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의 물방울 2

그가 낡아빠진 방수시트 위에 드러누워 구석자리에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린 보랏빛 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똑똑하던 노크소리. 거울을 깨고 나오는 태아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하고 애석한 노크소리. 이등 항해사는 늪처럼 끈적이는 입을 벌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속삭였다. 그 순간 선장은 모든 것을 직감했다. 장마의 전조처럼 떨어져내리는 물방울 두 방울. 화부는 선장의 부름을 받고 조타실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쥐새끼들은 날카롭게 벼린 이를 굵다란 목에 박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화부의 목은 순식간에 떨어져나갔고 검고 둔중한 몸은 아득한 공백과도 같은 밤 속에 내팽개쳐졌다.

조리장과 일등 항해사 역시 선장의 부름을 받고 덫과 같은 바다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선장은 고개를 저었다. 천장 구석에 매달린 젖을 향해, 그를 부풀리고 그를 기르고 그를 살려낸, 언제나 그를 삶 쪽으로 밀어내던 보랏빛 멍울을 향해 그는 손을 벌렸으나 젖은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무례한 천사들에 시꺼멓게 뒤덮인 썩은 살덩이. 그는 날개도 없었고 길쭉한 침도 없었으므로 천사들의 향연에 끼어들 수 없었다. 유령은 누구도 원치 않을 물 한 컵을 받아 놓고 사라진 손을 천사처럼 비벼대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안전할 것이었다. 숙명과도 같은 자기보존, 쥐새끼들이 우글거리는 안전한 영토가 평생 지속될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침묵을 지르며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검게 출렁이는 밤뿐 어미도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두려웠다. 어째서 그녀는 그의 목을 조르지 않았는지. 암컷 모기처럼 살을 빨며 길게 내민 목을 어째서 부러뜨리지 않았는지. 그녀의 자궁을 헤집고 음부를 더듬고 종양처럼 올라와 그녀의 늙어빠진 젖까지 탐하는 독을 어째서 도려내지 않는지.

거울 속의 소녀들은 흐느꼈다. 등 뒤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검은 천사들, 소녀들은 춤을 추며 흐느꼈다. 말라빠진 다리 사이에서는 흙탕물처럼 새까만 피가 흘러내렸다. 쥐새끼들, 비스킷을 건빵을 스프를 갉아먹고 선인장처럼 무럭무럭 자라난 쥐새끼들은 그의 목을 내리치고 그의 심장을, 그의 허파를, 그의 등뼈를, 다리뼈를 모두 부러뜨렸다. 도축용 칼을 든 화부는 목 매단 소녀처럼 애처롭게 훌쩍이면서 그의 등 뒤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는 울고 있었고 밤은 울고 있었고 개들은 소녀의 치맛자락만을 하염없이 물어뜯으며 울고 있었고 쥐새끼들은 아무것도 비추어지지 않는 새까만 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울고 있었고 그들은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또 살아남을 것을 직감하고 있었으므로, 숙명과도 같은 생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니. 도축용 칼을 든 화부는 칼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쥐새끼들은 그의 곁에 둘러앉아 미친 듯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거울을 깨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느티나무에 걸어놓은 스카프는 바람에 찢겨 떨어져버렸다. 사망 신고서에는 적을 수 있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죽은 화부의 사진을 보던 아이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감싸안고 흐느꼈다. 졸도할 듯 비명하는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화부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 얼음처럼 차가운 검은 바다를 한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 화부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 화부는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는 것.

선장은 유령들에게 둘러싸여 흐느꼈다. 유령들에게는 젖도 살도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끌어안아주지 않았다. 괜찮아, 이제는 잠들 수 있을 거야. 이제는, 하고 그에게 오염된 젖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선장은 아이처럼 흐느꼈다.

선장님, 일등 항해사님이 부르십니다.

선장은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어둠 속에 웅크려있던 쥐새끼들은 그를 짓밟고 그를 터뜨리고 그를 부수었다. 황홀에 젖은 새까만 눈들은 검은 천사들처럼 불가해하고 신비로웠다. 선장은 화부가 일등 항해사가 조리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를 적대하거나 무시하는 검은 눈들, 구더기처럼 하얗게 꿈틀거리는 별들은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소녀를 겁간한 이방인은 알 수 없는 소리로 흐느꼈고 소녀는 목 밑에 들이밀어진 면도날을 내려다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폭우처럼 온몸을 짓눌러오는 기류를 견뎠다.

