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 채널 4

교사는 소녀를 조심스럽게 불러내었다. 교단 앞에 선 여자와 소녀를 아이들은 소리 없이 응시하였다. 언제 왁자지껄하게, 천박하고 향기롭게 웃었냐는 듯 그들은 조용하게 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소녀에게 교무실, 여자의 자리에 있는 가방을 가져다달라고 속삭였다.

아이들은 여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여자가 그들에게 화를 내기를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꾸짖고 비난하고 때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소녀는 한 번도 교사의 심부름을 맡은 적이 없었다. 소녀는 신용할 만큼 얌전하고 착하며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교사들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지? 하고 교사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고 소녀는 도저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물론 소녀는 교사의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다. 학급의 문단속과 출석부 관리를 담당하는 주번을 맡을 때를 제외하고 그녀는 교무실을 드나들 일이 없었고 주번을 맡을 때도, 학급 열쇠와 출석부는 교무실 입구 바로 옆 벽에 있었기 때문에 교무실 안쪽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교사는 마치 소녀가 그녀의 심부름을 전담하는 가장 얌전하고 사랑받는 아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소녀에게 심부름을 맡겼다.

소녀는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경악하였다. 심부름을 맡는 일은 소녀가 감히 상상해볼 수도 없이 향기롭고 특권적인 일이었다. 소녀는 교사의 입맞춤을 받은 것처럼, 여름을 넘겨 벌어진 꽃처럼 바들바들 떨며 숨을 들이켰다.

교사는 불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것처럼 한없이 검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넌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고 속삭였다.

소녀는 여자의 입술이 작고 여린 꽃잎처럼 은밀하게 벌어졌다 다물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속삭였으므로 어쩌면 소녀는 전혀 다른 말을, 예컨대 네가 했다는 걸 알아, 같은 완전히 상반되는 언어를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자는 소녀가 그녀의 비밀스러운 전언을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확신하는 눈으로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녀는 수치심에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 밖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앞문으로 나섰는지 뒷문으로 나섰는지, 교실 문을 제대로 닫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소녀는 눈물이 날 것처럼 화끈거리는 볼을 손등으로 매만지며 황급히 걸었다. 복도 끝까지. 교무실은 2층에 있었으므로 소녀는 복도 끝의 계단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 소녀는 그녀의 옆에 6반 교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녀는 6반의 문이, 6반의 내부로 통하는 반쯤 열린 투명한 공간들이, 오로지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진 그 취약한 벽면들이 너무나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복도 창문 안쪽으로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과는 달리 소녀는 너무도 쉽게 소년을 알아보았다. 소년은 반대쪽 창가에, 운동장을 향해 열려 있는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는 달걀처럼 좁고 긴 타원형이었으며 머리 위에는 짐승의 터럭처럼 굵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소년은 아직 소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아직 소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녀는 복도의 끝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을 열고 6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책상도 그녀의 의자도 자리도 없는 곳, 그녀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낯선 곳, 그러나 분명히 소녀의 앞에 열려 있는 공간으로 소녀가 속하지 않은 장소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과분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교사의 신의를 완전히 배신하고. 분필가루를 뒤집어쓴 채로 교단 앞에 초라하게 서 있을 교사를 배신하고. 오직 알려지지 않은 더러운 복도 바닥을 향해.

소년의 얼굴은 달걀처럼 둥글고 길었다. 소녀는 소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 애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을 건너다보았다. 삶을 응시하는 거미의 여덟 개의 둥근 홑눈들처럼. 수정 직후 죽음과도 같이 절박하게 헐떡이는 생을 산 채로 집어 삼키는 날카로운 이빨들처럼.

소녀는 소년을 건너다 보았다.

소녀는 들어설 수 없었다.

