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12월 1일 – i11년 12월 1일

i11년 12월 1일

혹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소년은 흠집이 난 책상을 작고 가무잡잡한 손으로 더듬었다. 소년의 얼굴은 길고 부드러운 달걀 같았다. 밤의 어둠에 그을은 검은 달걀. 소년은 어느 날 달걀과 함께, 달걀인 채로 여자의 질에서 밀려나왔다. 아니, 소년은 어느 날 존재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를 감싸고 있는 검고 부드러운 달걀을 보았다. 소년은 서서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어진 가슴과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소년은 무엇인가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입안 가득 물고 있던 하얀 모래들이 소년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엇이 살아 있는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새의 날갯짓이 불러일으킨 작은 바람이 소년의 머리를 할퀴며 지나갈 때 소년의 몸 속에서 부풀어오르는 슬픔의 조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가?

소년은 소녀에게 안녕, 하고 인사했다. 소년의 가무잡잡한, 달걀 같은 얼굴이 소녀의 갈색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은 소년 자신의 안쪽을 향해 뒤틀려 있었다. 무엇이 소녀에게 인사를 한 것인가? 무엇이 소녀를 부른 것인가? 소년은 그것을 살피기 위해 소리의 방향을 면밀하게 추적하려 했다.

안녕 난 오늘 아침에 일어났어.

안녕 오늘도 우리 엄마는 시를 쓰고 있었어.

안녕 배우는 무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자기 몸을 보고 있어 진짜 웃기지.

안녕 넌 지금 무슨 생각해

안녕 너는 네가 어떻게 죽을지 알고 있어

안녕 아침의 강에서는 지금 물이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겠지

안녕 네가 시를 쓰는 걸 보았어

안녕 네가 생각하고 있는 언어를 나도 알고 싶어

안녕 저녁의 강에서는 물이 물을 마시고 있겠지

안녕 엄마가 내 몸을 씻겨줄 때 나도 엄마의 몸을 씻겨주고 싶었어

안녕 엄마가 나를 낳을 때 나도 엄마를 낳고 싶었어

안녕 그 애들이 나를 밀칠 때 나도 그 애들을 밀치고 싶었어. 아니야

안녕 그 애들이 나를 밀칠 때 나는 그 애들을 껴안고 싶었어

안녕 오늘은 행복한 날이야 하늘은 눈처럼 희고 내 입에는 물고기에 입에 고여 있는 것과 같은 물기가 가득 고여 있어 행복하지 정말 행복해 나는 살아 있고 너도 살아 있어 너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

안녕 안녕 그런데 열린 정맥에서 슬픔으로 피흘리는 죽은 장미의 숨결들이 비어져나올 때 내가 엄마의 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게 네 시였는지 엄마의 시였는지 모르겠어 미안해 그보다

안녕 가끔 공기에서는 피 맛이 나 운동장 다섯 바퀴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내 목의 점막과 입 속에서 풍기는 비릿한 쇠 맛 말이야

안녕 엄마는 천사가 나를 데리러 올 거라고 했어 천사들의 입에서도 쇠맛이 날까 천사들의 목구멍도 장미 같은 핏빛일까

안녕 나는 학교가 좋아 교실이 좋아 이렇게 인사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인사하는 상상을 몇 번이고 할 수 있으니까 집에서는 잘 되지 않아 거울을 보고 혼자 입술을 뻐끔거리는 걸 나는 오래 전에 그만두었어 녹이 슨 더러운 거울은 나를 보고 웃지 않아 나는 나를 보고 웃지 않아 검고 불투명한 달걀이 나를 보고 웃지 않아 나는 교실에서 네게 그리고 너희 모두에게 인사하는 게 좋아 너도 그렇지

안녕 잘 잤어 나는 밤새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어 하지만 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는 건 좋지 않아 아침이 오기까지 하루가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알고 있니 그 텅 빈 것이 나를 숨막히게 해 텅 빈 것이 내 안에서 불어나고 나를 터뜨리려고 해

안녕 너희도 내게 인사해 주면 좋을 텐데 너도 내게 인사해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끝나지 않는 긴 문장들을 서로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안녕 공기는 상처투성이고 허공의 침대는 여자의 피로 붉게 젖어 있어