어머니 이름도 모르세요? 응급의는 그를 의심스럽게 내려다보았으나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활짝 열린 문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도 우산 없이 맨몸으로 비를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응급의를 태우고 사망진단서를 태우고 물컵을 태우고 검은 젖가슴을 태우고 그를 태우고 자라나는 불 속에 그는 얌전히 머물렀다. 왜냐하면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비보다는 불타는 방이 나았으니까.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사진을 향해 몰려들었다. 손바닥만 한 쪽배를 타고 실종되어버린 사진작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고 눈을 감은 돼지들의 침묵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징그럽게 웃으면서 소세지를 게워내는 아이들. 죽이기 위해 무참하게 불려놓은 생들. 이 땅에는 사람보다도 돼지가 많았으니 그녀는 탯줄을 끊기 전에 네 발 달린 돼지새끼의 목을 끊어놓아야 했다. 그랬다면 가로막도 경계도 없는 악몽은 태어나지 않았을 테니.

선장님, 일등 항해사님이 부르십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등 항해사가 없었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부두에서 밀수해온 이방인들도, 어미도 아비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에서 태어난 아이니까. 절망 속에서 발생한 폭력의 효과에 불과하니까.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아무도 이름짓고 싶지 않은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너는 가여운 아이야. 난 너를 사랑하기로 작정했단다. 작정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는 불결함. 성자와도 같은 인내와 자비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그는 그녀의 음부를 씹으며, 그녀의 젖을 어루만지며, 면도날 아래에서 헐떡거리며, 그를 낳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면도날로 그의 탯줄을 자르고 배꼽을 헤집고 악몽조차 깃들 수 없는 사물의 시체로 되돌렸더라면 그는 꿈도 없이, 잠조차 없이 멎어들었을 텐데. 왜냐하면 사물에게는 삶도 원한도 없으니까.

선생은 얼룩과도 같이 희뿌연 화부의 시신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더러운 창에 코를 박은 채 비명을 질렀다. 소녀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가장 암울하고 비관적인 설명이라도 해준다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녀는 끔찍하게 배가 고팠고 거울 속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화부가 숨겨놓은 위스키도 비스킷도 건빵과 스프도 없었으니까 소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절망적으로 메마른 상념들에는 어떠한 내용도 없었다. 소녀는 애타게 물었다. 화부는 어떻게 된 건데요? 선생은 신경질적으로 찍찍거리며 고개를 저었고 아이들은 검푸른 입술을 달싹거리며 찍찍거렸고 선장은 아득한 안개 속으로 떨어졌다.

그를 굽어보며 킬킬거리는 쥐새끼들은 없었다. 공포에 질려 비명하는 이방인들도 없었다. 몰락하는 세계-검은 쓰레기봉투가 넘쳐흐르는 바다와 쓰레기봉투 속에서 태어난 순결한 생명들, 이제는 쓰레기봉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선홍빛의 주둥이들, 평균율이 아닌 순정율로 조율해놓은 현악기를 부르튼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퍼포먼서들-를 재현하듯 울렁거리는 땅은 화부를 뱉어놓고 일등 항해사를 뱉어놓고 조리장을 뱉어놓으려 몸부림쳤으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토해놓을 수는 없는 법이므로 병적으로 출렁거리는 밤, 수억 개의 시선들, 수억 개의 물결에 파편화되고 산발되고 찢겨나간 기억들, 오직 한 번뿐인, 추상화될 수 없는 수억 개의 발생들은 서로에게 무심하거나 서로를 증오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연민하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은 흐느끼고 있었다. 거품조차 일지 않고 사그라드는 저열한 초대에, 일말의 매혹조차 없는 덫에 걸려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억 개의 시선들은 여전히 수억 개의 시선인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발작하듯 울부짖으며 잔뜩 찌그러진 얼굴을 사진에 들이밀고 있었고 시가 될 수 없었던 유령들, 배는 영원과도 같은 밤의 영토를 떠돌고 있었고 이방인들은 타인의 악몽 속에서 어리둥절한 고개를 까딱거리며 찍찍거렸다. 미미한, 애석한, 불안한 출렁거림. 서로에게 등을 돌린 소년들. 오로지 서로를 추억하기 위해 등을 돌린 소년들. 그러나 웅성거리는 찍찍거림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관계도, 맞닿은 등도, 떨어진 등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소년들은 쥐의 대가리를 긁적거리며 찍찍거렸다.

