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물방울

옆 침대에서 풍기는 여름 냄새. 달큰한 오물의 냄새와 뒤얽힌 냄새가 역겨워서 그 애의 목을 조르고 두툼한 베개로 얼굴을 짓누르고 싶었다고, 현은 말하지 않았다. 상상의 감실에서 그 애를 가장 모욕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고문한 적이 있다고, 현은 말하지 않았다. 너는 그 애에게 향긋한 침묵 너머의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에게 비밀이 필요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 너희는 비밀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변신은 풀리고 너희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미지들이 사라진 평평한 어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그녀의 자취를 쫓는다. 기름때가 묻은 손가락.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을 활자들.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는 몽상들. 몽상이 사라진 잠, 잠이 사라진 꿈.

가장 처음의 순간을 기억하니? 그곳에는 아무런 배경도 사물도 언어도 없어. 난 그저 시뻘건 어둠 속을 응시해. 어둠은 어떤 전조도 없이 끈적하게 소용돌이치고, 나는 그걸 느낄 감관도 없이 진흙 같은 그늘 속에 파묻혀. 미안. 거짓말이야. 난 너보다도 거짓말에 능숙하니까. 네가 원수의 뱃속에서 삶을 향해 꿈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검은 흙 속에 파묻혀 있었어. 꼭 내 눈 하나를 붙여 볼 만큼 자그마한 구멍으로 바깥을 훔쳐 보았지. 바깥의 대기는 온통 눅눅한 초록 빛깔이었어. 어느날은 녹빛 하늘 대신 길고 날카로운 노란 막이 나를 들여다보았지. 그건 고양이의 눈이었어. 그가 내게 물었지.

당신은 죽었나요.

아니요. 어째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나요.

그야, 당신이 흙 속에 파묻혀 있으니까. 우리는 죽은 몸들을 무덤 속에 묻고 잊는답니다.

잊는다고요? 잃는 게 아니고?

가늘게 좁아드는 동공에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비추어졌어.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지.

누구도 나를 묻어 준 적이 없어요. 누구도 나를 잊어 준 적이 없어요.

그래요. 누구도 당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당신은?

반들거리던 노란 막이 사라지고 나는 눈을 감았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현과 함께 있었지. 그 애는 늘러붙은 입술을 움찔거리면서 내게 손을 뻗었어. 오래도록 씻기지 않아 쉰내가 나는 몸을 어루만지면서 생각했어. 그 애가 아파하던 냄새는 이런 게 아니었을 거라고. 그 애가 갈망했던 몸은 이런 게 아니었을 거라고. 우리는 대체 무얼 하고 있던 걸까. 난 그 애를 위해 해주고 싶은 일이 없었어. 플라스틱 소변기를 들어서 그 애의 사타구니에 가져다 대었어.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그 애의 무력함도 수치심도 그저 외면하고 눈꺼풀 아래 먼 허공을 하염없이 떠돌았어. 그래, 그 애와 만난 건 내가 그런 허공에 머물러 있을 때였어. 유치원을 다닐 무렵이었을 거야.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 아이들은 소음을 경계하듯 내 침묵을 작고 거친 손으로 툭툭 건드리고 희롱했어. 그 애들의 입술은 너무 작아서 무수한 말들은 틈도 없이 절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어. 넌 벙어리야? 벙어리야? 넌 말을 못 해? 악보도 없이 웅웅거리는 소리는 내 침묵에 환호했고 내 침묵을 경계했어. 난 그 침묵을 돌볼 것을 강요받았어. 아주 약간의 소음만으로, 움직임만으로 연약한 유리와 같은 침묵이 깨져버리면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는 거였지. 그때 현은 내 곁에서 함께 침묵을 지켜 주었어. 침묵을 버리지 못하는 내 곁에서 함께 침묵해 주었어.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의 침묵을 듣고 있었지.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았을지도 몰라. 차마 현의 늘어진 사타구니를, 무력하게 배설하는 성기를 바라볼 수 없었듯. 오래전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았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견딜 수 없었어. 그를 잊기도 전에 잃고 싶지는 않았어.

초록 혹성에서 너는 현과의 삶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다시 꿈을 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너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그 애는 한 번도 네게 찾아온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엷은 막과 같은 침묵을 함께 돌보아 주던 시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는 이미 끝을 지나쳐버린 문턱 앞에서 망가진 초인종만을 하염없이 누르고 있었다. 아이가 네 손가락 위에 작은 손을 얽는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건 거짓말이야.

아니, 당신에게 보낸 초대장을 보지 못했나요.

그건 네가 보낸 게 아니야.

우리가 보낸 거예요. 난 이곳으로 돌아오는 당신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햇볕에 타들어가는 검은 눈이 너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돌아가야죠. 서커스로. 나 뿐만이 아니에요.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찢어 죽였던 사자도. 당신이 먹이를 주었던 암소도. 당신이 씻겨 주었던 쥐들도. 당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도마뱀들도 모두.

그건 거짓말이야. 난 더 이상 꿈조차 꾸지 않는걸. 그건 너희들이 나를 잊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아요.

