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 채널 1

그것은 소녀가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 채널이었다. 29번 채널을 틀면 나오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소녀는 좋아했다. 악몽처럼, 희망처럼 이상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들. 붉은 점토와 흰 점토를 섞어 만든 포동포동한 아기 돼지들과 잿빛의 날카롭고 부드러운 가시털로 뒤덮인 늑대들의 검고 무광인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얼굴과 가슴에 열이 오르고 목 안쪽이 찢어발겨지는 듯했고 서글플 정도로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바라보듯 소녀는 29번 채널을 지켜보았다.

아기 돼지들은 짧고 뭉툭한 분홍빛 앞발을 소녀 앞에 흔들어 보였다. 내일 다시 만나, 하고 그 애들은 인사했다. 소녀는 입술을 빠끔거리면서 그래, 하고 대답했다. 돼지들, 늑대들, 클레이로 만들어진 둥근 고무 뭉텅이와도 같은 코를 가진 여자와 남자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을 붙일 때마다 소녀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넌 늦게까지 잠들지 않는구나, 하고 앵두처럼 붉게 젖은 고무 입술을 가진 여자가 이야기하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밤의 끝에 반드시 일어날 필요는 없으니까. 깨어남을 갈망하지 않아도 분명 깨어나게 된다는 것을, 깨어남을 영원히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을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돼지들은 존재하지 않는 머리칼을 빗어넘기듯 앞발의 굽으로 뒷머리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머리 뒤쪽에 길고 흉측한 자상이 새겨지는 동안에도 돼지들은 강박적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렸고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 찾아온 늑대는 돼지들이 집을 비워주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돼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를 빗느라 정신이 팔려 늑대가 온 줄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소녀가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그 소리조차 돼지들은 듣지 않았다.

고무 펌프와도 같은 허파가 끔찍하게 부풀어오를 때까지 늑대는 숨을 들이키고 입김을 내뱉었다. 돼지들은 집의 잔해와 함께 내동댕이쳐지면서도 머리를 빗고 있었다. 함몰된 머리와 뒷목이 클로즈업되어 선명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돼지들의 머리는 마치 갈아 끼운 것처럼 미끈했다. 늑대는 언제고 다시 찾아오겠다고 경고했고 돼지들은 모래와 나무와 눈으로 만든 집을 짓고 늑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늑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은 늘 그런 식이었다. 클레이로 만든 동물 한 마리는 무언가 위협적인, 혹은 낙관적인 약속을 했고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의 결말은 늘 흐지부지되었고 동물들의 피륙을 구성하는 클레이는 늘 얼룩덜룩했지만, 늑대의 가시 모양 털 사이에는 돼지의 분홍 얼룩이, 돼지들의 배에는 늑대의 잿빛 털이 묻어 있었지만, 소녀는 29번 채널을 고수했다. 29번 채널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과도 같은 슬픔을 사랑했기 때문에.

소녀를 향해 무언가를 묻고 소녀의 대답을 기다려주는 채널은 29번 밖에 없었다. 다른 채널들은 소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길고 매끄러운 문장들을 쉼없이 말하거나 방청객 역할, 대답을 하는 아이들의 배역이 정해져 있어서 소녀가 대답할 틈은 없었다. 간혹 소녀를 향해, 그러니까 티브이 바깥에서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를 향해 물음을 던지는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그런 방송은 소녀가 대답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다음 문장, 소녀의 대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어긋난 문장으로 넘어가버리고는 했다.

29번 채널은 달랐다. 유달리 오동통하고 매끈하며 둔중하여 지쳐 보이는 돼지들과 늑대, 목이 긴 까마귀들과 한쪽 날개가 잘려나간 비둘기들은 소녀가 대답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은 깜빡 잠이 들 정도로 길었다. 소녀는 그 길고 나른한 행간을 사랑했다.

그러나 교실의 누구도 29번 채널을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꿈을 유사한 화풍으로 물들이는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소녀에게 낯선 것들이었다. 소녀가 29번 채널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지루함과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몸을 움츠리고 가까이 있는 얼굴을 향해 은근하고 경멸적인 눈짓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고는 했다.

