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 채널 3



장미의 가장 깊은 속까지도 언젠가는 썩어서 떨어지고 말 거야. 왜냐하면 사막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은 없으니까. 모래가 되지 못한 꽃잎들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먹구름이 될 거야. 궤도에서 이탈한 달들이 모여드는 검고 아득한 해안에 모인 머리칼들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닐 거야.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닐 거야. 아무도 그 머리칼을 세지 않을 거고 그 머리칼은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을 거야. 기억상실은 축복과도 같을 거야. 그 축복을 피할 수 있는 생명은 어디에도 없을 거야. 생명은 찰나와도 같은 기적이니까. 우리가 바라지 않아도 기적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니까.

나는 여자의 척추 안쪽에 형체도 감각도 없는 투명한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어요.

난 깨어남도 교실도 또 다른 몸도 기억도 없이 그렇게 그녀의 내부에 침잠한 채로 악몽을 꾸고 있었죠. 그게 악몽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도 조바심은 나지 않았어요. 고통에 순응한 것도 잔혹한 낙관에 매몰된 것도 아니었어요. 난 그녀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죠.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는 꽃잎이 모두 말라 떨어질 때까지, 바스라진 꽃잎들이 더 이상 장미가 아닐 때까지 함께 있을 것이었으니까. 시간의 살이 썩어 문드러질 때 우리는 우리가 아닌 다른 것, 다른 장소를 부를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바깥에 대한 몽상을 단념한 건 아니었어요. 우리는 바깥이 실재한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실재하지 않는 바깥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여자의 안에서 나는 그녀가 29번 채널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29번 채널 이외에 우리에게 다른 장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욱신거림을 속삭였어요. 그녀는 단단한 돌바닥을 연약한 손톱으로 파내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는 대신 불가능한 미래들을 상상했죠. 머리칼 하나마다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고, 쥐들의 위장 속에서 으물러 최후를 맞는 대신, 오물과 함께 썩어가는 대신 우리가 잊어버린, 그리고 잊지 못한 숫자들이 다른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아직 상실되지 않은 희망을 애도하는 폭력을, 그토록 역겨운 자해를 우리는 절대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오직 우리의 절개, 열림, 불가능한 아름다움에만 희망을 투자했죠.

소녀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의 둥근 곡률에 가만히 볼을 가져다 대었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흰빛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목소리에 닿을 수는 없었다. 옷장에 매달린 남자의 발끝이 소녀의 볼 주위를 맴돌아도 소녀는 남자를 느낄 수 없었다.

소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TV 화면은 볼이 델 듯이 뜨거웠고 소녀는 눈 밑에서 섬약하고 애처로운 불꽃이 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편지를 보냈어요, 소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도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했죠. 마지막 수술 이후 돼지들은 늑대와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소녀는 마지막 수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도 돼지들은 늑대를 기다렸다. 동산 위에서 벌거벗은 세 개의 등허리가 화면을 향해 있었다 그들이 얼굴을 화면 바깥쪽으로 위치시켰기 때문에 소녀는 그들이 어떤 눈으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벌거벗은 붉은 등 위를 왁자지껄한 웃음 음향 효과가 뒤덮었다. 소녀는 교과서 뒤편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들에게 미리 말해 주었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그들이 저토록 힘들게 끔찍하게 더워 녹아내리는 등을 하고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8. 끝나지 않을 거예요. 세상이 끝나버려도 삶은 끝나지 않을 거예요. 늑대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언제나 남아 있을 거예요. 하지만

9. 늑대는 오지 않을 거예요. 늑대를 기다리면서 삶을 소진해버리면 안돼요. 그건 너무 지치고 잔혹한 일이니까.

난 오지 않는 미래를 기다리면서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본 적이 있어요. 더 이상 바깥을 상상할 수 없을 때까지, 숨을 참는 일조차 힘겨워질 때까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다른 이의, 사랑하는 이의, 증오하는 이의, 기다리는 이의 꿈으로 건너갈 수 있어요. 우리는 늑대의 꿈을 꿀 수 있어요.