아이가 설득하는 어조로 말했다. 익숙지 않은 말투였다. 생각해봐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어요. 그건 당신도 잘 아는 곡이에요. 그녀를 사랑한 음악가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작곡한 곡이죠. 그는 자신이 들어왔던 목소리가, 그가 사랑했던 그녀가 그와 같은 크기로, 템포로, 음색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걸 들었어요. 그는 환희에 취해 괴로워했어요. 그녀의 연주로 오랫동안 그를 애무하고 괴롭혀왔던 귓바퀴를 뜯어내고픈 충동에 시달릴 정도였죠. 그는 양손으로 왼쪽 귀를 절망적으로 할퀴어대기 시작했어요. 자칫 잘못했다간-잘했다간- 정말 귀가 뜯겨나갈 정도로요. 다행히 그런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죠. 만약 그의 주위에서 말없이 낯선 곡조를 지루하게 감상하고 있던 관객 중 누군가가 그의 벌건 관자놀이를 발견하고 음악보다도 자극적이고 관능적인 비명을 지른다면, 이런, 그는 그런 비극을 견뎌낼 수 없었을 거예요. 다행히도 그의 손톱은 귓바퀴에 깊숙이 파고들 수 있을 만큼 길고 날카롭지는 못했어요. 그에게는 연약한 피부를 긁적거리면서 수음을 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 생각이 날 때마다 손톱을 짧게 깎아내고는 했거든요. 어쨌거나 그날 연주가 있고 나서 그의 환청증세는 더 심각해졌어요. 그녀의 아름다운 연주에서 미묘하게 어긋났던 한 부분, 조금 느렸던 한 박자가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다른 청중들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야릇하게 비뚤어진 E flat이었어요. 그 기우뚱한 E flat이 온종일 머릿속에서 윙윙거려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E flat, E flat, E flat, 그녀는 어째서 그 음만을 그런 방식으로 잘못 쳤던 걸까요. 아니, 그건 그녀의 실수가 맞았던 걸까요? 그녀의 곡은 꼭 그만큼 그의 곡과는 달랐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는 점점 쇠약해져갔어요. 어쩌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연주는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을 지도 몰라요. 어쩌면, 실수였다고 생각했던 그 기묘한 E flat만이 그녀의 진심이었는지도 몰라요. 그 이상하게 비뚤어진 E flat만이. 그렇게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망가지고 어긋난 E flat 이외에는 다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어요. 한 박 늦게 전율하는 E flat은 그녀의 기침소리였고 유리잔 악기를 연주하는 젖은 입술처럼 그녀의 손가락이 그녀의 귓불을 매만지는 소리였고 그녀의 도톰한 혀가 죽은 살코기를 애무하는 소리였고 다리가 망가진 의자를 건강한 두 다리로 차버리고 허공에서 춤을 추는 그녀의 두 다리 위에서 하얀 드레스 천조각이 스치는 소리였고 텅 빈 그녀의 집 앞에서 망가진 초인종이 속으로 삼키는 울음 소리였어요. 견디다 못해 흐느끼면서, 피도 흐르지 않는 귓바퀴를 할퀴며 그 속에 끈적하게 울렁거리고 있는 E flat의 물방울들을 헤집으면서 그는 도망쳤어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모르겠어.

당신도 들었잖아요. 들리니? 묻던 목소리. 삼촌은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안다면 당신도 우리를 두고 도망칠 수는 없었을 텐데.

아무도 가엾지 않아.

정말요?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까치발을 들고 네 목덜미에 눈꺼풀을 가져다 대었다. 큰 눈망울 속, 살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간 눈꺼풀은 무엇도 가리고 있지 않았으며,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네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게 일어난 사건들의 경위, 일들의 순서와 논리적인 설명.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너는 결국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네게는 아이에게 설명해 줄 사건이 없었다. 네게는 아무런 기적도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네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현은 네 추억도 상실도 아니었으므로. 너는 현을 잃은 적도 없었다. 안녕, 하고 말을 건 뒤 그 애는 줄곧 너의 침묵을 지켜주고 있었다. 너의 존재를 방치하고 있었다. 너는 그 애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너희는 끝내 서로를 울어 주지 못했다. 모두가 그럴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삼촌이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서글퍼 보였다. 텐트에서 축 늘어진 초록 얼굴들을 낳고 버리던 여자들과 무너진 초록 별, 고양이 농장과 뻐드렁니처럼 돋아난 묘비들에 대해 이야기해도 아이는 슬퍼할 것이다. 어쩌면 이상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아이에게는 모든 꿈이 꼭 사내의 귓바퀴만큼 아픈 것이다. 너는 아이가 사내를 가엾어하듯 현을 연민할 수 없는 것이 죄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너는 끝내 모든 울음을 잊었다. 더는 울 수 없었다. 울면 울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숱한 죽음들과는 다른 결말이었다. 아마 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은 끝까지 네 침묵을 함께 돌보았다. 너희는 어떠한 금기도 깨트리지 않았다. 너희는 서로를 물어뜯지도 증오하지도 않았다. 너희는 서로의 맨살을 함께 앓아 주지 않았다. 너희는 언제나 홀로 비참해했고 함께 있을 때에는 너희들이 만들어낸 아늑한 침묵 속에서 너희들이 지어낸 법의 포근하고 보드라운 안쪽을 만끽했을 뿐이었다. 현이 병상에서 풍기는 폭력적인 체향에 이끌린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네가 은밀하게 죽음의 냄새를 갈망하고 있듯, 현 역시 남몰래 삶의 향취를 욕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너희는 끝내 서로를 아프게 할 수 없었다. 초록 혹성의 꿈에서 그 애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너는 그저 그 애의 비참하게 젖은 얼굴을 어루만지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너는 그 애를 가엾어 할 수 없었고, 가엾게 할 수도 없었다. 그 애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서로의 곁에서 가만히 죽어가기만 했다. 너는 그러한 생의 방식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삼촌의 광증이 비참하다고 호소하는 아이는, 네게 다른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너는 그 애의 삼촌이 피아노 연주자를 사랑했듯, 침묵을 망가뜨릴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지도 몰랐다. 설령 현과 함께 돌보던 너희의 침묵을 영원히 잃게 될지라도. 너는 파랗고 동그란 초인종의 버튼을 눌렀다. 초인종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너는 이 작고 지겨운 기계가 망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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