넌 참 이상한 걸 보는구나, 하고 눈짓들에 확신을, 소녀에 대한 경멸을 더 이상 비밀로 남겨둘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얻은 누군가가 명료하고 끔찍하게 느리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고 곧 왁자한 웃음소리가 소녀의 실존을 거침없이 침범하여 두드렸다. 깨지지 않기 위해 소녀는 그 애들과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29번 채널을 보았다. 검붉은 진흙과도 같은 클레이를 온몸에 바른 남자가 소녀에게 잘 지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녹빛 풀로 뒤덮여 있는 야트막한 동산 뒤편에서부터 카메라 쪽으로 뛰어왔는데 그가 벌거벗은 탓에 소녀는 고무처럼 덜렁거리는, 진흙 발린 성기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 잘 지냈느냐고 물었고 소녀는 네, 하고 속삭였다.

그는 작고 둥근 두 개의 귀를 머리 위에 달고 있었다. 클레이로 만든 귀 아래에 클레이로 뒤덮인 사람의 귀 두 개가 더 있어서 그는 네 개의 귀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을 돼지, 혹은 곰이라고 소개했다. 방송에 잡음이 섞이는 바람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마 돼지가 맞을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29번 채널의 주인공들은 대개 돼지였으므로. 돼지들은 사내처럼 털 없이 매끈했으므로, 털 한 올 없이 벗겨진 머리에서 불그죽죽한 땀이 흘러나왔다. 살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그러면 다른 친구들이 올 거라고 이야기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검은 눈, 이번에는 무광이 아닌, 조명의 황금빛을 반사하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앞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땀이 그의 이마 위에서, 턱 밑으로, 가슴 아래와 사타구니 밑으로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문득, 의도되지 않은 속삭임으로 재밌니? 하고 말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내는 더 이상 소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등을 돌려 살집에 두툼한 주름이 잡힌 등과 엉덩이를 드러내보인 채-그에게는 돼지꼬리가 없었다-동산 뒤쪽을 바라보았다. 동산의 뒤편에서 사내처럼 벌거벗은 두 마리의, 연분홍 클레이를 온몸에 덕지덕지 바른 돼지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배우들은 소녀 또래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였다. 배우들이 숨을 헐떡일 때마다 가슴 위에서 굳어버린 클레이가 말라붙은 진흙처럼 바스라져 떨어지고 있었다. 벗겨진 클레이 아래 고기처럼 붉은 피부가 드러났다.

아기 돼지들이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곧 왁자지껄한 웃음 음향 효과가 흘러나왔다. 소녀는 아기 돼지들이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린 인간의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땀을 식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야외의 뜨거운 열기에 끔찍하게 지친 것처럼 보였다. 대사를 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열의를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녀는 평소보다도 더 느린 리듬으로 움직이며 말을 주고받는 돼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불그죽죽한 흐느낌과도 같은 땀을 흘리며 늑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늑대가 오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늑대가 오기 전에 그들에게는 행복한 것 화목하고 즐거운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어떠한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늑대가 집을 날려버리기 전에 그들은 대개 끝없는 식사를 하고는 했다. 황색의 마른 짚이나 녹색 풀, 붉은 꽃으로 이루어진 음식들 역시 클레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돼지들은 역겨운 탐욕에 한껏 벌어진 검은 구멍으로 그 음식 공예품들을 전부 집어넣고는 했다. 돼지들의 이빨은 화면에 노출되지 않았다. 돼지들은 연분홍빛 클레이로 만들어진 입을 열심히 우물거렸고 초대받지 못한 짐승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전까지 식사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동산에 클레이로 만든 음식은 없었다. 돼지들은 끈적한 클레이 살점을 흘려내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의 발을 적시는 붉은 웅덩이를 보았다.

늑대는 오지 않았다.

어제도 마찬가지였어, 하고 소녀는 기억해냈다. 어제도 돼지들은 폐허가 된 집에 앉아 늑대를 기다렸지. 하지만 늑대는 오지 않았어. 오늘도 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돼지들은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마치 늑대가 어제도 그 전날에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은 듯 늑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불가해한 슬픔에 사로잡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돼지들 역시, 광폭한 햇볕 속에서 고무로 만들어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늑대가 약속을 잊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늑대는 영원히 약속을 기억해내지 않을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돼지들이 소녀에게 묻기 전에 소녀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소녀는 돼지들과 함께 기다릴 뿐이었다.

소녀의 집은 돼지들이 서 있는 동산과는 달리 어둡고 건조했다. 그럼에도 소녀의 살은 돼지들의 것처럼 흘러내렸다. 응고되지 않은 시간의 살이 비누거품처럼 떠다니는 것을 소녀는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돼지들이 소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소녀는 악몽과도 같은 불길함에 맞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우리는 집을 지을 거야.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각각 모래와 눈과 진흙으로 된 집을 지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늑대가 그들을 찾아와 태풍과도 같은 입김으로, 언제나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위압적인 폭력으로 그들을 짓누르고 산산조각내고 먼 곳으로 데려가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늑대는 오지 않는다.