안녕 천사는 내 인사를 받아줄까 안녕하고 천사에게 인사하면 천사도 내게 안녕하고 인사할까 천사는 외로울까 천사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안녕 거울은 얼굴과 얼굴이 마주하는 장소일까 혹은 얼굴과 그림자가 서로를 보지 않는 장소일까

안녕 천사를 만나면 말해야겠어 나는 지상에 조금 더 남고 싶다고 천사가 나와 함께 여기 남아주면 좋겠어 나는 백 번의 안녕을 주고받으며 이곳에 남아 있고 싶어

안녕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 미안해

안녕 사실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그래 그러니까 미안해하고 말할 필요도 없었고 사실 나는 미안해하고 말하지도 않았던 거야

안녕 응 나는 괜찮아 아니야 사실은 괜찮지 않아 머리가 조금 아프고 열이 나는 것 같아 내 안에서 떠드는 목소리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 소리내지 못한 말들이 동굴 속에서 부딪혀 떠돌아다니고 있어서 머리가 아파 토하고 싶어

안녕 별이 보이지 않는 먼 우주에 떨어진 새 한 마리가 얼마나 그곳을 견딜 수 있을까 우주의 바깥인 우주는 얼마나 지속될까 안녕 안녕 안녕

교사가 칠판 위에 적어내려가는 글자들을 소년은 읽을 수 없었다. 하얗고 구불구불한 글자들이 분필이 칠판과 접촉하는 리드믹컬한 소리와 함께 부풀어가는 동안 소년은 소년의 망막에 맺히는 흐릿하고 부드러운 흰 자국들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소년이 손을 들고 교사에게 눈이 나빠 칠판의 글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 교사는 소년에게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글자들을 읽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얗고 구불구불한 선들이 칠판 위를 부드럽게 유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글자들이 조금 더 명확해지면 그것은 어김없이 소년의 눈을 날카롭게 찔러올 것이었다.

소년은 두려웠다. 어떤 침묵과 어떤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소년의 연약한 껍질을 고통스럽게 베어내고는 했다. 껍질이 벗겨진 사과에서 흘러나오는 달고 투명한 진물. 깜빡임 없이 벌어진 눈꺼풀 속 검은 눈동자에서 물기가 흘러넘쳤다. 소년은 칠판 위에서 울렁거리는 하얗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교실 바깥까지, 밤까지 가져갈 수 있기를 바랐다. 길고 물기 많은 벌레처럼 보이는 글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 소년의 눈동자 위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속삭이는 듯했다. 누군가 소년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무엇인가가 소년의 위에 짙고 애틋한 자국으로 남는 듯했다. 소년은 울음을 참으며 허공의 흐릿한 흰 무늬를 노려보았다.

소년은 혹은 소년을 상상하는 나는 천국의 거대한 무화과 나무를 본다. 무화과 나무에는 순결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뱀은 무화과나무를 향해 긴 꼬리를 뻗으며 그것을 먹으라고 속삭인다. 이브는 희고 부드러운 손을 뻗어 무화과 열매를 따낸다. 이브의 치아가 무화과의 달고 씁쓸한 속살에 박혀들어간다. 신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이브를 낙원 바깥으로 쫓아낸다. 왜냐하면 이브가 순결에 입을 가져다대고 입 속에 순결을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브의 뱃속에서 순결이 녹아들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순결은 죄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무화과 열매를 삼키듯 울음을 삼켰다. 투명한 체액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밀려들어간다. 곤충의 내장과 새의 입 속, 비구름 속에 들어찬 물기가 소년의 안을 적신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터져나오는 소프라노의 울음소리가 소년의 내부로 역류한다. 소년은 목 안쪽에서 타들어가는 붉은 열기를 느꼈다. 사과처럼 둥글고 물고기의 입속처럼 검은.