소녀는 고정된 채 발열하는 무중력의 새와 같은 화면을 향해 속삭였다. 당신이 죽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겠죠. 기다리다 못해 늑대로 변해버린 아이들이 수술실을 빠져나왔고 다음날 동산에는 당신 이외에 아무도 오지 않았으며 당신은 오직 홀로 기다려야 했다고. 당신은 인사도 건네지 않았죠. 당신의 눈은 심각한 정신착란에 빠져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독에 내장을 다 갉아먹힌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터무니없이 지쳐 있었죠.

그러니까 당신이 자살을 했다고 상상할 수도 있겠죠. 그토록 망설인 끝에, 옛날 기계식 컴퓨터 장치라고 해도 십 분이면 계산해낼 죽음을, 그 열기를, 그 홀로임을 구태여 직접 겪어본 이후에야 당신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래서 낡은 넥타이로 서툴게 매듭을 묶고 올가미를 만들어서 옷걸이에 목을 매달았다고,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자살한 게 아니에요.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 목을 매고 매달려 있다는 것, 공중에 정지해 있다는 것이 반드시 죽음의 이미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소녀는 흐느끼면서 속삭였다.

소녀는 볼을 짓누르는 흰빛의 열기를 느끼면서, 은밀한 소금기가 정전기를 관통하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속삭였다. 죽음을 예감하지 못한 채, 죽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겠죠. 당신이 숨 쉬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당신은 미동도 없이 매달려 있으니까. 가슴이 조금도 오르내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죽은 것은 아니에요.

나도 숨을 참고 있는걸. 살아 있지 않으면 숨을 참을 수도 없죠.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을 참을 수 없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었잖아요. 숨을 쉬면서 TV를 볼 수는 없는 거니까.

심부름을 하는 건 고문처럼 기뻤다고 소녀는 속삭였다. 선생님은 나를 믿고 있었어요. 난 6반으로, 나를 초대하지도 환영하지도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대신 계단을 통해서 교무실로 들어섰어요. 교무실 안쪽에는 벌집처럼 많은 책상들과 컴퓨터들이 있었어요. 간혹 복도에서 마주쳤던, 하지만 인사를 하기에는 너무 낯설었던 선생님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얼굴들, 제대로 마주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얼굴들이 나를 힐금거렸지만 그 모든 얼굴들에게 인사를 할 수는 없었죠.

사실 난, 소녀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말했다. 인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인사를 하고 미소지으면 난 간혹 내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어요. 난 내가 그들을 반기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인사를 요구하는 교사들도 있었죠. 그들은 내가 인사를 하지 않으면 끔찍하게 단단한 검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어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내가 그들을 피해 달아나는 걸 지켜보았어요. 한참을 달려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들은 여전히 날카로운 검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죠. 내가 뒤늦게, 견디지 못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그들은 유령처럼 어딘가로 사라졌어요.

하지만 교사와 학생을 구분하는 것, 낯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인사하지 않고 낯을 아는 아이들, 그 중에서도 인사를 받아 줄만 한 아이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도 될 법한 아이들, 너무 오만하거나 가냘프지 않은 아이들-너무 오만한 아이들은 내가 먼저 스스럼 없이 인사를 건네는 걸 모욕으로 느낄 테고 너무 가냘픈 아이들, 학대받고 상처받은 아이들은 내가 인사하는 걸 폭력으로 여길 테니까 그 애들이 흐느끼듯 내게 안녕, 하고 속삭이는 건 우리 모두를 슬프게 만들었으니까-이 아닌, 내 인사에 상처받지도 굴욕감을 느끼지도 반대로 나를 멸시하지도 않을 아이들에게만 복도를 지나치는 그 짧은 순간에 인사를 건네는 일은 내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는 대개 인사를 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내 발끝과 복도의 반대쪽 수평선만을 바라보면서 걷고는 했죠.

고개를 숙이고 걷는 건 나뿐인 것 같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너무도 쉽게 서로를 알아차리고 서로를 위해 인사 하거나, 서슴없이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면서 인사를 했죠.

