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 채널 5

풀밭 위를 위태롭게 뛰어가며 물통을 출렁이는 얼룩덜룩한 물감 투성이 손들. 여러 빛깔의 물감이 섞여 잿빛으로, 혹은 흙빛으로 엉글어진 물이 가득 담긴 물통. 손들을 부드럽게 스치며 떨어지는 물을 탐욕스럽게 받아먹고 반질거리는 녹빛으로, 감탄이 나올 만한 축축함으로 빛나는 질기고 단단한 풀들. 축축한 물감과 율동적인 손들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동안 소녀는 손가락 끝만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글을 썼다. 짐승들이 뛰노는 모래사장에 홀로 내버려진 선인장처럼 정적인, 식물성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내의 육감적인 입술을 올려다보면서 사내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소녀는 현진의 그림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그림을 보지도 않고 사랑하는 불가능한 매혹에 빠져든 채로, 소녀는 사내의 입술에서 짙게 퍼져나가는 농도 높은 물감의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가쁜 숨과 뒤얽힌 그의 말은 선명한 채도를 가진 물질처럼 느껴졌다.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무형의 언어도,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향하는 서글픈 운명을 가진 예속된 말도 아닌.

아이는 붉게도 보이고 희게도 보여. 아니, 아이는 붉고 동시에 희어. 하지만 그 애를 품고 있는 여자의 몸은 수성처럼 둥글고 음험한, 독성인 푸른빛이지. 자궁구에는 궤양처럼 돋아난 수십 개의 얼굴들이 있어. 얼굴들은 부드럽고 매혹적이지만 벌레처럼 징그럽게 보여. 해안의 밑바닥에서 헤엄치며 기어다니는 갯벌레들처럼. 게걸스러운 흰빛으로 드글거리는 흰 조개들처럼.

여자와 아이는 자궁구의 벌레 얼굴들 중 그 무엇도 닮지 않았어. 심지어 그들 서로간의 닮음도 보이지 않아. 아이는 너무 둥글고 통통한 나머지 개구리처럼 보이고 여자는 아름답지만 석상처럼 신적이며 무감해보이지.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뱃속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을 스스로 잘라낼 수 없다는 걸, 그녀의 몸속에서 부드럽게 팽창하는 바다를 끄집어낼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처럼 완고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그녀가 살아온 그 어떤 미래도 기억하지 못해. 그녀에게는 희미하고 서글픈 예감뿐이야. 침대 시트를 미지근한 소금기로 적신 뒤 사라져버리고 나는 애달픈 악몽처럼.

여자는 그녀가 낳을 것을 기억하지 못해. 그녀의 내부를 빼곡이 채운 얼굴들을 그녀는 더 이상 떠올리지 못해. 아직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어떠한 힘이 그녀를 짓누르고 으무르고 찢어내고 있다는 걸, 그래서 그녀를 완전히 도려내고 말리라는 걸, 여자는 오로지 불길하고 절망적인 낙관으로만 예상할 수 있을 뿐이야. 하지만 희망에, 이제는 불가능한 희망에 온몸을 소진시킬 정도로 여자는 나약하지 않아. 죽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그녀가 간직한 유일한 매혹인 숨을 참는 황홀을 저버릴 정도로 그녀가 미지를, 공포를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야. 그녀는 죽음의 내부에 삶이, 삶의 내부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있음을 아무리 절개해내도 함께 있음을 파쇄할 수는 없다는 것도.

교사 남자는 소녀를 애틋하게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난 네 그림 중에 그 그림이 가장 좋아. 그건 유달리 부드럽고 서글프지. 마치 시처럼, 눈 먼 시인이 쓴 시처럼 아름다워.

너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리지 않았어. 네 그림에는 바다와 여자와 바다생물이 있을 뿐이야. 네 그림에는 신도 창녀도 어머니도 없어. 그래서 네게 상을 줄 수는 없었던 거야. 백일장 주제는 모성이고 어머니였으니까.

사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 그림은 좋았어.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그는 꿈을 꾸듯 텅 빈, 매혹적으로 반짝이는 축축한 빛의 반영밖에는 없는 눈으로 속삭였다.