10. 당신들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당신들은 이미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결코 그것을 부르지 않았으니까.

11. 그렇지만 부르진 않을 거예요. 당신들이 그렇듯 우리는 이름 없이 말을 건넬 수 있을 거예요.

12. 아무도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줄 수 없어요. 다른 세계는, 그 미세한 주름과 균열, 괴성을 지르는 새들과 죽어가는 노파들과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불길한 창녀들과 턱이 잘려나가 살해당한 노인들과 부드러운 상처와 함께 벌어진 무릎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한 번도 정해진 적이 없는 우리까지도.

13. 난 당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내 피부를 열어줘요. 나도 당신들의 피부를 열어젖힐게요.

14. 하지만 친구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29번 채널에 가고 싶어요. 왜냐하면

15.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다른 곳이니까. 유일한 다른 곳이었으니까,

소녀는 뜨겁게 달아올라 불쾌한 전기가 이는 볼을 느끼면서 속삭였다. 유일한 다른 곳이었으니까, 우리는 29번 채널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어요. 숨을 참고 난 당신들이 늑대를 기다리는 걸 보았어요. 돼지들은 당신을 사랑했어요. 기억하나요?

그러나 정지되어버린 영상 속에서 사내는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그는 다큐멘터리의 정지된 영상 속에서 공중에 고정되어버린 새처럼 허공 위에 멀뚱히 검고 축축한 그림자를 내려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흐느낌을 멈출 수 없었다. 미지근하고 축축한 물기가 소녀의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클레이가 모두 녹아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들은 탈진한 몸을 간신히 세우고 늑대를 기다렸다. 마치 늑대가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그들은 절박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늑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토록 오랜 시간 절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미 파괴되어버린 기대를 그토록 오랜 시간 그토록 예민하게 간직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어진 옷장의 수술 집도 프로그램에서 두 마리의 돼지와 흰 가운을 걸친 집도의는 웃지 않았다. 그들은 소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지한 얼굴로 옷장에 들어섰다.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화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한없이 검은 여섯 쌍의 눈이 소녀를 관통했다. 짙은 검은 찌꺼기를 소녀의 내부에 남긴 채. 타르와 같은 진득한 찌꺼기가 늘러붙은 가슴이 갑갑하고 괴로웠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희망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숨을 참기가 더 답답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숨을 쉬지 않고 묵묵하게 29번 채널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불투명한 검은 눈들을 마주보았다.

안녕, 하고 소년 돼지가 뒤늦게야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리고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인사가 끝난 뒤 소녀 돼지와 소년 돼지는 집도의 앞에서 말없이 살을 벗어냈다. 축축하게 늘어진 클레이는 손바닥으로 문질러대는 것만으로도 쉽게 벗겨졌다. 보이지 않는 향기와 땀에 젖어든 고무 뭉치가 의사의 손에 쥐어졌다.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먼저 푸른 방수포 위에 드러누웠다. 가늘고 섬세한 몸의 굴곡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녀는 그녀가 자신을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화면 밖, 어둠 속으로 삐져나와 보이지 않는 여자 돼지가. 소녀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목소리도 소녀와 닮았었는지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끔찍한 울부짖음, 29번 채널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파열음이 조잡한 티브이 스피커를 찢어내며 튀어나왔지만 그것 역시 여자 돼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집도의 남자는 울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오직 깊고 얕은 주름들만으로 짜인 붉은 주머니처럼 보였다. 붉은 클레이의 색소로 군데군데 착색된 얼굴이 흉하게 구겨졌다. 흰 조명에 반들거리면서 빛나는 물기가 그의 주름들을 얇은 막처럼 뒤덮었다.