예전에는 모든 것이 쉬웠어요. 난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인사를 건넸죠. 대부분 내게 인사를 되돌려 줬어요. 얼굴을 볼 때마다 난 웃었고 그 애들도 웃었어요. 피로와 모멸에 사막처럼 말라버린 교사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내게 웃어줬어요.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내가 웃었을 때 더 이상 웃어보이지 않았고 난 웃지 않은 그 애의 얼굴을, 검고 둥근 눈을, 유달리 선명하게 보이는 눈 속의 깊은 균열들과 반짝이는 빛들과 물기와 주름들을 무방비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난 그 애의 무표정에 아무런 방패도 없이 노출되어 있었죠. 도망갈 수조차 없었어요. 왜냐하면 먼저 웃었던 건 나니까.

난 바들바들 떨리면서 광대뼈를 파고드는 미소를 놓지도 못한 채로, 고문을 당하듯 고통스럽게 그 애의 무표정을 견딜 수밖에 없었어요. 그 애는 웃지 않았죠. 끝까지 웃지 않았죠. 어떻게 그 무표정이, 그 순간이 끝났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영원한 무표정이었고 절대 사그라들지 않을 무표정,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행성의 종말과도 같은 생명의 무참하고 숙명적인 무표정이었고 난 생명이 본래 무표정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표정은 치명적인 흰빛이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달았죠.

그 뒤로는 웃는 게 괴로웠어요. 가만히 미소짓고 있으면 목과 입술, 눈가가 미친 듯이 경련하고 있는 게 느껴졌죠. 난 웃지 않기 위해, 혹은 웃기 위해 자주 눈을 깜빡거렸고, 치명적인 눈병에 걸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눈꺼풀을 깜빡였고, 그건 너무도 끔찍했던 것이, 왜냐하면 난 내가 눈을 깜빡거리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내가 몇 번 눈을 깜빡였는지 모조리 세고 있었으니까. 삼백아흔여덟 번 아니 오백쉰세 번을 깜빡였을 때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고 복도에는 길을 잃은 채 달을 찾아 떠도는 이른, 혹은 너무 늦은 나방들과 날개 달린 개미들, 땀과 걸음의 냄새가 깊이 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길과 나밖에는 없었으니까.

저녁이 되면 짐승처럼 육중해질 그림자를 내장에 깊이 갈무리한 나방이 내 목 안쪽에 내려앉을 때 난 그 부드러운 날개가 두려웠어요. 함부로 잡았다가는 찢어질 것 같아서. 그러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끔찍한 무표정을 다시 마주치게 될 것 같아서. 난 욱신거리는 간지러움을 참고 나방이 나를 맛보기를, 그리고 나를 두고 떠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죠.

선생님의 가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가죽으로 끈과 지퍼 부분이 부드럽게 덧대어진 백팩이었죠. 난 백팩을 메고 다니는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난 홀린 것처럼 그걸 집어들었죠. 짙고 절망적인 녹색이었어요. 가방 옆에는 국어 시간에 제출했던 작문 노트들이 쌓여 있었어요. 난 끔찍하게 쪼그라들어 주름이 진 백팩을 어깨에 멘 채로 공책 표지들을 손으로 쓸며 넘겨보았어요. 내 이름은 없었죠. 그제야 작문 노트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어요. 수업 시간에 난 글을 완성하지 못했고 아직 분필 분말에 희게 젖지도 않았고 굴욕과 슬픔에 저물지도 않았던 선생님이 아직 끝내지 못한 사람은 쉬는 시간에 반장에게 노트를 전해달라고 했고 쉬는 시간에도 난 작문을 완성하지 못했고 십 분이 지나가는 것을 초조하게 세는 것, 6반으로 가는 일의 불가능성을 가늠하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고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에 대한 글을 나는 끝맺지 못했어요.