소녀는 화면 속 허공에 매달린, 그녀의 눈 앞에서 치명적인 삼색의 빛점들로, 구토를 유발하는 색의 뭉치로 변해버린 당신이 그가 아니었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정말 당신이 아니었어요?)

난 꿈에서 너를 보았어, 하고 그가 침묵하는 것을 소녀는 들었다.

소녀는 보이지 않는 화면을 향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난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난 몇 년동안 백일장에서 글만 썼고 그림을 그리는 애들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그 사람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내가 그 그림을 그린 것 같았어요. 내가 현진이란 아이인 것 같았고 내가 그림을, 그가 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난 보이지도 않는 그림에 매혹되었어요-정말 당신이 아니에요? 날 데리러 온 게 아니에요? 하고 소녀는 묻지 않았다. 그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물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 남자는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왜 그가 학교 대표로 추천해주었던 사생대회에 나가지 않았냐는 거였어요.

그는 대회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어요.

현진이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아닙니다, 하고 끊어버렸다고 했어요.

하지만 넌 아프지 않았잖아. 넌 멀쩡하게 학교에 나와서 수업을 듣고 있었잖아. 게다가 심부름을 하러 왔다고! 넌 심부름을 하러 교무실에 올 정도로 멀쩡한 거야.

그는 곧장 눈물을 흘릴 것 같았어요.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도 않았는데. 견딜 수 없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하고 있는 건 유달리 깊게 팬 그의 목주름, 당신과는 닮지 않은 적나라한 목주름뿐이었는데 어째서 그가 울 것 같다고 느꼈는지 모르겠어요.

왜 안 간 거야? 말도 없이. 난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어, 하고 그가 나지막이 말했어요.

목소리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작게 말했는데도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죠.

그는 내가 무례하고 건방지다고 했어요.

그는 화를 내고 있었죠. 하지만 내게 화를 내는 건 아니었어요. 난 현진이라는 아이가 아니었고 그림을 그릴 줄도 몰랐으니까. 미술 시간이 아니면 난 그럴듯한 낙서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죠. 난 그림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당신에게 보낸 편지에, 당신이 받지 못한 편지에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쳐 하나 그려넣지 못한 건 내가 당신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난 그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난 그림을 잘 못 그려요.

그는 내가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나를 추천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윽박질렀죠.

방금 전까지 현진이라는 애의 그림을 그토록 황홀하게, 매혹당한 포로와 같은 언어로 예찬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분개했죠. 왜 그가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원한다면 이곳에 남을 수도 있고 그 어디로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거니까. 학생이 학교에 남아 수업을 듣는 일이, 예정되어 있던 곳에 가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일이 그토록 분노할만한 일인가요? 그는 마치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린 사형수처럼, 영원히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죽음의 확고한 예정을 잃어버린 불치병자처럼 절망했어요.

그때, 무척 이상한 일이지만 어쩌면 현진은 나를 닮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그는 오래전에 내가 현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 때문에, 내가 현진일 수 없다는 것, 그가 연인의 밀어처럼 열성적으로 속삭였던 그림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어쩌면 그 그림을 본 적도 없으리라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다만 그는 나를 현진으로 여기고 현진에게, 그리고 동시에 그에 앞에 서 있는 내게 말을 걸던 관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그 자신도 연극인지 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나를 현진으로 대하고 있었던 거라고. 그러나 나는 사실 현진과 조금도 닮지 않았고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아니고 내 손가락에는 물감 얼룩도 없고 난 백일장에서 한 번도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아이, 기껏해야 글이나 쓰는 아이, 심부름을 와서 남의 노트나 뒤적거리는 무례한 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가 상기된 얼굴, 잔뜩 움츠러든 깊은 주름을 그 은밀한 열기를 보여줄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그토록 서글픈 분노에 치를 떤 것이라고.

난 슬픔을 닮은 열기에 울 듯이 몸을 떠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어요. 그는 당신을 닮았으니까. 닮지 않은 부분까지도 당신을 생각나게 했으니까. 그에게 부드러운 분홍빛의 돼지 가면을 씌워주고 싶었어요. 그가 더 이상 나를 그 애로 착각할 수 없을 때도 가면이 그 대신 연기를 하고 있을 수 있도록.

