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번 채널 6

그건 백조의 고기였어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역의 지하철 3번 출구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불가해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고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부랑자 한 명만이 계단 중턱에 걸터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죠. 물론 구걸을 하고 있다는 건 그의 앞에 그처럼 지저분하고 역겨운 동전들이 잔뜩 들어있는 녹슨 철그릇을 보고 내가 추측해낸 것이었죠.

사실 그는 돈을 달라거나 자비를 베풀어달라거나 아프다거나 자식들이 있다거나 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내가 너무 작고 어려서 그에게 돈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어린 애에게 구걸을 한다는 게 너무 굴욕적으로 여겨졌을지도. 아니면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처음부터 말이 없었거나.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굳이 후두암에 걸리거나 혀를 도려내지 않아도 어느 순간부터 언어로부터 떨어져 더는 언어를 전유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온몸을 언어에 내맡기고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경유하지 않으면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사람, 팔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말들이 돌연 마비된 것처럼 떨어져나가 끔찍하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사람.

난 마침 지하철표를 사고 남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 가까이로 다가갔죠. 그 더러운 양철 그릇에 동전을 던져넣고 싶었어요.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어요. 이전에 난 한 번도 돈을 기부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그때는 그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고, 양철 그릇에 동전을 던져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꼈죠.

이상스러운 초조함에 사로잡혀서 난 그에게 다가갔어요. 내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와 십 원짜리 동전 다섯 개를 넣는 걸 그 사람은 종용하지도 만류하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갑자기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라고요. 어디서 왔니? 하고.

난 끔찍하게 놀라서 소스라쳤어요. 그 사람이 물은 내용 때문도 그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라, 그 사람의 목소리 때문에. 그 사람의 목소리는 매혹적인 여가수처럼 부드럽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걸린 비단실과 같은 소리였어요. 그는 역겹게 엉클어진 수염으로 뒤덮인 남자였는데, 얼굴은 끔찍하게 퉁퉁했고 울룩불룩하게 부어 있었으며 굵은 목은 거북이처럼 깊은 주름 투성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여가수처럼, 소년처럼 맑고 아름다웠죠. 그건 위협적인 목소리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난 절망적인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어요.

그는 날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지 않았죠.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이 상기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어요. 난 그가 나를 달래고 싶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날 겁주지 않고, 날 위협하지 않고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죠. 팔을 뻗어 그 거대하고 더러운 품에 나를 안아줄 수도, 나를 미치도록 두렵게 하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날 위로해줄 수도 없었어요.

난 도망치지 않고 그의 앞에 멍하니 남아 있었죠. 그는 갑자기 배 밑에 힘없이 내려뜨리고 있던 팔, 그때까지는 더러운 누더기와도 같은 신문지, 음식 찌꺼기와 알 수 없는 얼룩들이 묻은 역겨운 종이에 가려져 있던 팔을 몸 옆으로 내린 뒤 손바닥을 활짝 펼쳐 지면에 밀착시키고는 몸을 들어올렸어요. 몸을 전부요. 그의 앙상한 팔에 푸르스름한 힘줄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뱀처럼 돋아나는 것을 분명히 봤어요.

그리고 들여올려진 몸에, 힘없이 떨어져나간 낡은 신문지 위로 드러난 몸에 다리는 없었죠.

그에게는 다리가 없었어요.