웨딩드레스처럼 흰 셔츠를 입고 있는 교사 남자가 내가 노트들을 뒤적거리는 걸 보고, 뭐 하는 거니? 하고 다소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어요.

그가 몇 번을 다그쳐 물을 때까지도 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죠. 그가 당신을 닮아서였어요. 그의 입술은 젖은 버찌처럼 붉고 두툼했고 안와는 창백한 푸른 빛으로 깊이 파여 있었죠. 눈가에는 유리구슬을 깊이 들여다보면 관찰할 수 있는 균열들처럼 얕은 주름들이 퍼져 있었어요.

당신이라고 생각했죠.

당신이 나를 초대하기 위해 나를 29번 채널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고 믿었어요.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닮았으니까.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는 의사 가운도 돼지의 분홍 피부도 아닌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당신은 아직 29번 채널에 있을 테니까. 당신은 29번 채널의 전속 출연자니까. 새벽이 시작될 때부터 다음 새벽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29번 채널에서 늑대를 기다리거나 수술을 집도하거나 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옷 다른 피부 다른 클레이를 입고 바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연기하고 있을 테니까. 난 당신과 같은, 그러나 당신과는 다른, 미세하게 살펴보면 당신보다 콧대가 높고 콧볼이 좁으며 인중이 길고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온, 목이 두텁고 수축성의 주름들이 거북이처럼 금 가 있는 그 얼굴을 희귀한 나비를 발견한 곤충학자처럼 바라보면서, 선생님이 심부름을 보냈다고 대답했어요.

어느 선생님? 하고 그가 물었을 때 난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난 선생님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학기가 끝나가도록 선생님의 이름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죠. 난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돌리려 했어요. 무엇이든, 당신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가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하지 않는 화젯거리라면 정말 무엇이든 말하고 싶었죠. 하지만 그때 내가 떠올렸던 건 오로지 당신에 관한 것,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뿐이었어요.

19. 어째서 아직도 늑대를 기다리는 거예요?

20. 클레이를 온몸에 바르고 있으면 피부가 가렵지 않아요? 난 새끼 손가락에 매니큐어만 발라도 답답해서 눈물이 나는데.

21. 가면을 쓰는 건 어때요? 얼굴에는 클레이를 바르는 대신 돼지 가면을 쓰는 거예요. 가면을 쓰면 언제든지 다른 동물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늑대 가면과 돼지 가면을 번갈아서 쓰면.

22. 어서 나를 데려가 줘요. 어서 나를 데려가 줘요, 하고 속삭일 뻔했어요.

그는 당신과 닮았고 닮지 않은 부분은 당신을 더 선명하고 짙게 떠올리게 했죠. 간혹 노인처럼 깊고 연약한 목주름을 볼 때면 난 당신의 입술 틈이 생각나서 슬픔에 죽어버릴 것 같았죠.

결국 난 침묵했고 말 없음으로 선생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나는 심부름을 맡겨도 괜찮은 아이가 아님을 고스란히 증명해 보인 셈이었죠.

그는 나를 유심하게 내려다 보았어요. 완고한 입술에서 힘이 풀리면 숨길 수 없는 당신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도 가려지지 않은 노골적인 무표정이 나를 덮칠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난 그가 차라리 계속 분노하기를, 웃지 않을 것이라면 끔찍하게 분노해서 소리지르기를 바랐어요. 경멸과 고성이 무표정보다는 훨씬 견디기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나를 고요하게, 어둠처럼 냉혹한 적막으로 내려다보았죠. 그 사람은 당신처럼 키가 컸고 난 노트 표지에서 손을 떼지도 못한 채, 한쪽 어깨를 고통스럽게 짓눌러오는 가방끈을 모멸적으로 느끼면서 서 있었죠.

그는 갑자기 나를 알아보고는 내가 모르는 낯선 이름을 중얼거렸어요. 현진, 너 현진이 맞지? 하고요.