23. 왜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던 거예요? 왜 편지를 받지 못한 거예요? 난 분명히 편지를 보냈는데. 오직 당신에게만 통하는 주소로 당신이 알려준 그 반짝이는 흰 글자를 그대로 옮겨 적어서 편지를 보냈는데 당신은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고 했어요. 내가 당신을 찾아 갔더라면 그래서 더 이상 늑대를 기다리지 말라고 말해주었더라면 어쩌면 당신은 구원받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구원해야 했나요? 내가 당신을 초대해서 이곳으로 데려와야 했나요? 데리러 가지 않은 건, 편지를 받지 않은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였던 건가요? 당신도 내가 당신을 데리고 이곳으로, 당신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을 모든 이곳으로 데려오기를 바랐나요?

소녀는 숨을 참기 위해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죽음처럼 몸서리치는 속삭임으로 말했다.

내가 그 애를 구원해야 했나요? 그 애는 내가 천사가 되어주길 바랐을까요? 그랬다면 그 애는 천사가 되려 하지 않았을까요? 난 꿈 속에서 그 애를 봐요. 언제나 그 애를 봐요. 그 애는 어디에나 있어요. 반 교실에도, 버려진 차도에도, 텅 빈 오피스텔 안에도, 감옥에도, 동물원 우리에도, 서커스에도, 지하실에도, 공중에도, 그 애는 살아 있고 또 죽어 있어요. 그 애들은 전부 사실이에요. 꿈은 그 애들에게, 아직 살을 갖지 못한 애들에게 시간의 살과 공간의 뼈를 덧입혀요. 그리고 잔혹한 사실 속으로 내동댕이쳐요. 그 애들은 전부 사실이 돼요.

내가 그 애를 구해주어야 했나요? 그 애가 기다리던 천사는 나였을까요? 그렇지만 난 천사가 아니에요. 오래 전에 실수로 천사의 고기를 먹어버렸을 뿐이에요. 천사의 고기는 끔찍하고 역겨웠죠. 날개는 질겼고 고무 맛이 났어요 차마 천사를 토해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천사를 하수구에 내버리고 병균들이 득실대는 더러운 쥐들과 바퀴벌레들 파리떼에게 먹이로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사가 썩어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에 난 토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어요. 심호흡을 하고 명치 아래에 양 손을 올려놓고, 뱃속의 태아를 위로하는 산모처럼 내장을 달래었죠.

난 천사가 아니라 내 내장을 먹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아주 우연하고도 돌발적으로 난 천사의 고기를 먹게 되었고 날개를 먹으면서야 난 그게 천사의 고기라는 걸 깨달았고 천사 역시 고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몸을 가진 것, 시간의 살을 가진 것, 사실인 것은 모두 고기일 수 있으니까.

그 끔찍한 울렁거림은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난 시체처럼 창백하게 말라갔죠. 그 애가 내게 말을 걸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거예요. 난 너무 마르고 못생긴 여자아이였으니까. 교실에 앉아 있으면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죠. 특히 남자애들은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신경을 기울여서 오랫동안 관찰해야 했어요. 그만큼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고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써야만 하는 노력을 보상할 만한 매력조차 없는 아이였죠. 내게는 매력이 없었어요. 부드럽고 섬세한, 누구도 발견해내지 못한 신비로 짜인 그 취약한 베일, 사람에게 덧대어진 은밀한 장미의 향기가 내게 없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죠.

그러니까 그 애는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못생겼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마르고 피부는 누르스름하며 거칠고 머리카락은 언제나 헝클어졌기 때문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고 옷은 깨끗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애는 나를 발견했고 내게 다가왔던 거예요. 내가 그 애를 구원해주기를 바라면서.

난 그게 싫었어요. 치가 떨릴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었어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그 애밖에 없다는 사실이.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다른 남자아이들 혹은 여자아이들보다 그 애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애는 떠났죠.

그 애는 돌아갔어요. 그 애에게는 나 외에도 다른 장소가 있었던 거예요. 그 애를 요구하는 그 많은 손들을 뿌리치고 내게 오기에 나는 형편없이 모자랐던 거예요. 실수로 천사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면 천사와 조금도 닮지 않았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천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내게 희망을 투자하기에 그 애는 너무 현명했던 거죠. 나라도, 나라도 우리에게 감정을 투자하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그 애가 내게 오지 않았으면 난 결코 그 애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선택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 애에게도 매력은 없었으니까.