소년의 옆자리에 앉은 소녀는 오른손에 붉은 크레파스를 들고 왼쪽 손목에 거칠게 칠하고 있었다. 소녀의 왼쪽 손목이 붉고 짙은 색으로 차올랐다. 소년은 왼쪽 눈은 칠판에 고정시킨 뒤 오른쪽 눈만을 소녀를 향해 돌리려 노력했다. 소년의 안녕에 소녀가 안녕으로 대답한 이후부터 소년은 소녀에게 말을 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말하고 싶은 수억 개의 문장들을 눈꺼풀 뒤편, 망막 안쪽에 은밀하게 새겨넣었다. 소년은 그 모든 문장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년은 무수히 누적된 그 언어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거친 날숨과 함께 허공에 던져버리기 이전에는, 소리와 함께 풍선처럼 멀리 날아가기 전까지는, 소년은 그의 작고 길쭉한 두개골 내부에 쌓인 그 많은 문장들을, 눈 안쪽을 지네 다리처럼 득시글하게 덮고 있는 언어를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었다. 소년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끈적하게 분비되고 있는 언어, 그것은 짐승의 내장처럼 축축하고 장미 기름처럼 감미로운 것이었다. 소년은 그의 근육과 관절을 칭칭 감아 조이는 야릇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말하지 못한 말들 하나하나는 그를 헤집는 안타까움이었다. 소년이 죽기 전에 천사가 그를 데리러 오기 전에 이토록 바글거리는 무수한 말들을 전부 내놓을 수 있을까? 이것들을 전부 쏟아버리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날숨을 내쉬어야 할까? 매 순간 번식하여 불어나는 말들을 전부 내뱉으려면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천사가 그에게 입맞추는 순간 소년의 눈 안쪽 점막에서 기어나와 소년의 목구멍까지 들어가 있던 벌레 같은 언어들이 천사의 입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천사가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소년의 입 속에 소년이 낳은 언어들을 다시 토해내면 어떡하지? 소년은 천사의 토사물을 삼키고 또 다시 끓어오르는 그것들을 삼키고 소년의 육체를 거북스럽게 잠식하고 비등하는 언어를 느껴야만 할 것이다. 느끼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눈을 감은 뒤에도 소년은 귀뚜라미처럼 더듬이와 날개를 마찰시키며 부글거리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도처에 가득한 무의미한 기적들. 하늘은 독처럼 파랗고 거미는 은빛 거미줄 위에서 경련한다. 소년은 작고 부드러운 손가락 사이에 파리를 집어넣고 그것을 뭉개버린 적이 있었다.

내가 돼지에게 씹질하는 동안 여동생은 나를 보고 있었어 하고 남자는 말했다.

소년은 주변에서 유리공들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먼 곳에서 폭발하는 별처럼, 허공을 떠도는 무수한 총알들, 그것들이 기적적으로 소년의 육체를 피해간다. 무의미한 기적들. 도처에 가득한. 소년을 관통하지 않는. 증발한 물처럼 가볍게 멀리까지 갈 수 있다면.

삐에로는 소년의 작은 몸을 끌어안는다. 남자의 몸은 나무 위에 오래된 열매처럼 걸려 있다. 죽은 자의 늘어진 혀처럼 남자는 걸려 있다.

내가 죽어가는 동안 너는 여기에 서서 나를 봐야 해. 네가 내게 죽어주지 않을 거라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남자는 나무 위에 매달린 채로 소년을 내려다본다. 아니다. 남자의 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죽었나? 나뭇가지가 부러지기 전에, 열매가 떨어져 으스러지기 전에, 그는 죽었나? 그가 죽기 전에, 그는 살아 있었나?

엄마는 3류 시인조차 되지 못하였다. 엄마는 2류 시인이 되기 위해 평생을 발버둥쳤지만 3류 시인조차 되지 못하였다. 소년은 생각한다. 엄마의 시는 실패하였고 엄마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인생은 실패하지 않았다. 엄마는 살아 있으므로 생을 실패하는 데 실패하였다. 엄마는 죽을 것이지만 그 여자가 살고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므로 엄마는 죽지 않을 것이고 산 적도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실패한 인생을 사는 데도 실패할 것이다. 그렇지만 엄마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소년은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을 생각하듯 소년의 엄마를 생각한다. 소년은 생각했다. 엄마는 기다렸어. 나는 남자가 죽기를 기다리지 않고 도망쳤어. 남자는 나무 위에 사형수처럼 매달려 있었고 그는 내게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나는 기다리지 않고 도망쳤어. 어디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돼지들이 씹질하고 우물 속 여자가 흰 원피스를 입고 기다리는 곳으로.