골반 바로 아래쪽에 뭉툭한 살, 상처도 출혈의 자국도 없이 둥글게 뭉쳐진 살,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살을 제외하면 다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죠. 그때 놀랍게도 난 무척 안심했어요. 그에게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쫓아 달려와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의 곁에 붙어 앉은 내 목을 조를 수는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의 곁에, 그보다 한 칸 위의 계단에 앉았죠. 그가 성인 남자의 상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단 한 칸 위에 앉았음에도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수는 없었어요. 그는 내가 떠나지 않고 그의 곁에 앉았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감격하는 것 같았어요. 난 천사가 아니었고 천사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도 그가 나를 천사처럼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오직 내가 어린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내게 낙관도 희망도 없이 삶을 삶으로 수용하는, 고통스럽고 비열한 의심조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 특유의 천진함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천진난만함, 어리석고 잔혹한 수용성은 내가 오래도록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죠. 단지 어리다는 사실 때문에 난 그 백치와 같은 신적인 긍정성을 벗어낼 수가 없었어요. 원하든 원치 않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함도 원치 않음도 없이 난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죠. 더 이상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임종 직전의 노인들처럼. 난 단지 내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난 삶을 원하지 않았고 삶을 증오하지도 않았죠. 난 아무런 요구도 없이 성자처럼, 혹은 백치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지나친 쾌락도 황홀도 절망도 없이. 그러한 삶의 방식이 어린아이에게 어떠한 표식을 남기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이니까.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설원의 터널과도 같은 유년에서 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그가 갑작스럽게 그 단단하고 앙상한 두 팔로 나를 끌어안았을 때 난 비명을 지르지 않았어요.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것도 천사에게나 가능한 방식으로, 가장 숭고하고 티 없이 맑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그의 앙상한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었죠. 그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흐느꼈어요.

그가 언제라도 나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어요. 그가 나를 너무 사랑하게 되면 그래서 나를 유년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난 두렵지 않았어요,

그건 그가 나를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는 그 잔혹한 터널을 경멸했기 때문일 테니까, 그가 내 목을 조른다면 오직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 테니까, 그렇지만 그는 내 목을 조르지 않았어요, 주머니에 들어 있을 날카로운 접이식 칼로 내 목을 찔러 절개하지도 않았죠. 그는 그저 나를 부드럽게 안아줄 뿐이었어요. 그는 울고 있었어요. 눈물이, 그 만연하고 부드러운 소금기가 내 볼과 턱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눈물은 미지근했어요. 그는 마치 내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순수인 것처럼 나를 애틋하게 끌어안았지만 사실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었어요. 난 그리 순수하지도 않았고 씻어낼 수 없는 순수의 잔영이 내 몸에 얼룩덜룩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죠.

난 한 번도 순수를 원한 적이 없어요. 순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가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었던 거죠. 하지만 그를 떨쳐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눈물에서는 은은한 냄새, 그의 악취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났고 난 그 속에 파묻혀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고마워 고마워, 하고 그는 계속 울더니 결국 내 등에 조심스럽게 닿아 있던 팔을 풀어내고는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게 주고 싶다고 말했죠.

그는 비쩍 마른 상체를 간신히 둘러싸고 있던 더러운 녹빛 재킷 주머니에서 고깃덩이를 꺼냈어요. 피가 뚝뚝 흐르는, 놀랍도록 두툼한 고기였어요. 난 그게 비둘기 고기라고 생각했죠. 깃털이 떨어져나간 긴 날개 모양의 뼈가 두 개 있었으니까.

다시 보니 그의 재킷은 피로 흥건했어요. 신문지를 적신 정체불명의 얼룩은 피가 굳어서 생긴 검갈빛의 반점인 것 같았어요. 그의 눈물이 반들거리는, 놀랄만큼 탐스러워보이는 고기 위에 떨어졌어요. 피로 흥건한 고기에는 어쩐 일인지 파리가 한 마리도 달겨들지 않았죠.

난 끔찍한 허기를 느꼈어요. 겁 없는 밤들에나 가능할 법한 허기, 치료를 거부하는 몸이 갈망하는 벌어짐, 잡초들이 탐욕스럽게 갈구하는 햇빛, 해 밑에서 더 검고 축축하게 피어오르는 긴 풀과 같은 허기가 내 몸에 잔혹할 정도로 무수히 자리잡고 있는 구멍들을 상기시켰어요. 메울 수 없는 구멍들, 오직 구멍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피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사실, 언제나 벌어져 있는 피부, 난 속살에서 들끓는 절망적인 빈 공간들을 느꼈어요..