소녀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맏형 역할을 하는 돼지는 사실 늑대이다. 그들의 오른쪽 무릎뼈가 유달리 불거져나왔다는 사실을 소녀는 알고 있었다. 늑대와 맏형 돼지는 한 번도 한 화면에 동시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식탁에 앉아 있는 돼지들, 맏형 돼지는 복통을 이기지 못하고 갑작스레 화장실로 달려가고 왁자한 웃음 효과가 폭발하듯 흘러나오고 나면 어린 두 돼지 앞에 늑대가 등장한다. 다음 장면에서 맏형 돼지는 클레이로 만들어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무기질의 검은 눈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또는 예컨대, 늑대 역할을 맡던 배우는 실직하였다. 그는 클레이가 피부에 닿으면 급작스럽게 발진하는 알레르기 증상을 보였고 피부과 의사로부터 다시는 클레이를 온몸에 뒤집어 쓰지 말라는 협박과도 같은 권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배우가 채용되어 늑대 역할을 맡을 때까지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늑대의 침략과 집들의 와해, 생활과 이곳의 파괴는 지연될 것이다.

또는 예컨대, 늑대는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었다. 남은 것은 늑대의 화려하고 부드러운 가죽뿐이고 가죽에는 태풍과도 같은 거대한 바람을 담을 수도 없으므로 늑대는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래서 늑대는 돼지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또는 예컨대, 늑대는 정말 돼지들과의 약속을 잊어버렸다. 그의 위협은 진실이 아니었고 그는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늑대에게는 먹을 것들이 많았고 혹은 늑대가 원하는 것은 돼지들이 살던 벽돌 집을 망가뜨리는 것뿐이었고 이제 늑대는 돼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한 가지도 없었다 혹은 그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돼지들의 공포뿐이었고 돼지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늑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지금 늑대는 굳이 돼지들에게 그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실제를 확인시켜줌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축소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는 예컨대, 늑대는 실제로 돼지들을 찾아가 그들의 집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두툼하고 더러우며 사랑스러운 분홍빛 살을 찢어발겨 삼켰으나 그 돼지들은 그의 위협을 들은 돼지들이 아니었다. 늑대는 돼지들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었고 돼지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으므로 어떠한 돼지와의 약속은 다른 돼지와의 약속이었고 어떠한 돼지의 죽음은 다른 돼지의 죽음이었고 돼지들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후회도 추억도 불길함도 기대도 없이 미친듯이 불결한 현재뿐이었으므로 늑대는 어떤 돼지의 집을 부서뜨리든 어떤 돼지를 잡아먹든 모두 같은 것이었고 그러므로 실제로 돼지들과의 약속은 이미 지켜졌고 돼지들은 이미 이루어진, 그래서 잊혀져 가는 약속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늑대는 오지 않을 것이었다. 소녀는 죽음처럼 절박하게 늑대를 기다리는 돼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TV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지나갔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삼색의 어지러운 빛 점들을 일그러뜨리며 흘러내리는 땀을 바라보았다.

곧 엔딩 크레딧이 내려왔고 소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길고 지루하고 거북스러운 문장들로 빼곡이 채워진 보험 광고가 지나간 뒤 다른 애니메이션이 시작되었다. 옷장 속에서 사는 외과의가 망가진 동물 친구들을 고쳐주는 내용의 방송이었다. 물론 옷장도 외과의도 망가진 동물 친구들도 모두 클레이로 만들어진 클레이 애니메이션이었다. 옷장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여름 동산에 서서 늑대를 기다리던 중년의 남자와 무척이나 닮은, 그러나 눈부시게 흰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귀는 두 개밖에 없고 더는 땀을 흘리지 않는 의사 선생님이 가장 먼저 옷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소녀에게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건넸고 소녀는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거대한 옷장 한쪽에 서서 그는 환자들을 기다렸다. 소녀는 누가 등장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동산에 서 있던 두 마리의 아기 돼지들이 그의 환자였다. 돼지들은 먼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려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소녀에게 인사했다.

소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곧 그들은 의사와 잡담을 나누었다.

남자아이가 먼저 수술대를 대신할 푸른 방수포 위에 드러누웠고 의사는 아이의 머리칼에 엉겨붙은 세모꼴의 붉은 돼지 귀를 더듬거렸다. 남자아이는 열린 옷장 너머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마치 소녀에게 말을 건네듯 소녀를 응시한 채로 명랑하게 말했다. 전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요.

