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수천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리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파동을 묘사하듯, 창백한 선영을 이어나가듯. 무수히 겹쳐 검게 보이는 투명한 날개들에 손을 집어넣고 옷장의 문을 열자 목소리가 들린다. 토성의 고리처럼 어디에도 없는 흔한 상징. 메타포. 너희는 상징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보이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너는 알지 못한다.

여자의 상징이 속삭였다. 그녀의 검은 입술. 흔한 메타포처럼 말라빠진 잎사귀. 속이 갈라진 잎사귀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침묵. 넌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가 살해한 사람들은 모두 처음부터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의 등을 떠민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걸음걸이였으므로, 그들은 저를 떠밀어줄 손짓을 염원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자책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당신도 그들의 등을 떠밀어주지 않았잖아요. 그들에게 그런 손짓이, 작은 악의가 간절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네온소다팝시티가 사라지고 서로에게 방향 없는 악의를 털어놓던 너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너는 그들이 이겨내지 않기를 바랐다. 너를 두고 자라나지 않기를, 너를 두고 행복해지지 않기를, 너보다 절망하지는 않기를, 너보다 찬란한 비극을 살지는 않기를. 이야기를 나누며, 레몬캔디의 증언을 듣고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음악을 상상하며, 너희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위로하고 있었다. 서로의 귀에 고운 모래를 흘려넣으면서 들리니? 하고 묻던 유랑극단의 소년처럼. 너희는 저마다의 귓속에서 이글대고 있던 포말들을 서로의 귓속에 나누어담았다. 너희는 서로를 믿는 체 했고 서로를 듣는 체 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에게 기대게 되면? 너희들의 결속은 변질되고 말 것이다. 틈과 틈 사이 지독한 심연을 보드라운 먼지들이 모두 채우게 되면, 그러면 들리게 될까?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너는 문득 인터넷창을 열고 현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 애와 관련된 것은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현의 소설 제목을, 네가 끌어안고 있는 책의 이름을 입력해 보았다. 진진한 여름 향기를 풍기는 책장을 가리키는 어휘들, 그 애가 남겨두고 간 목소리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넌 편집부의 사람들과 그 애의 소설을 출판하기 위해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기억했다. 그의 죽음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들과 비교하면서 홍보하던 검은 띠지를 기억했다. 네 손에 가득 들어찼던 딱딱한 물성을 기억했다. 그 애의 글 속에서 서로에게 입을 맞추던 남자들을 기억했다. 그 애의 글 속에서 서로에게 병을 옮기던 사람들을 기억했다. 그 애의 글 속에서 불쑥 자라나고 등이 굽고 죽음을 경험하며 다시 졸아들던 아이를 기억했다. 네 곁에서 아픈 어휘들을 엮어나가던 현의 검은 입술을 기억한다. 네 글은 시와 같다고 중얼거리던 말을 기억한다. 내 글은 시가 될 수 없다고 대답하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넌 무엇을 쓰고 있었던 것일까? 넌 무엇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넌 무엇을 듣고 있었던 것일까?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마술사가 옷장 속에서 기어나온다. 그는 다섯 장의 카드를 들고 있다. 네 옆에서 놀랍도록 낮은 음성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우린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죽이지 않았어요. 네 곁에서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닥거리는 소리. 우린 정말이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한 발자국만 같이 걸어달라고 애원하던 사람을 두고 우리는 돌아서 왔지요. 한 발자국만 높이 매달아달라고 흐느끼던 사람도 두고 왔지요. 마술사가 다섯 장의 카드를 뒤집는다. 어둠 속에서 카드에 새겨진 야광별들이 반들거린다. 카드는 벽지와 같은 소재로 되어 있다. 옷장 뒤쪽의 벽지는 너덜너덜하게 뜯겨졌을까. 뜯겨진 벽지 뒷면의 곰팡이는 어떤 색일까. 어둠은 흔하고 천박한 색채마저 수수께끼로 만든다. 네가 없었더라면, 여자는 그들과 함께 한 발자국을 더 내밀어 주었을까. 그들을 한 발자국 더 높은 곳에 올려 주었을까.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이건 존재하지 않는 소리에요, 침묵이 비명이라고 믿고 있는 당신의 귀에만 들리는 환청이에요.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우리를 한 발자국 더 먼 곳으로 밀어 주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당신을 두고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우리의 죽음을 죽였으니까.

네가 막은 죽음. 네가 죽인 죽음. 죽지 못한 귀신들이 옷장 뒤쪽 벽에서 시퍼런 빛깔로 번져갔다. 한 계절에 수백 마리로 불어나는 쥐떼처럼, 두 달무렵부터 새끼를 낳는 쥐떼처럼 끈질기고 축축한 생명이 번져가는 소리가, 성대도 몸짓도 없기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소리가, 네게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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