그가 그만두고 싶다고 소리치는 소리를 소녀는 들었다. 들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소리가 존재했는지 그가 정말 그러한 언어를 생각하고 내뱉었는지, 그 말이 비좁은 옷장 위를 단단하고 기름진 피거품처럼 둥둥 떠다녔을지 그리고 어딘가 날카로운 모서리,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모서리에 찢겨져 바닥에 흘러내렸을지 소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환청에 불과할지도 몰랐으니까. 숨을 참고 있는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소리들은 물질처럼 단단하고 깊게 느껴졌고 소녀의 내부에 남은 흔적들은 피부와 같이 욱신거리는 선명한 질감으로 아프고는 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소녀와 소년 돼지가 수술을 해달라고 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소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현기증과 같은 어지러움에 소녀는 숨을 참는 것이 괴로웠고 당장이라도 가슴이 부풀어 찢어질 때까지 한껏 숨을, 티브이에서 새어나오는 불투명하고 뜨거운 빛으로 이지러진 어둠을 탐욕스럽게 들이키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쉬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숨을 참고 싶었다. 소녀는 아직 숨을 참고 있었다. 소녀는 아직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푸른 방수포를 짓누르고 있는, 소녀와 꼭 닮은 소녀의 몸을, 그래서 마치 그녀 자신의 죽음처럼 느껴지는 소녀의 몸을,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는 소녀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그의 발 아래 누워 있는, 화면의 비좁고 날카로운 프레임에 머리가 잘려나간 소녀의 위에서 살 덩어리를,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붉은 클레이 뭉치를 주무르고 있었다. 살과 살을 갈라놓는, 땀에 젖어 반들거리는 깊은 균열을 짓무르면서. 마침내 클레이가 먼지 한 톨과도 충돌해본 적이 없는 갓 태어난 뜨거운 행성처럼 둥글고 매끈하게 빚어졌을 때 그는 가운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검고 투명하게 반들거리는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것이 잉크병이라는 것을, 소녀는 그가 번들거리면서 출렁이는 내용물을 살에, 그의 피부를 뒤덮었던 것과 같은 재질로 되어 있는 살에 전부 쏟아붓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다. 붉은 살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그는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밤의 응결체와도 같은 방울들로 손과 살을 검게 더럽히며 클레이를 뒤섞었다.

그의 뒤에 가만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소년, 이제는 돼지의 분홍 살을 전부 벌거벗어 영락없는 사람에 불과한 어린 소년은 수술을, 삶을, 무엇보다도 죽음을 취소하고 싶다는 애달픈 욕망에 시달리는 듯 흐느꼈다. 그러나 소년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끝내 견뎌냈다는 것을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검은 잉크에 물든 축축한 살로 가시 같은 털을 빚어내는 데에는 끔찍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새벽 내도록 집도의는 그것을 뭉쳤고 단단하게 굳어진 털들을 소녀의 피부에 삽입하였다. 소녀가 늑대의 털에 뒤덮일 때까지, 검고 뾰족한 털들 사이에 매몰된 소녀가 늑대가 될 때까지. 소녀의 발바닥과 음부까지, 화면 바깥의 소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머리칼과 머리와 눈과 귀와 입술과 목까지 가시처럼 검고 뾰족한 털들을 붙인 뒤 집도의는 수술이 끝났다고, 무척이나 서글픈 목소리로, 울음에 젖어 쉬어버린 연약한 소리로 속삭였다.

소녀는 잉크에 젖어 더러워진 방수포에서 일어섰고, 그녀의 발바닥에 붙어 있던 단단한 가시들이 그녀의 내부로, 미친 듯이 출렁이는 혈관으로 파고들었고, 소녀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옷장을 나섰다.

그녀는 늑대가 되었다.

그녀는 늑대였다. 같은 작업이 소년에게도 이루어졌다. 소년은 소녀와는 달리 종종 슬픔을 참지 못하고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터뜨렸지만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소년 역시, 더 이상 늑대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너무도 오래, 이미 부패해버린 희망을 부여잡고 울었고 그들의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동안에도 낙관에의 전염을 너덜너덜한 속으로 느끼면서도 늑대를 기다리는 일을, 그 한결같이 푸르고 더운 동산으로 나서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이제는 늑대가 되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으니까.