여가수 요제피네처럼 가늘고 천박한, 카프카처럼 관조적이며 위대한 찍찍거림, 울분에 찬 찍찍거림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일등 항해사는 이등 항해사의 주머니에 술 창고 열쇠를 흘려넣었다. 수도원의 어린 사제들이 마을 여인의 주머니에 말린 육포와 금화를 밀어넣듯이. 밀회를 약속하고 향기로운 금기를 상기시키듯이. 이등 항해사는 길게 뻗어나온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기쁨에 겨운 찍찍거림을 삼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로 밀려든 쥐새끼들은 찰랑거리는 소독약 속에 불결한 머리를 밀어넣었다. 오로지 불결함만으로 이루어진 구균들, 폐렴과 우울과 광기과 슬픔, 비참함과 패배의 배양그릇은 알코올에 뒤섞여 흔들거렸다. 그들은 멸균과 청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로 소독되었다. 소독된다는 것은 그들의 불결함이, 불결함일 뿐인 그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양 없이 적대하며 불가능만을 사유하던 그들의 소용돌이가 굽이치며 녹아내리고, 양화시킬 수 없는 슬픔들은 고유한 죽음을 죽고, 자기보존의 당위를 잃어버린 병은 썩어버린 살을 통째로 산화시키며 사라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고 더 이상 애걸하지 않았고 더 이상 불결하지 않았다. 눈부시게 깨끗해진 그들은 한 조각의 불가능한 세포도 남지 않았다. 온화하게 피폭된 생은 줄줄 흘러넘치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들이 바글대며 호소하던 생보다 더 극악한 질병이었던 치료약, 열등한 모든 생을 치명적인 백색의 사물로 환원시키는 알코올 속에서 그들은 죽었고 그들의 질병, 그들의 사유, 그들의 절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유언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화부의 목을 졸랐다. 그들은 화부의 배를 가르고 흐느꼈다. 멸균된 화부는 흐느낌도 없이 검고 아득한 악몽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들의 생을 유지해주던 불결함 없이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을 수 없었므로, 더럽지 않은 쥐새끼는 쥐새끼가 아니었으므로, 디오니소스의 사슴들처럼 취해버린 그들을 다시 굴종시킬 수 있는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수억 개의 무성적인 시선들은 웃음도 울음도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선장은 절망뿐인 미래를 예상하며, 언제나 절망뿐이었던 징조를 읽어내며 그들의 짙고 달콤한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아이들은 새파란 혀를 내밀고 흐느꼈다. 소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시가 되지 못한 이들을, 더 이상 불결함이 아닌 이들을, 불결함이 아니기 위해 사라져버린 이들의 짙푸른 자리를 응시했다. 거울에 발톱과 이빨을 박고 울부짖는 쥐새끼들. 물풀처럼 길게 솟아오른 가느란 목들. 소녀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재하는 존재를, 결여를 표시하는 무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고 선생은 고개를 저었고 응급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어머니의 이름을 모른다고요?

선장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귀를 목을 허파를 심장을 배를 다리를 터뜨리는 유령들. 안전하지 않은 영토는 어디에도 없어야 했으니 멸균되는 것은 불결함뿐이었다. 벨벳같이 부드러운 환희. 이등 항해사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선장은 악몽의 시작을 유예하며 눈을 감았지만 보랏빛 젖가슴도, 구석자리의 유령도, 선장실 밖의 유령도, 똑똑 하는 노크소리도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눈꺼풀도 가림막도 어둠도 침묵도 공백마저도 없었으니까.