다만 그 애는 나와 달리 눈에 띄는 아이였죠. 누구나 별 노력 없이 그 애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 애가 가지고 있는 그 많은 결핍들, 너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결핍들의 요철들이 그 애를 두드러지게 만들었어요. 그 애를 더 깊게 파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많았죠. 그 애를 보고 있으면 가장 비열한 종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 누구의 결핍이라도 그 애 앞에서는 희박한 것이었으니까. 깊게 파내면 파낼수록, 그 애가 아파할수록 그 애 앞에 선 아이들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한동안 우리에게 고통은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어요. 아마 그 애도 자기 앞에 선 애들의 아픔 같은 건 느낄 수 없었을 거예요. 가장 아픈 건 그 애였으니까. 그 애보다 덜 아픈 사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겠죠.

만약 그 애가 29번 채널을 봤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우린 할 말이 하나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많은 거짓들을 꾸며내는 대신 단 하나의 사실을 내뱉었겠죠. 그전까지는 끔찍하게 길고 불길한, 가장 치명적인 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날 선 침묵만이 있었을 거예요.

난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겠죠. 그 애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복도 옆자리에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파멸시킬 거대한 결핍의 언어를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거예요. 난 복도로 도망쳤을 것이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현명하게도, 그리고 서글프게도 그 애는 29번 채널에 대해 말했어요. 우리는 할 말이 정말 많았죠. 물론 대부분 이야기는 그 애가 했지만 29번 채널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걱정도 슬픔도 없이 들을 수 있었어요. 당신이 편지를 받지 않았다는, 우리가 영원히 초대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초조함만을 제외하면.

그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화였어요. 숨을 참으면 우리에게 결핍된 향기를 맡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에게 여름을 넘겨 썩어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장미의 향이, 썩어가며 진진한, 감미로운 날개의 악취가 조금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난 돼지목장에서, 서커스에서, 불을 뿜는 소년들 사이에 섞여서 줄에 매달린 그 애를, 차도에 내동댕이쳐져 트럭 밑에서 압사당한 그 애를, 지하감옥에서 머리칼을 세면서 미치지 않기 위해 그 서글픈 숫자들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그 애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너를 사실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사실이라는 걸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가 시간의 살과 공간의 뼈, 아니, 공간의 피와 시간의 궤양들 사이에 파묻혀 썩어가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난 네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어. 네게서는 썩어가는 것들의 황홀하고 관능적인 악취가 나지 않았고, 사실 네게서는 거의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고, 오직 오래도록 빨지 않은 옷에서 나는 특유의 쉰내만이 진동했을 뿐이지. 그것도 사실 네 냄새는 아니었어. 그건 네 친구들, 네 적들, 네 이웃들, 네 아이들이 네게 덧붙였던 증오와 경멸과 애정의 냄새, 네게 부착된 감정의 냄새였지. 그건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냄새였어. 그래서 나는 그 냄새를 쉼게 잊었어.

소녀는 졸도할 듯 헐떡거리며 속삭였다.

결국, 소녀는 숨을 들이쉬고야 말았다.

그러나 화면은 꺼지지 않았고 멈추어져 있던 화면이 재생되지도 않았고 사내는, 흰 목련처럼 벌어진 가운이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창백한 몸은 여전히 옷장에 매달린 채였고 소녀는 사실 그녀는 아직 숨을 참고 있다는 것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행위는 숨을 참는 일과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러니까 숨을 참으면서도 동시에 흐느끼고 헐떡이고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을 경악스럽게 깨달았다.

어째서 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요? 그 애도 아니고 당신에게. 당신은 그 애가 아닌데. 당신과 그 애는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당신은 그 애의 미래가 아니고 그 애는 당신의 유년이 아닌데. 왜냐하면 당신과 그 애는 같은 시간에,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한 사람은 아무리 쪼개고 분열하고 서로 다른 것을 욕망하고 아파해도 결코 여럿일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그 애가 아닌데. 어째서 난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도 이미 발생한 미래를,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돌이키길 바라는 것처럼. 난 아무것도 고칠 수 없을 텐데.

Series Navigation<< 29번 채널 429번 채널 6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