마찬가지로 늑대가 된 소년은 소녀와는 달리 남자를 끌어안았다. 소년의 몸에 돋아난 인공적인 가시들이 집도의의 몸을, 흰 가운 아래 드러난 창백한 맨몸을 할퀴고 짓누르고 상처내고 찢어내었다. 집도의는 피투성이 가슴으로 소년을 마주 끌어안았다.

소년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스스로도 약속을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장미처럼 부드러운 발을 짓무르면서 걸어갔고 잉크와 피로 어지러진 옷장에는 이제 집도의 혼자밖에 없었다. 남는 재료는 없었다. 늑대의 털도 남지 않았다. 사내의 가슴에서 뭉그러진 몇 개의 클레이 조각과 잉크 자국을 제외하면.

그는 늑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녀는 여전히 화면 바깥에서, 숨을 참고 활짝 열린 옷장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옷장 안에서 사내는 홀로였다. 그들은 함께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16. 당신들이 늑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요. 늑대 없이는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난 늑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늑대는 단번에 심장을 관통하기 위한 날카롭고 검은 손톱을, 장미의 가시처럼 길고 아름다운 손톱을 가지고 있어요. 삶을 절단하고 망가뜨리기 위한.

17. 늑대들은 이미 삶을 잊었어요. 그들은 죽어가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요. 그래서 모래 폭풍으로 집들을 휩쓸고 잔해 속에 어질러진 살의 토막만을 주워 먹어요.

18. 죽은 살은 삶이 아니라고 늑대는 믿어요.

꿈 속에서, 소녀는 볼 밑에서 흐르고 있는 불투명한 이미지들을, 목 매달린 사내의 익숙한 인영의 층위를 구성하는, 혹은 그보다 깊은 곳에서 점멸하는 이미지들, 소녀가 끝내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복잡한 회로들을 상상하며 속삭였다.

우리는 숨을 참아요. 숨을 쉬면서 꿈을 꾸는 사람도 있지만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우리는 꿈을 꾸기보다는 잠들기 일쑤죠. 잠을 자면서는 꿈을 꿀 수 없어요. 잠든 채로 꾸는 꿈들은 다른 곳이 아니에요. 기억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전혀 다른 부위, 엉뚱한 절개에 쑤셔넣고 부착하는 그런 꿈은 잠들기 전에, 혹은 후에, 그것도 아니라면 영원과도 같이 이어지는 긴 불면 속에서만 꿀 수 있어요. 숨을 참으면 잠들 수 없으니까. 더 쉽게 꿈을 꿀 수 있어요.

타들어가듯 아릿하고 뜨거운 욱신거림이 소녀의 볼을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소년은 사실 29번 채널을 모른다고, 한 번도 29번 채널을 본 적이 없다고 속삭였다. 그는 6반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소녀를 찾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6반에 속해 있었으니까. 6반만이 그가 속한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6반만이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그 바깥에는 그를 할퀴고 때리고 짓무르고 상처내고 피부를 열고 그 자리에 흉터와 같은 상처로 뒤덮인 피부를 만들어 주고 그를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손도, 그를 물지 않는 개로 만드는 목소리도, 이름이 없는 소년을 불러주는 그 많은, 애달프고 간절하고 끔찍한 목소리들도, 소년을 깨물고 애무하고 입맞추는 입술들도 없었으니까.

6반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년은 말했다.