아이들은 집에 가게 해 달라고 아우성쳤다. 이제 사진을 보고 싶지 않다고, 우리들로부터 사진을 빼앗아달라고 아이들이 울부짖었으나 소녀가 마지막 사진을, 언제나 마지막인 사진을 제출하지 않으면 그들은 돌아갈 수 없다며 선생은 고개를 저었고 선원들은 고개를 저었고 이방인들은 고개를 저었고 썩어가는 젖을 토해낸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조각들은 전율했다. 사라진 불결함, 좌절도 파열도 소진도 없이 중화되어버린 불결함. 소녀는 선생이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결말이라도 이야기해 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이유라도 설명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거울에는 귀도 고막도 유령들도 없었으므로 거울 속은 모순과도 같은 침묵뿐이었다.

영원히 사방으로 사라져가는 흐느낌. 파도는 한 컵의 물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켜버렸다. 게걸스러운 입은 잔뜩 벌어진 채로 수억 개의 눈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숙명처럼 솟아오르는 세이렌들은 선원들을 끌어안고 목을 조르니 사랑에 빠진 화부와 조리장과 일등 항해사와 선장은 날카로운 비늘 하나라도 빼앗으려 손을 허우적거렸지만 그들의 안개와도 같은 꼬리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절망과는 달리 절박하지도 격렬하지도 않은 희망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그들은 순순히 끝없는 밤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다는 수억 개의 시선만큼이나 밝고 매끄러웠다. 수억 갈래로 찢겨나간 거울들 속 수억 번의 노크 소리, 수억 번의 침입과 수억 번의 재난, 수억 개의 덫과 수억 번의 죽음. 그들은 수억 개의 선박 위에서 죽음을 연출했다. 이방인들은 죽을 수 있는 자들을 죽였고 죽지 못한 자들은 자살조차 하지 못한 채 발발되어버린 죄, 심판받지 못할 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는 죄 앞에서 아무런 흐느낌도 없이 울부짖음도 없이 침묵했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이제, 이제 그들의 앞에는 무엇이 남아있나. 그들은 당장이라도 넘실거리는 밤으로 뛰어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남아 있는 한없는 감실을 어둠을 감금을 표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덧 새벽은 무참하게 떠오르고 있었고 그들은 절망에 젖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죽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밤,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어둠, 몽롱한 눈과 끔찍하게 젖어든 핏빛의 몸, 어디선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죽음의 검은 정령들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선생은 어느덧 소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화부는 죽지 않았어. 알겠니? 화부는 죽지 않았어. 저 사진은 죽음에 관한 사진이 아니야. 죽음을 재현하는 사진도 생산하는 사진도 암시하는 사진도 아니야. 알겠니? 네가 찍어온 쥐의 사진, 그 비참한 얼룩은 너무도 조악한 징후야.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되 죽음을 찍어서는 안 돼. 우리는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선연하게 자멸해야 해. 그래야 자멸하면서 떠오르는 유일한 본질을 최초의 구성을 최후의 궤적을 포착해낼 수 있을 테니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울 바깥에 없는 것들이 거울 내부에 비추어지리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

그래. 거울에는 내부가 없으니까.

소녀는 선생이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소녀를,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밤을 잔혹하게 물어뜯으리라는 상상에 시달리며 선생의 다물린 입과 불길한 악몽 사이의 긴장에 시달리며 찡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화부가 죽지 않았다면 저 애들은 왜 그렇게 울었던 거죠? 봐요, 아직도. 아이들은 울고 있었다. 제 어미의 죽음을 목도한 갓난애처럼, 힘없이 미끄러지는 젖만을 응시하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기처럼, 쥐나 돼지의 젖으로 제 순결한 식욕을 채울 수는 없었던 사람의 아이들처럼. 소녀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그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누구의 생도 빼앗을 생각이 없다고, 사진 속의 유령이 연기처럼 기어나와 그와 눈을 마주친 이들에게 저주를 걸고 그의 생을 갈취하리라는 상상은 증거도 신빙성도 없는 괴담에 불과하다고. 화부의 죽음은 그들의 거울상이 아니라고.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거울을 보듯, 거울에 비친 제 끔찍한 화상을 목격하듯 울부짖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들 너머의 것을 몽상할 수 없으리라. 이제는 아무도 죽지 않은 화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으리라. 소녀는 사진가의 암실에 감금된 채 알몸으로 생애 최후의 얼룩ㅇ르 남기는 아이들의 몸부림을 떠올렸다. 배는 여전히 가라앉지 못하였고 어둠 속에 둥글게 감금된 사라진 섬과도 같은 섬을 표류하고 있었다. 안개는 아득한 징후들을 재상연하며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를 위에서 떠돌았다. 소녀는 사라지지 않은 잔상들을 둘러보며 입을 벌렸다.

