러운 침이 늘러붙고 칼로 난도질 당하고 군데군데 쥐어 뜯겼고 억지로 뽑힌 탓에 두피에서는 피도 흐르고 있었지. 그런데도 향기는 지워지지 않았어. 사람들은 나를 연민하거나 조롱했어. 그래도 난 그들이 두렵지 않았어. 무대 위에 맨몸을 내던진 소녀를 알아? 누군가 그녀의 가랑이를 더듬고 총구를 들이대고 피가 흐르는 입술을 짓밟아도, 헝클어진 머리칼에 연인과 함께 리본을 매달고 사진을 찍어대도 그녀는 끝까지 버텼어. 그리고 다시 눈을 맞췄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눈 속에 되비치는 자신을 보았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 그들은 그녀를 사랑해서 울어 주었어. 저를 사랑해서 울었어. 그리고 저를 사랑해서 상처를 입힌 거야.

그녀가 이야기해 준 거야?

아니. 나는 그냥 알고 있어. 알 수 있어. 어딘가에 그런 그녀가 있다는 걸.

너무 더운 것 같아. 지긋지긋한 문을 다시 열어 주겠니.

그래.

아이는 푸른 손으로 커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어. 미워하는 일. 끝까지 미워하는 일.

난 널 미워하지는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질투할 뿐이지. 눈앞에 총구를 들이대도 여전히 삶을 생각 할 수 있는 생을. 목을 조르고 멸시하는 손들이 두려워 전율할 수 있는 몸을.

넘어진 의자 위에는 두 개의 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춤을 멈추고 빛이 닿지 않는 곳을 맹시하는 얼굴이. 아무도 너희에게 목을 매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숨을 죽이고 떠나간 모든 삶들은, 아늑한 죽음으로 되돌아간, 마침내 삶의 문턱을 넘어간 모든 절명한 자들은 대체 어디에서 춤을 추는 방법을 배운 것일까. 닭의 가슴을 물고 수음하는 애들은 모두 어디로 떠난 것일까. 이곳에는 항상 너뿐이다. 시신들은 항상 머리의 뒷부분을 보고 있었다. 뒤집어진 눈은 탁한 피가 뭉쳐 있을 뿐이다. 빛을 졸여 세상을 느끼던 감관은 한껏 열린 채 뒤로 돌아가 버린 채이다. 네 앞에 널브러진 죽음들은 네게 가장 끔찍한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모두가 죽은 세상에서, 모두가 죽음으로 돌아간 세상에서 너만이 삶을 견디고 있다. 너는 너보다 먼저 자살한 이들을, 그들이 차지한 죽음을 질시한다. 너만이 죽고 모두가 살아남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하나의 이야기 정도는 완성될 수 있었을까. 아니, 너는 이미 알고 있다. 너의 죽음과 무관하게 이야기는 미완인 채로 남을 것이다. 어휘들은 시가 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끝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도 없을 것이다. 그저 여기만이 계속될 것이다. 너를 떠나고 버린 모든 것, 네가 가진 적 없는 모든 것, 잃어버릴 수조차 없는. 너는 기름때가 진득하게 늘러붙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이는 역겨운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웃어 보였다. 네가 손을 거두려 하자, 머리를 계속 만져달라는 듯 네 손을 뒤통수에 가져다 대었다. 머리칼에는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뒤통수가 함몰되어 있지도 않았고, 커다란 총알 구멍이 뚫려 있지도 않았다. 간혹 손톱 크기만한 작은 피딱지가 손가락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세계는 네가 예감하는 그대로 계속될 것이다. 꿈과 달리 예감은 언제나 정확했으니까.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냉동고에서 아홉 명의 아이들은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을까. 조금씩, 조금씩, 머나먼 은하의 시간으로 늙어가고 있었을까. 그 애들도 삶에 절망하고 있었을까. 바꿀 수 없는 냄새에, 온도에, 시간에 지쳐가고 있었을까. 곧바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예감에 안도하고 있었을까. 다행이야. 다행이야. 생을 예찬하는 숱한 생물들이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그 애들도 지금 여기를 앓고 있었을까.

현재만이 계속될 것이다. 언제나 지금뿐일 것이다.

Series Navigation<< 편지의 물방울연과 아이의 물방울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