의사는 엉뚱하게도 뒤늦게 물었다. 그래 어디를 고쳐줄까?

소년은 침을 삼킨 뒤 소녀를 향해 다시 말했다. 전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요.

그러자 의사는 당황해하며 다시, 그래 어디를 고쳐줄까? 하고 확신 없는 목소리, 말끝이 희미하게 떨리며 증발하는 목소리로 속삭였고 소년은 망가지기 전에는 고칠 수 없어요, 하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소년은 시범을 보이듯 그의 젖은 갈빛 머리칼 위에서 달랑거리는 붉은 돼지 귀를 뜯어내 의사에게 건네었다.

왁자지껄한 웃음.

소녀는 음향 효과를 따라 웃었지만 곧 두 마리 돼지들과 외과의 누구도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웃음을 그쳤다. 그들은 웃음 효과가 다 끝난 뒤에야 입술 끝을 당기며 신음처럼 부드러운 숨을, 발작적이기보다는 은근한 웃음을 내뱉었다.

방수포에 드러누운 소년 위에 서서 간호사처럼 대기하던 여자아이가 팔뚝을 비비며 그녀의 몸에 들러붙은 연분홍빛의 클레이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소년의 피부와 같은 빛깔인 클레이를 둥글게 뭉쳐가면서 소녀는 팔뚝을 팔꿈치를 양 손등과 허벅다리를 종아리를 발등과 목을, 둥근 이마와 볼을 비벼대었다. 공처럼 뭉쳐진 살덩어리는 점점 커졌다.

소녀는 의사에게 클레이 뭉치를 건네었고 의사는 끝이 뭉툭하지만 대체로 날렵한 모양의 플라스틱 클레이용 칼로 소녀의 살을 절개하여 무척 얇은 세모꼴의 살점을 겹겹이 쌓아 뭉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반대쪽 귀를 손바닥으로 짓눌러 짜부라뜨렸고 소녀는 겨드랑이 안쪽과 사타구니 안쪽, 무릎 밑의 클레이들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의사가 갑작스럽게 재채기를 하자 클레이용 나이프가 의사의 손끝을 베었고 의사가 정성스럽게 잘라내어 겹겹이 뭉치고 있던 귀 모양의 클레이 더미에 붉은 얼룩이 생겼다.

카메라는 의사의 손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었다. 의사는 신경질적으로 클레이를 다시 뭉쳐냈고 소녀의 땀과 체취가 배어든 잔여물들을 받아들고 다시 뭉쳤고 소년이 뭉그러뜨린 다른 쪽 귀도 함께 뭉쳤고 분홍빛의 클레이 덩이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것이 거대한 붉은 달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 다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고 더 이상 돼지처럼 보이지 않는 벌거벗은 소년과 소녀가 소녀를 응시하였고 의사 역시 소녀를 응시하였고 소녀는 참지 못하고 와락 울음을 터뜨렸고 웃음처럼 발작적이며 광폭한 울음을, 헐떡이면서 끅끅거리는 애처로운 울음, 그러나 웃음처럼 거칠고 쾌활한 울음을, 의사는 달의 살을 떼어내 다시 겹겹이 잘라내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한 겹 한 겹 붙여 만들어낸 정교한 돼지 귀를 소년의 옆구리에 달아주었고 소년은 고양이처럼 등을 달싹거리면서 흐느끼듯 웃었고 소녀는 끔찍하게 정교한, 엷은 핏줄과 귓바퀴의 주름들이 선명하게 비추어 보이는 귀를 옆구리에 달고 있는 소년을, 침과 함께 엉글어진 더러운 클레이로 젖은 얇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고통스러운 열기와 숨가쁨 때문에 멀미가 났고 의사는 수술이 끝난 뒤 여남은 거대한 분홍 클레이 뭉치를 카메라 앞에 유혹적으로 내밀었으며 여자아이는 헐떡이면서 아직 재료가 남았군요! 하고 소리쳤고 소녀는 무릎과 이마에 돼지 귀를 매단 여자아이와 왼쪽 옆구리에 사람의 귀를 달아놓은 남자아이가 화면을 향해 씩 웃어보이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화답하며 인사를 했고 곧 활짝 열린 옷장 안에는 둥근 무테안경을 쓴 의사와 어지럽혀진 방수포 수술대, 그리고 두 돼지 아이가 남기고 간 거대한 살의 재료들밖에는 남지 않았는데 옷장 안은 덥고 습한 것이 분명했고 소녀는 의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는데 그의 벌거벗은 가슴, 흰 가운만을 걸치고 있는 반쯤 가려진 흰 가슴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가 호흡할 때마다 안경알이 흰 수증기로 반쯤 가려지고 또 흰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면서 투명해지고는 했으므로, 의사는 수술을 원하는 어린이들을 초대한다고 정돈된 문장으로 다정하게 속삭였고 화면 아래쪽에는 응모를 위한 우편주소가 검은 선영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흰 글자들로 떠올랐고 소녀는 서둘러 교과서의 한쪽 귀퉁이를 찢어 주소를 옮겨적었는데 그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녀를 학교에서, 적어도 그녀의 교실에서는 유일하게 29번 채널을 보고 있는 소녀만을 초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소녀는 주소를 받아적지 않을 수 없었고 싸구려 우표를 붙인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붉은 우체통의 은밀한 틈에 얇은 편지를 밀어넣으면서 소녀는 마치 그녀가 직접 배우들을, 세 마리의 돼지들 혹은 두 마리의 돼지들과 한 명의 의사를 초대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미칠 듯 설레었고 그녀는 너무 황홀하고 두려운 나머지 차라리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왜냐하면 옷장 속 수술대에 눕는 것은 실제보다는 기적이나 꿈과 같은 일이었으므로. 우체통에 편지를 밀어넣고 소녀는 도둑질을 한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 도망쳤다. 마치 초대에 응하는 것이, 29번 채널에 속하려 하는 것이 범죄인 것처럼. 수업 시간에도 소녀는 돼지들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에 대해 생각했다. 수술대에서 잊지 않고 말을 전하기 위해 교과서의 맨 뒷장, 텅 빈 백지에 그들이 TV에서는 묻지 않았던 말들 그래서 소녀가 대답할 수 없었던 말들을 적어내렸다.