난 어머니들이, 위대한 시인의 어머니들이 시를 쓰던 방식대로 시를 열망할 수밖에는 없겠죠. 내 삶은 시가 될 수 없을 테죠. 우리에겐 어떤 비극도 도래하지 않을 거니까. 화부에게, 쥐들에게, 소녀에게 결말은 없으니까. 쥐를 죽일 수 없었어요. 쥐의 목을 졸랐지만, 쥐의 숨이 멎어드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고 믿었지만 쥐는 죽지 않았어요.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악몽 속의 쥐새끼를 수천 마리 수만 마리 학살해도 우리에게 죄를 묻는 사람은 없죠. 난 나를 심판하기 위해 실재하지 않는, 그래, 죽은 쥐새끼만큼이나 현존하지 않는 법을 발명해낼 수밖에 없었지만 당신은 우리의 심판관이 되어주지 않았죠.

선생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어서 사진을 제출하라고 다그칠 뿐이었다. 소녀는 더 이상 무엇을 찍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녀에게 비추어지는 모든 것을, 그녀를 하염없이 겁탈하고 긁어내리고 물어뜯는 쥐들의 이빨과 부러진 발톱, 감각할 수 없는 악취 속에서 정지한 하수구의 풍경을 포착하고 있는데도, 소녀는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나도 쥐를 해치고 죽이고 모욕하고 싶어. 보편에 편입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편에서 멀어지기 위한 방식으로. 하지만 혐오와 차별이 아직까지도 보편의 흔하며-심지어는-은밀하기까지한 언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특수해지기 위해 경멸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난 경멸과 혐오의 적합한 대상과 방식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어요. 나를 제외하고는. 자신에 대한 천착적인 경멸, 이것은 예술가가 지닌 가장 기본적인 성질일 뿐이죠,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을 뛰어넘어 여성을, 남성을, 게이를, 헤테로를, 초식동물을, 육식동물을, 벌레들을, 환상을, 자연을, 현실을, 추상을 경멸했다고 전해지죠. 그 보편적이며 초월적인 경멸이 근대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마스터피스(masterpiece)로 만드는 것이라고요. 하지만 그래요, 고백할게요. 난 아직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진심으로 경멸하지 않아요. 강력한 자성처럼 끈질긴 자기혐오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타자의 고통과 타자의 불결함과 타자의 역겨움을 식물의 이파리를 뜯어내듯 그렇게 잔혹하게 망가뜨리고 손톱에 붙여서 물을 들일 수는 없는 건가요. 내 언어는 이미 실패한 언어, 내 글은 출판에 실패한 어머니의 글, 스프를 끓인 증기가 서려 눅눅하게 변해버린 가죽 일기장 안쪽에 정갈하고 미세한 글씨로 눌러쓴 폭력적인 시, 아들을, 딸을, 빌어먹을 쥐새끼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다는 시,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허벅지를 드러내며 활보하는 여자애들의 연약한 입속에서 뿜어져나오는 매캐한 담배연기와 진득하게 늘러붙은 오물처럼 매혹적인 언어를 혐오하며 그 애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고모라가 그 애들의 유혹적인 입술을, 비밀스러운 이름을, 담배연기처럼 희멀건 허벅다리를, 초경도 하지 않은 자궁을 물어뜯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사라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걸, 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거울이 되고 싶어요. 한없는 진창에서 몽상할 수 있는 건 쥐새끼들뿐이죠. 난 쥐의 죽음이 아닌 다른 것, 찬란하고 비극적인 음률과도 같은 것을 찍고 싶어요.

Series Navigation서문의 물방울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