소녀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을 붙잡을 수도 가지 말라고 소리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소년은 처음부터 6반에 속해 있었으니까, 소년은 한 번도 29번 채널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소년의 다른 곳은 전부 거짓이었으니까. 하지만 거짓이 아닌 다른 곳이 어디에 있지? 다른 곳이 거짓일 수밖에 없다면 소녀는 왜 계속 숨을 참고 이토록 괴롭게, 이토록 끔찍하게, 이토록 절박하게 29번 채널을 보고 있는 것일까?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텅 빈 칠판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주저하면서, 그러나 결코 끊어지지 않을 걸음으로 소녀에게서 멀어졌다. 소녀는 소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가 날 정도로. 소년을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소녀는 급히 숨을 헐떡거렸다. 소녀는 6반이 아닌가? 6반이 아닌 곳에서 그녀와 함께 29번 채널을 끝까지 상상할 수는 없었나?

소녀는 달갑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소년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소년이 속삭이는 거짓에 귀 기울였다. 소년을 밀치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의자 옆, 텅 빈 복도에 웅크리고 앉은 소년 옆에서 소녀는 교사의 목소리도 칠판의 글자들이 웅얼대는 정갈한 목소리도 아닌 소년을 들었다.

소녀는 결코 6반으로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소년이 있는 곳, 소년이 돌아간 곳, 소년이 처음부터 속해 있었던 곳으로. 왜냐하면 소녀는 그토록 간절하게, 그녀가 있는 곳을 건너서, 추잡하게 숨을 헐떡이면서 복도를 내달려 가장 먼 곳까지 갈 정도로 소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6반으로 가는 것, 화장실도 운동장도 도서실도 아닌 6반, 소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창문조차 들여다본 적이 없는 그 다른 공간, 1반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공간, 마치 꿈에서 보는 집처럼 엉뚱한 공간으로 가는 일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29번 채널로 찾아가는 것과는 달리, 왜냐하면 6반은 복도의 끝에, 가장 먼 곳에 있었으니까. 있으니까. 소녀는 그곳이 실재한다는 것을, 그곳에서 서른세 명의 아이들이 속닥거리고 울부짖고 낄낄거리고 간혹 침묵하며 더운 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3반의 앞문과 4반의 뒷문 사이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소녀는 간혹 복도 끝에서 울려퍼지는 황홀한 웃음소리를, 29번 채널의 유일한 음향효과와 같은 왁자지껄한 폭소를 듣고는 했다. 그러니까, 6반까지 가는 일은, 그곳에서 소년을 찾아 그에게 29번 채널의 돼지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일은,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소년이 그랬듯이 소년의 책상 옆에 주저앉아 유령처럼 속닥거리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소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녀는 그녀가 속해 있는 곳, 그녀의 책상과 의자와 사물함과 자리와 명단이 마련되어 있는 곳을 떠나 6반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교사가 소녀의 이름을 불러 쫓아낼 때까지 소녀는 마음껏 그곳에 망명하여 표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교사는 소녀의 이름을 모를 테고, 왜냐하면 그녀는 교사가 외우고 있을 서른세 명의 명단 안에 없을 테니까 출석부를 아무리 뒤져도 소녀의 이름은 찾을 수 없을 테고, 뒷문과 바로 인접해 있는 5반의 출석부에서도 소녀의 이름은 찾을 수 없을 테고, 4반에서도 3반, 2반에서도 소녀의 이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테고, 6반 교사는 결국 1반 출석부를 뒤져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 텐데, 왜냐하면 소녀가 1반에서, 복도의 가장 끝에서 이곳까지 건너왔으리라고는, 그녀에게 할당되어 있는 그녀의 것인 그녀의 책상과 의자, 텅 빈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랑스러운 장치들을 두고 6반까지 건너와 개미와 먼지들이 낡은 나무 틈 속에 드글거리는 더러운 복도에 앉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는 소녀가 유령이라고 믿을 것이고, 소녀에게 속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믿을 것이고 소녀를 쫓아내지 않을 것인데 그러면 소녀는 소년이 매일 같이 그리했듯 소년의 곁에 앉아 동산에서 멀거니 늑대를 기다리고 있는 세 마리 돼지들의 이야기와 방만하게 벌어진 옷장 속에서 꾸벅꾸벅 조는 집도의의 이야기를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하고 모멸적인 일일 테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숨을 참고 상상할 필요조차 없는.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그녀의 책상, 그녀에게 속해 있는 적갈빛의 매끄러운 책상, 그녀가 직접 더러운 낙서들과 얼룩들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낸 책상 앞에, 마찬가지로 더러운 얼룩들을 작고 마른 손으로 직접 닦아낸 의자 위에 앉아 아직 교사가 도착하지 않아 비어 있는 검은 칠판만을 멍하니 노려보고 있었다.