분홍색 젤리 속에 빠진 쥐는 물 속 나방처럼 헤엄친다. 포르노 배우는 흐느끼는 신음을 내뱉고 카메라는 성기와 성기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쫓는다. 마찰하고 움직이지만 어디로도 가지 않는. 촬영을 마친 배우들은 옷을 입고 농담을 하다가 각자의 스케쥴대로 헤어진다. 그들은 특별히 냉소적이지도 않고 특별히 애틋하지도 않다. 포르노 필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그들의 웃음과 입맞춤과 눈물을 집요하게 촬영한다. 돼지의 음경을 빠는 포르노 배우. 포르노 배우의 음부를 빠는 돼지. 남자는 돼지의 목에 도끼날을 박아넣으며 발기했다. 그러나 사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슬펐고 돼지는 쉽게 죽지 않았으며 허공은 조금도 젖어 있지 않았다.

목맴사 하는 남자들이 발기하며 죽는다는 말이 사실일까? 소년은 생각한다. 소년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를 데리러 올 천사들은 소년의 좆을 빨아줄까? 소년은 생각한다. 소년은 생각한다. 허공에 못박혀 불타고 있는 늙은 별.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 눈 멀고 귀 먹은 채 미치도록 타고 있는 어떤 관념. 그를 데리러 올 천사들은 창녀일까? 별은 어떻게 태어나지? 별은 어떻게 발기하고 어떻게 사정하지? 목과 턱 사이의 이음매가 벌어진 돼지는 어떻게 발기하고 어떻게 사정하지? 천사들은 모두 창녀일까? 도축된 천사도 발기할까? 아이스크림은 무엇의 고기로 만들지? 아이스크림 위에 올리는 잼은 무엇을 짓이겨서 만들지? 허공이 소년을 응시한다. 무표정하게, 선의도 악의도 없는 투명한 눈으로. 소년은 정말 이렇게 생각했을까?

오 그런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아. 그 애가 그런 것을 생각했든 생각하지 않았든. 나는 생각한다. 목구멍에 장미 줄기를 박아넣고 입을 벌리고 있는 어떤 여자의 벌어진 입 밖으로 만발한 붉은 장미가 비어져나와 있다. 그녀는 이류 시인이 되고 싶었으나 삼류 시인이 되는 데도 실패했다. 그녀는 절망했고 더 이상 절망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자조했고 곧 자조가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죽고 싶었으나 더 이상 죽음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그녀를 죽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살인적인 욕망을 그녀는 완전히 잊었거나 잊은 것처럼 느꼈다.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바는 그녀가 지쳤다는 것이다. 저기 교실 칠판의 판서를 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자신이 누구의, 어떤 서술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앉아 있다. 어리석기는. 아가. 너는 네가 어디 앉아 있는지도 모르잖니. 발기한 돼지가 울고 있다. 돼지는 천사의 갑옷을 입고 있다. 포르노 배우는 돼지의 성기를 정성스럽고 집요하게 빤다. 편도선이 부어오르고 슬픔이 역류한다. 소년은 떠오르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떠오른다.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추락도 부서짐도 출혈도 없이.

슬픔. 내게 슬픔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내게 자조와 반복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내게 자조하지 않으려는 투쟁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나는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17개월의 닭이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검으며 속이 그다지 비지 않은 달걀이다. 그 점을 잊으면 안된다.

소년은 교사의 음성을 들었다. 교사는 소년이 아닌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년은 교사의 말로부터 주어와 목적어와 서술어를 분리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소년은 눈 먼 이처럼 예민하게 들었으나 너무나 예민한 탓에 잘 듣지 못했다. 그러나 소년이 잘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교사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아니 그녀였던가?-는 소년을 불러 질문을 한 적도 소년의 무지를 지적한 적도 없었다. 소년은 다만 듣고 있었다. 그가 소년에게 칭찬을 한 적은 있었던가?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해 대단한 우울이고 대단한 자폐야 이만큼 망가진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오 소년은 원하고 있었다. 살인적인 탐욕 빌어먹을 갈망 소년은 더 많은 것들을, 그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한 개의 사탕이 아니라 수억 개의 사탕을, 한 송이 장미가 아니라 무한한 장미를, 소년은 원하고 원하고 또 원했다. 원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체념하여 가라앉는 동안에도 소년은 원하고 있었다. 더 많은 천사들 더 많은 음부들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글자들 더 많은 삶 더 많은 언어 더 많은 친구 더 많은 포옹 더 많은 애정 더 많은 생일파티 더 많은 케이크를 소년은 원하고 있었다. 발기한 창녀가 소년의 이마에 성기를 가져다 댄다. 소년은 눈물이 흐르는 벌어진 눈으로 흘러가는 흰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한 조각의 사과를 맛본 이브는 그녀가 천국보다, 신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녀가 그녀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음을.

i11년 7월 15일

헨젤 : 그레텔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내가 죽을 때도 너는 내 곁에 있어 주겠지.