그가 싸구려 지포라이터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젖은 고기에 불을 붙였어요. 고기는, 그 분신하는 천사는 눈부시게 타들어갔죠. 거의 재가 될 정도로 까맣게 타들어간 고기, 그러나 뼈만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이상한 고기를 들고 난 게걸스럽게 짓씹어댔어요.

먹으면 먹을수록 불가해한 허기가 차올랐죠. 그도 함께 먹었는지 먹었다면 얼마나 먹었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아요. 고기는 그리 맛있지 않았지만 난 그걸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어요. 내가 날개뼈를 들고 장화처럼 질기고 역겨운 살을 씹고 있을 때 그는 그게 천사의 고기라고 말했어요. 천사들의 나팔처럼 맑고 부드러운, 힘 있게 부풀어오른 목소리, 아들의 고기를 구워 신에게 대접하는 주인의 오만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그는 그게 천사의 고기라고 말했어요.

난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내 뱃속에서 요동치며 울렁거리는 그 고기가 그 메스꺼움이 내가 천사를 잡아먹었다는 사실을, 선악과를 베어먹은 두 마리의 피조물보다도 더 역겹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알려주었다고 해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설탕에 절여 녹아내리는 매혹적인 사과처럼 붉은 그 살이 천사의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고 해도 난 그걸 먹고 말았을 거예요. 난 차라리 그가 뒤늦게 알려준 것을, 내가 그 역겨운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내 범죄의 정체를 알려준 것을 고맙게 생각했죠.

왜냐하면 난 먹고 싶었으니까. 끔찍하고 절망적인 허기가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삶 이상으로 내가 믿고 있는 것, 내가 살았던 것 이상으로 그것을 갈망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너무 높이 자라나면 발각되어 잘려나갈 것을, 그래서 죽어버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햇빛을 향해 탐욕스럽게 자라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잡초들처럼. 불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달보다 강렬한 불빛을 향해 달겨드는 나방들처럼. 그 순수하고 고유한 향일성이 이끄는 곳으로부터 우리는 달아날 수 없으니까. 삶이나 죽음보다도 깊고 매혹적인 허기, 그 허기에 순종하는 범죄를 우리는 영원히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그가 꿈이었는지 꿈이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모든 것은 꿈이고 동시에 사실이니까. 꿈은 시간과 장소의 격자를 되찾았고 그 속에 얼룩진 모든 흔적들을 우리는 사실이라고 부르니까. 증거 없이 살아 있는 무수한 사실들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 이후로 난 돌이킬 수 없이 입맛을 잃어버렸죠. 먹는 것이, 심지어는 허기 자체가 범죄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던 거예요. 새의 살과 돼지의 살, 꽃의 살과 줄기의 살, 열매의 살과 벌레의 살 그 모든 것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아름다운 천사의 고기라는 것을, 그 모든 것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 사실들을 먹어치우지 않고 그 사실들을 짓씹어 삼키지 않고 내 안을 그 사실들로 적시고 오염시키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걸 안 거예요.

그래도 난 무언가를 먹기는 했죠. 삶에 순종하는 데에 꼭 필요한 만큼만, 범죄적인 허기에 시달리지 않을 만큼만 먹었어요. 난 끔찍하게 말랐고 못생겨졌죠. 얼굴은 누렇게 변했고 팔에는 푸른 뱀처럼 울렁거리는 보기 흉한 힘줄이 돋아났어요. 거울 속에서 난 그 거지 남자의 울룩불룩한 요철과도 같은 팔을 보았어요.