1. 늑대를 기다리지 마세요. 늑대들은 모두 떠났어요 늑대들은 더 이상 돼지들을 기다리지 않아요 늑대들은 돼지고기보다는 양고기를 더 좋아해요.

2. 눈이나 모래, 진흙으로 집을 짓지 마세요 늑대가 도착하기 전에 무너져버릴 테니까

3. 돼지들은 귀가 두 개에요 우리 집은 돼지 농장인데 난 한 번도 귀가 네 개 달린 돼지를 본 적이 없어요

4. 돼지들은 사람의 말을 하지 않아요 늑대도 마찬가지고요

5. 밤에 잠을 자지 않는 건 범죄가 아니에요 그리고 난 가끔 자면서 당신들을 봐요

6. 돼지들은 짧고 가느다란 꼬리를 가지고 있어요.

7. 아기 돼지들은 쌍둥이인가요?

소녀는 그들에게, 29번 채널에, 꿈과도 같은 공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벌거벗은 돼지들이 두 발로 걷고 사람의 말을 하는 공간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럽고 아름다운 공간에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단단하고 뜨거운, 붉은 우체통의 고정된 검은 틈 속에 편지를 밀어넣었다는 사실을 견고한 비밀로 간직했다. 누구든, 29번 채널을 알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는 아이들 누구든 붙들고 그녀가 곧 초대받으리라는 사실을, 곧 소녀가 29번 채널에 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으나 소녀는 비밀을 즐기는 여자아이 특유의 음험하고 매혹적인 무표정으로 터질 듯한 기쁨을 감추었다.

소녀가 칠판에 적힌 것과는 전혀 다른 문장들을,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문장들을 쓰고 있음을 알아차린 교사가 소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교과서를 들고 소녀의 은밀하고 음험한 낙서들, 미래에 대한 확고한 낙관으로 반짝거리는, 짙게 눌러쓴 단단한 문장들을 소리높여 읽는 상상만으로도 소녀는 황홀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29번 채널이 곧 답장을 보내리라는 것을, 반드시 소녀를 열린 옷장 속 푸른 수술대 위로 초대하리라는 것을 소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녀는 등교하는 길에 매번 먼지가 쌓인 더러운 우체함을 들어 그 속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뜯어보지 않은 고지서들과 광고 종이들, 검은 먼지가 퇴적된 얇은 종이들을 일일이 벌려 그 속에 혹시 29번 채널의 초대장이 들어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날이 갈수록, 우체함에 그득 쌓여 있던 먼지가 점점 닦여나가고 그 속에 우글거리던 미지가 점차 희게 바래갈수록 소녀는 죽을 것처럼 숨이 막혔다. 긴장과 기대는 고조되었고 소녀는 그녀가 초대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절박하게 믿었다. 매일 낮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 늑대를 기다리는 세 마리의 돼지들처럼, 소녀는 우체함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어떤 새로운 비밀도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8. 늑대는 오지 않을 거예요. 늑대는 더 이상 육식하지 않으니까. 늑대는 길고 영원한 금식을 하고 있어요 이제는 풀조차도 먹지 않아요 늑대는 굶어서 살기로 결심했어요 늑대는 짐승의 우리 속에서 끝나지 않는 단식을 하고 있어요 단식 광대의 무릎뼈 위에 앉아서 향기로운 살점이 늘러붙은 뼈를 핥아보지도 않은 채 심지어는 냄새조차 갈구하지 않으면서 늑대는 더 이상 돼지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요