형사 : 이상한 일이지. 너희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레텔 그리고 너는 헨젤이라고 했지? (중얼거린다) 그레텔 헨젤 그레텔 헨젤 그레텔 (소리지른다) 너희 혹시 내 아이들 아니니?

그레텔 : 그런 것 같아요. 아빠.

헨젤 : 우와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아빠가 우리와 함께 있었다니! 마치 기적 같아요.

형사 : 그래. 얘들아.

그레텔 : 그런데 아빠 언제부터 형사가 된 거예요? 내가 알기로 아빠는 무덤 파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형사 : 그렇구나. 얘들아.

헨젤 : 알겠어. 아빠는 슈퍼맨처럼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낮에는 범죄자들을 잡고 밤에는 무덤을 팠던 거죠.

그레텔 : 아빠는 낮에도 무덤 파는 일을 했어.

헨젤 : 그럼 밤에는 범죄자들을 잡았겠지.

형사 : 무덤 파는 일이라고? 누구 무덤 말이냐?

그레텔 : 유령들의 무덤이죠.

헨젤 : 그러고보니 아빠 얼굴이 좀 변한 것 같아요. 키도 더 커졌고, 아, 세상에 이제 등도 똑바로 펴고 계시는군요. (명령조로) 좀 걸어 봐요. 그래요. 아 정말 이상해. 그레텔, 그렇지 않아?

그레텔 : 뭐가?

헨젤 : 봐. 아빠가 걷고 있잖아. 아빠가 똑바로 걷고 있다고. 난 지금까지 아빠가 절름발이 병신인 줄 알았는데.

그레텔 : (헨젤을 흘겨보며) 아빠가 듣고 있잖아.

헨젤 : 뭐 어때. 아빠가 절름발이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형사 : 난 절름발이가 아니야. 경찰이 된 뒤 절름발이가 될 수는 있어도 경찰이 되기 전부터 절름발이일 수는 없단다. 절름발이는 경찰 시험에 합격할 수 없으니까.

헨젤 : 그럼 병신도 아니에요?

형사 : 그래. 난 병신이 아니야.

그레텔 : 그럼 그 새끼한테 똑바로 말해줄 걸 그랬어. 우리 아빠는 병신이 아니라고.

헨젤 : 뭐? (잠시 생각하더니) 아,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레텔 : 아니야. 오빠. 너는 아무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어.

형사 : 너무 늦었구나. 우리가 누굴 기다리고 있었지? 아니야. 됐어. 그보다 이제 나가자구나.

헨젤 : 어디로요 아빠

형사 : 경찰서에. 너희 엄마의 죽음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단다. 가서 조서를 작성해야 해.

그레텔 : 아빠. 엄마는 내가 죽였어요. 아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형사 : 그래. 그 말을 경찰서에서 해주면 된단다. 가자.

그레텔 : 아빠. 당신이 우리 아빠라면 우리는 당신 자식들일 거예요. 그렇죠?

형사 :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지.

헨젤 : 그건 맞는 말이야. 엄마는 우리 엄마지만 우리는 엄마의 자식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레텔 : 어쨌든 아빠는 선택해야 해요. 아빠의 역할과 형사의 역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요.

형사 : 어째서 선택해야 하지? 나는 아버지로서 또 형사로서 너희를 데리고 나갈 거다.

(에메랄드빛 파리가 장미잼으로 범벅된 무대 위를 부드럽게 유영한다. 인형의 축 늘어진 혀. 증발한 물들이 가볍게 가는 먼 곳을 배우들의 황금빛 눈이 바라본다. 도처에서 만발하는 장밋빛 절망. 남자 역의 배우가 문 밖으로 나선다. 아이 역의 배우들은 이마를 맞댄 채 속닥거린다.)

그레텔 : 오빠. 엄마가 보고 싶어.

헨젤 : 엄마 내 목소리가 멀리 더 멀리 가고 있어

그레텔 : 어디까지?