쉬는 시간은 이제 삼 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6반으로 가지 못할 이유 역시 충분했다. 6반까지는 뛰어가도 3분은 걸릴 것이고 소녀는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6반의 교사가 앞문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6반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2분밖에 남지 않았고 2분 안에 복도의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1분밖에 남지 않았고 소녀는 모두의 주목을 받으면서, 사라짐의 끔찍하고 추잡한 자취를 남기면서 그녀를 비난하고 경멸하는 무수한 들끓는 시선들 앞에서 진득하고 참을 수 없는 관심의 자취들을 6반까지 질질 끌면서 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수군거리고 욱신거리는 광폭한 시선들로 더럽혀져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었다. 유령처럼 비밀스럽게 소년의 옆에 앉아서 속닥거리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수업 시작 종이 울렸고 1반 교사가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실 문 위에 비스듬히 올려져 있던 칠판용 지우개, 십 분 전의 문장들을 잔뜩 흡입하여 포만한 지우개가 교사의 이마 위로 떨어졌고 끔찍하게 부연 흰 연기가, 와해된 문장의 포말들로 이루어진 흰빛이 여자의 정갈한 얼굴과 머리를 더럽혔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아이들은 한없이 곧고 투명하게 웃었다.

여자가 분노와 수치로 흐느끼면서 지우개를 터는 동안, 그리고 책상 위에서 부유하는 작은 얼굴들을 경멸스럽게 하나 하나 노려보는 동안 소녀는 6반에 갈 수 없으리라고 왜냐하면 이미 수업이 시작했으니까 수업 중에 복도를 나다닐 수 있는 사람은 교사들이나 행정직원들, 혹은 간혹 심부름을 수행하도록 선택받은 얌전한 아이들밖에는 없었으니까 6반에 가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그것은 숨을 참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게다가, 하고 소녀는 황급히 덧붙였다. 난 그 애의 이름도 몰라. 그 애가 어디에 앉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뒷문을 열고서 그것도 아니면 복도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고 난 그 애를 우스꽝스럽게 찾아야 할 거야. 그 반 담임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그 애를 찾아 눈을 굴려야 할 거야. 끔찍하게 우스꽝스럽겠지 다들 나를 보고 웃어젖히겠지. 하지만 난 그 애를 찾지 못할 거야. 그 애가 어디 앉아 있는지 모르고 그 애의 이름도 알지 못하니까. 뒷문을 열고 문 옆에 앉은 맨 끝 줄 아이에게 그 애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비밀스럽게 물어보는 것도 불가능할거야. 그러니까 6반에 갈 수는 없어. 6반에 가도 그 애를 찾을 수는 없어. 이름도 모르잖아.

어쩌면 난 그 애의 얼굴도 모르는지도 몰라. 그 애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못 알아볼지도 몰라. 그 애는 항상 내 옆에 앉아 있었으니까. 난 언제나 칠판을 선생님의 얇고 부드러운 입술이 벌어지고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애의 목소리, 보이지 않는 목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러니까 난 그 애를 찾을 수 없을 거야. 그 애를 찾을 수 없다면 6반에 갈 필요도 없어.

교사의 붉어진 눈이, 우스꽝스럽게 희어진 얼굴이 소녀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하였으나 간신히 참아넘기며 여자를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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