그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죠. 그는 반가워하는 것 같았어요. 난 그를, 당신을 닮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가 내게서 발견한 그 무엇에라도 집중함으로써 당신이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는 실망을, 29번 채널을 잊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모르는 그 아이인 체했죠.

현진이라는 애는 그림을 그리는 애 같았어요. 교사 남자는 내게 그림은 잘 그리고 있느냐고, 아직도 학원에 다니냐고, 미술 선생님에게는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쾌활한 어조로 재잘거렸죠.

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간혹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어요.

소리 내서 대답하지는 못했어요. 그가 다시 내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내가 현진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것 같았거든요. 지난번 백일장에서 현진이란 아이가 제출했던 모성을 주제로 한 그림에 대해서, 온통 푸른 빛으로 칠해졌던 바다 속 풍경에 대해서 교사 남자는 계속 떠들어 댔어요.

난 백일장에서 한 번도 그림을 제출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그 그림을 묘사해주고 감탄하면서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목의 주름을 움츠리며 깊은 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죠. 그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착각하는 아이의 그림은 꿈처럼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난 가끔 태아들이 잠들어 있는 옅고 푸른 바다를 생각해, 하고 남자는 비밀스럽게 상기된 입술로 속삭였죠. 그곳은 그리 깊지 않지. 한 방울의 기포도 그곳에는 떠다니지 않아. 태아들은 아가미도 기도도 아닌 탯줄로 호흡을 하지. 여자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굵은 혈관이 아이의 내장에 곧바로 산소를 공급해. 아이는 마치 우주에 떠 있는 망명자처럼 자유로워.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아이가 미래의 그 어느 순간에도 불가능할 짙은 존재를 느끼면서 예속에 매혹당한 물고기들이 아이의 입술을 간질이고 아직 여물지 않은 부드러운 입속으로 흘러들어와. 그건 아이의 생애 내내 따라다닐 아름답고 은밀한 환영이지. 바다 바깥에는 모든 것이 있고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이 아이의 바깥에 있지만 아이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지. 그건 중요한 고비야. 아이의 피부를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는 푸르고 엷은 막이 깨지고 나면 아이는 몸의 내부에 모든 것이 있다고 믿을 수도 있고 그 바깥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어떤 시나리오로 상상하든 그것은 아이의 자유지. 어느 쪽도 맞지 않고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아. 다만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수월한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이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 정지해 있어 영원히 정지해 있어.

넌 그걸 알고 있었어. 아이는 목을 매단 자살자처럼 탯줄에 매달린 채 정지해 있어. 목 매단 자살자의 이미지가 아직 죽음이 아니듯이 탯줄에 매달린 아이의 이미지도 아직은 삶이 아니야. 그것이 삶이 되기 위해서는 흘러가는 시간이 필요하지. 하지만 시간의 살은 그림 속에서 파랗고 차갑게 얼어붙었고 아이는 영원히 투명하고 아름다운 수면 아래에 매달려 있어. 그 아이가 이미 죽은 아이였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아니라는 걸 알아.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어. 아직 죽지도 살지도 않았어. 아이는 아직 숨을 쉬지 않고 아이의 내장에 폭력적으로 틈입하는 기포의 움직임을 아이는 아직 느끼지 못해. 아이는 삶이 무엇인지 몰라. 아이는 아직 숨을 멈출 수조차 없어. 숨을 멈추고 다른 곳을 상상할 수조차, 숨을 멈추고 죽음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 죽음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시간의 살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흐르지 않아.

소녀는 깊고 검은 현기증의 물 속에 가라앉은 채로 웅얼거림으로 변질된 교사 남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백일장에서 소녀는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소녀는 언제나 글을 썼다. 모성, 어머니라는 주제를 보고 소녀는 푸른 피 속에서 부유하는 거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남자가 애타게 감탄하는 그림의 묘사에서는 그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현진이 아니었다. 소녀는 언제나 글을 썼고 단 한 번도 백일장에서 그림을 제출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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