어째서 그는 내게 천사를 잡아먹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요? 신도 천사도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어째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요? 그가 괜찮다고, 누구나 천사의 살을 먹고 자란다고 말해주었다면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쩌면 그는 너무 허기졌기 때문에, 그의 다리를 잡아 뜯을 정도로 끔찍하게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내 울렁거림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지나치게 광폭한 그 허기 때문에 내 허기를 이해할 수도 연민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난 밤마다 천사가 내게 복수를 하러 오는 악몽에 시달렸지만 사실 그건 천사가 아니라 피를, 삶의 번식을, 무한하게 증폭하는 알들의 깨어짐을 갈망하는 암모기의 겁 없는 달겨듦에 불과했을 거예요.

사실, 저주도 계시도 심지어는 불길한 예감마저도 내겐 없었죠. 천사의 고기를 먹는 것, 살을 깨물고 으무르고 내장에 집어넣어 허기를 메우는 것, 그 이외의 벌은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난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역에, 이상하게도 인적이 드물던 3번 출구에 찾아가지 않았어요. 아마 그 부랑자는 여전히 그곳에서 침묵하고 있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어딘가에서. 어디에든, 심지어는 삶이 아닌 곳에서라도 그는 있을 거예요. 그는 사실이었고 내가 기억하는 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실이니까. 믿음은 존재이고 사실이니까. 시간과 공간에 틈입하여 살을 가진 고기. 신이 고기라는 그 역겹고 서글픈 진실을 난 너무도 갑작스럽게 배웠어요. 아직 유년을 벗어나기도 전에. 왜냐하면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으로 유년을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어린 시절은 이해할 수 없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할 기이한 결절점에서 사그라들기 마련이니까.

나는, 그리고 당신은 예전부터 삶에 무능했죠. 우리가 잘 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편지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편지를 다시 써서 보내는 일은 내게 불가능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주소가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당신은 분명히 했을 텐데도 그걸 고치지는 못했죠. 다만 주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편지를 받을 수 없으리라고 믿었을 뿐이에요. 어긋나 있는 것을 고치는 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었죠. 우리는 처음부터 기울어짐 속에서 태어났고 기울어진 채로 살아갔으니까. 달의 기울기에 익숙한, 그래서 지상에서는 자꾸만 비틀거리는 방랑자들처럼.

난 끝까지 그 애를 사랑하지 못했어요. 그 애를 선택할 수 없었으니까 그 애를 사랑할 수도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 애를 선택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는 있죠. 그럼에도 난 그 둘을 함께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모든 것을 망쳐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미 상실된 대상을 희망하기보다는 차라리 결여를 희망하기를 바랐으니까.

그 애의 빈 자리를 볼 수 있는 건 나뿐이었죠. 내 책상 옆의 비좁은 복도, 책상과 책상 사이에 있는 그 모든 복도들 중에 내 옆의 그 복도만이 그 애의 빈자리라는 것을 아는 것도. 거기에는 그림자조차 남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조차도 꿈일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서 빈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무언가로 메워진 뒤에도, 시간이 지나고 먼지 쌓인 건물이 허물어져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비어있음뿐일지도 몰라요.

아무도 우리에게서 결여를 빼앗을 수는 없죠. 우리에게는 결여의 공간이, 결여의 권리가 있어요. 그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생명보다도 견고한 결여가. 그 애에게도 그러한 결여가 있어요. 그 애가 남겨두고 간 유일한 그 결여 때문에 난 그 애를 알아볼 수 있어요. 몸서리쳐지게 깊고, 깨진 창문처럼 열려 있는 결여.

서커스에서 불을 뿜는 소년들과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황금빛 복장의 남자와 줄에 매달린 채로 꿈을 꾸며 잠드는 소녀, 그 애들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 애들은 한결같은 결여를 품고 있고 무한히 다른 방향으로, 다른 몸으로, 불가능한 동시성으로 분기한 뒤에도 결국 그 결여를 통해 합류하니까. 숨길 수 없이 활짝 벌어진, 아직은 갈망조차 없이 순수한 결여, 혹은 추잡하고 육감적인 관능으로 들끓는, 깊은 갈망으로 더 짙은 향을 풍기는 결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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