9. 늑대는 죽었어요 늑대는 오지 않을 거예요 늑대는 돼지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아요 돼지들에 죽음에 늑대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돼지들과의 약속을 늑대는 잊어버렸어요 늑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예요

10. 제발 늑대를 그만 기다려요 늑대를 기다리는 대신 다른 일을 하는 게 어때요 어쩌면 늑대가 왔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거예요 늑대가 집을 날려버렸다고 생각하고 눈과 모래와 진흙이 산산이 흩어졌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집을 다시 지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 편이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예요 이번에는 눈이나 모래나 진흙이 아닌 다른 걸로 벽돌이나 콘크리트나 나무로 집을 지어요 그러면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거고 돼지들은 완성되지 않은 집을 밤까지 계속 지을 수 있을 거예요

11. 돼지를 늑대로 수술시킬 수는 없을까요? 돼지는 세 마리나 있으니까 한 마리가 늑대로 변한다고 해도 나쁠 건 없을 거예요 두 마리의 돼지만으로도 충분히 늑대를 기다릴 수 있어요 모른 척 해 줄게요

이제는 우체함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소녀는 우체함을 들추어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의사는 언제나와 같은 두 명의 새끼 돼지 환자들, 아직 망가지기도 전에 너무 성급히 찾아온 환자들을 수술할 뿐이었다. 그는 초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초대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소녀의 편지를 받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곳은 종이로 만들어진 언어가 닿기에는 너무나 다른 곳이어서 편지가 전해지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꿈 속에서 의사는 두 마리 어린 돼지들의 성기를 바꾸어 달았다. 짧고 뭉툭한, 사람의 부드러운 손이 달려있는 사지를 잘라내어 배와 등, 머리와 쇄골에 붙였다. 부드럽고 두툼한 배는 허리를 짓누르는 기계장치 속에서 으스러져 스크류처럼 비어져나왔다. 그것을 섬세하게 꼬아서 의사는 두 돼지 아이에게 꼬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재료가 남지 않았다고 돼지들은 좋아했다. 이마 가운데 소년의 것이었던 팔을 매단 소녀는 거대한 수탉처럼 보였다- 그러나 성기를 바꾸어 달았으므로 소년은 소녀였고 소녀는 소년이었다- 이번에는 늑대도 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너무도 터무니없이 망가져 있으므로 이름이 없어도 그들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마침내 늑대가 그들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소녀는 기쁘게 속닥거렸다.

그러나 소녀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꿈은 균열조차 없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흩어져버렸으므로 소녀는 꿈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고 우체함은 여전히 비어 있었으며 돼지들의 이마는 불그죽죽했지만 매끈했고 왼팔은 왼팔의 자리에 오른발은 오른발의 자리에 달려 있었고 의사는 여전히 달처럼 둥글고 비대하게 남아 있는 재료를 카메라에 들이밀며 당황스러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의사는 아직 편지가 한 통도 오지 않았다고 속삭였고 소녀는 끔찍하게 놀라 울음을 터뜨렸고 아니, 사실 소녀는 조금도 놀랄 수 없었는데 오히려 놀랄 수 없다는 그 사실 때문에 더 절망하여 경악하였으며 소녀는 편지가 영원히 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29번 채널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므로 꿈처럼 소녀가 돼지들에게 문장들을 건넬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왜냐하면 돼지들과 말을 나누는 것은 불가해하고 조악한 꿈에 불과했으니까. 꿈이 아니라면 돼지들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장들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 테니까.

그 애도 29번 채널을 봤다고 했어요, 소녀는 정지된 화면을 향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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