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무 유령-3회

장님 여자가 유령을 찾은 것은 냉랭한 냄새 때문이었다. 신랄한 냉기가 구부러뜨린 철쭉 내음이 시린 기억을 흘리며 시들어가고 있었다. 서러운 냄새로 일그러진 공간에는 체온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주변의 향취들을 썩지 않는 냉기로 감염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열 없는 갈증에 붙는 이름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령이었다.
“여자야, 나를 찾은 여자야. 네가 나를 볼 수 없듯 나도 너를 볼 수 없단다. 더 가까이 오지 않으련. 너무 춥구나.”
여자는 구부러진 찬내를 끌어안았다. 흡혈까지 각오했으나, 유령은 여자의 온기만을 짓씹을 뿐 피는 마시지 못했다. 여자의 두툼한 살갗이 뜨뜻한 핏물을 추위 속에서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여자는 유령을 둘러 안은 팔에 체온을 얽어냈다.
“어때, 좀 따뜻해지는 것 같니? 네가 앞을 못 보는 건 나랑은 다른 이유 때문이야. 색이 없기 때문에 망막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는 거지. 색을 입으려면 우선 열을 가져야 한단다. 체온을 가진 것들만이 빛을 두를 수 있거든.”
유령은 여전히 춥다고 말했다. 유령은 열보다도 우선 냄새를 입고 싶다 속삭였다. 진한 냄새는 열기 속에서 피어오르기에 여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이 철쭉들의 향내를 모조리 꺾어놓기 전에, 여자는 지독한 냄새 찌꺼기를 모아왔다. 뜨끈한 돼지의 피로 유령을 적셨을 때, 유령은 몸을 조금 떨었다.
“그래, 그렇게 떠는 거야. 열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면 네 빛깔도 냄새도 가질 수 있어. 몸을 제대로 떨려면 노래를 불러야 돼. 자, 나를 따라 소리 내봐.”
체온을 삼켜낼 음률을 가르쳐주기도 전에 여자는 응급실로 추방당했다. 덜걱이는 다리로 돌아왔을 때, 여자는 끼익, 빈약한 파동 한 자락을 들었다. 성대를 떨어내는 노래를 배우지 못한 유령은 편법을 익혔다. 열 없이 눈을 꿰뚫는 레이저의 발광법을 터득한 것이다. 유령은 여자에게 제가 찾은 소리와 냄새, 색을 자랑하며 고맙다고 재재댔다. 유령은 여전히 찼고, 춤추는 법도 알지 못했다. 풍부한 화성의 울림 대신 냉랭한 가짜 빛깔을 갈취해낸 유령의 목소리는 곧고 얇았다. 전율하지 못하는 인공의 파장은 제 빛마저도 얼렸다. 빙결된 목소리는 노래가 되지 못하고 철쭉의 체온을 썩지 않을 냄새로 꺾어 놓았다. 시린 팔뚝을 비비는 손이 거칠하고 서러웠다.
“그만 먹어. 너는 열을 소화시키는 법도 배우지 못했잖니. 아직도 춥지?”
“그래, 여자야. 나는 색도 냄새도 목소리도 찾았어.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듯, 이제 나도 너를 볼 수 있단다. 그런데도 아직 추워.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
냉기로 얼어붙은 밤하늘에 오리온자리가 붙박여 있었다. 여자는 버들버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흰 별 뭉치를 가리켰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 별들을 보고 있어. 찬 하늘에서도 빛나는 기억들은 그만큼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 몸을 떠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아직 너는 제대로 열을 삼키는 법을 모르지만, 저렇게나 뜨거운 별들은 장님에게도 또렷이 느껴질 정도니까. 너도 몸을 좀 덥힐 수 있을 거란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유령은 오리온자리를 지켜보았다. 뾰족한 색점을 찡긋거리며 푼푼하게 얽힌 화음을 쥐어 보려 애썼다. 별들의 떨림은 너무도 정교하게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유령은 음성 한 자락을 분리해내고자 했지만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별자리의 풍성한 합주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한 유령까지도 둥둥 울려대었다. 별의 춤은 곧 윤기 나는 노래로 반짝이며 흘렀다. 기름진 노래를 따라 부를 피륙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유령은 별의 떨림이 만드는 따끈한 온기 속에서 난삽한 추위와 갈증을 달랬다. 얼어붙은 하늘에서도 달게 녹아 빛나는 별들을 닮고 싶었다. 먼 별의 녹녹한 온기를 쬐며, 유령은 뜨겁게 끓어 흰 빛을 뿌리는 제 노래를 상상했다. 언 몸을 녹일 피가 필요했다. 핏물로 그득 찬 혀가 필요했다. 한 줄 현의 얼음 악기로 유령은 시리게 울었다. 먼 별의 온기는 색점을 녹이기에 충분치 못했다. 얼어붙은 유령은 눈물 없이 울어야 했다.

서럽고 허기진 아이들은 싱거운 침방울을 매달고 소리질렀다. 유령의 갈라진 비명에 길들여진 어른들은 미끈한 울음을 자꾸만 놓쳤다. 부모들이 입맛을 잃자 아이들도 배를 곯아야 했다. 아파트는 여전히 추웠다. 깔쭉 피어오르던 철쭉들은 향을 빼앗긴 채 말라 죽었고, 빙결된 하늘에는 다시 겨울별이 떴다. 203호 아저씨가 불렀던 무당이 다시 찾아왔을 때, 청중은 수십 배로 늘어 있었다. 목사마저도 흔쾌히 복비를 나누어 냈을 정도였다.
“어이구, 이거 내가 아니라 보살님이 오셔야겠군, 그래.”
“예? 그럼 무당님도 귀신을 못 쫓아내겠다, 이 말입니까?”
“아니, 저희가 복비도 두둑이 챙겨드렸는데. 그러지 마시고 잘 좀 봐주세요.”
“저렇게 독헌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바리보살님이라도 온다면 모를까. 벌써 지가 산 것이라도 되는 양 활개를 치잖나. 저 요상헌 색은 또 뭐냔 말여. 암 것도 못 보는 망자면 몰러도 저렇게 냄새까지 풍기면서 붙박여 있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요망한 끈을 저러코롬 끈덕지게 붙잡고 있는디 내가 어쩌란 말인가. 바리보살님이 직접 오셔갖고 제를 지내주거나, 보살님처럼 숨살이 꽃이라도 가져 와서 진짜 사람 맹글어 주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이까짓 돈 몇 푼으로 쫓아버릴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여.”
“무당님 잘 좀 봐주십쇼. 저 귀신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있어요. 그래, 애들은 또 어떻고요. 몇 날 며칠을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던지.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데요. 지금 이 사람들 죄다 귀신 되게 생겼다니까요.”
“바리공덕 할미가 와도 어쩌지 못헐 일을 나 보다 어쩌란 말여. 생귀신 수백 놈 생길 지경이 되면 바리보살님이 직접 오실지도 모를 일이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녀. 자네들이 숨살이꽃, 허더 못해 피살이꽃이라도 직접 가져올텐가. 귀신놈도 피가 돌면 떠떳해 질 걸. 그게 아니면 애 하나라도 잡아서 고아 멕여. 그럼 추위는 가실 걸세.”
“아니 애를 잡으라고? 이 미친 할망구가 뭐라는 거야?”
“더 들을 필요도 없어. 됐으니까 당장 나가라 그래요.”
“그래, 사람이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요. 귀신 잡으라고 불렀더니 산 사람을 잡으라는 게 무슨 망발입니까.”
“복비도 다시 내 놓고 가요. 으휴,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미친 게 다 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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