헨젤 : 더는 내가 안 들릴 때까지

그레텔 : 우리 목소리가 가 닿는 곳은 우리보다 더 먼 곳일까 우리는 왜 그곳을 느낄 수 없을까. (긴 사이) 그건 기껏해야 우리 머리통 속인지도 몰라. 오빠 (턱을 덜덜 떨며) 난 자수해야 하는데 내 범죄를 직접 고백해야 하는데 경찰서에서 말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지. 무서워. 오빠 내 말들이 나를 떠나가고 있어. 내 혀가 말라가고 내 입이 꺼끌거리고 곧 내 혀가 내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내 목구멍이 내 몸 속으로 사라지고 내 몸이 사라지고 나면 내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지? 그곳에서 내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면 내게 한 마디도 남지 않으면 어떡하지. 오빠. 이제야 우리는 그곳으로 가게 될 텐데.

헨젤 : 그곳?

그레텔 : (부드럽게 웃으며) 여기가 아닌 곳 말이야 오빠. 난 점점 귀머거리가 되어가는 것 같아. 목소리들이 점점 흐려져. 잘 들리질 않아. 이러다 내가 내 모든 말들을 잃게 되면. (웃음 사라진다) 그런 날은 언젠가 오겠지. 그런 날은 곧 올 거야. 목소리들은 나보다 멀리 가고 나를 두고 가고 더 이상 내게 속하지 않은 채 나를 잊고 말겠지.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할 거야. 오빠. 그게 가장 끔찍한 점이야. 내 머리에서 떨어진 머리카락이 어디에서 녹아내리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지. 오빠. (헨젤을 끌어안으며) 오빠가 정원용 가위로 잘라버린 도마뱀 꼬리가 어디에서 썩고 있는지 오빠는 몰라 도마뱀도 모를거야 도마뱀은 도망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멍하게) 내가 엄마를 죽이기 전에 엄마가 왔다면 (고개를 흔들며) 아니, 아니야. 오빠가 나를 죽이기 전에 엄마가 돌아온다면 (눈물을 흘린다) 오빠 천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그것들은 내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달려가고 있어. 가벼운 발자국 소리. 에메랄드빛 파리들이 그 뒤를 따르고 나는 그것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마지막 소리를 들어. 내가 언어를 잃어버리면 나는 물거품으로 뻐끔대겠지. 나는 물고기처럼 침묵하며 뻐끔거릴 거야. 살려줘. 나를 데려가. 혹은 나와 같이 남아줘. 자, 봐. 오빠. 비둘기처럼 하얗고 작은 여자아이가 내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놓고 있어. 여자아이는 내 말을 바라보고 있어. 그 애에게 그 애의 호박색 눈동자에 나는 말하는 거야. 보물이 있단다. 아가. 보물이. 여자아이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겨. 그 애가 누구일 것 같아?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너 지금 나를 경멸하고 있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관객들이 웃는다.)

관객들 : (침묵한다.)

헨젤 : 아니야. 그레텔. 나는 너를 특별히 경멸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아. 너는 특별히 정상적이지도 미치지도 않았어. (잠시 생각하더니) 네 범죄만 들키지 않는다면 말이야. (생각한다) 아니 네 범죄도 그리 특별한 건 아니야.

그레텔 : 그럼 오빠한테 줄까?

헨젤 : (반색하며) 정말? 정말이지?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약속한 거야, 아냐.

그레텔 : 아냐라고? 나는 그레텔이야 오빠 정신차려.

관객 : (웃는다 혹은 웃지 않는다)

헨젤 : 아냐 그레텔 아냐 그레텔 아냐가 아닌 그레텔 (관객 웃는다) 그레텔 그럼 지금 엄마를 보러가도 될까?

그레텔 : 그래 그건 이제부터 네 엄마고 네 희생자야

헨젤 :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마네킹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린다)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닌데 (문 밖으로 뛰쳐나간다.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맨 손으로 땅을 헤집으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레텔 : 왜? 안 보여?

헨젤 : (손톱에서 피를 흘리며 땅을 헤집는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없어, 그레텔, 없어.

그레텔 : 없다니 뭐가.

헨젤 : 시체가 엄마가 아니 내 보물 희생자 아무것도 없어 (바닥을 미친 듯이 헤집는다) 없어 없다고.

그레텔 :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며) 경찰은 갔어, 오빠. 그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야. 내게 자백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헨젤 : 그럼 어떡해? 그레텔, 우리는 이제 어떡해?

그레텔 : 어떡하긴, (다정하게) 기다려야지 오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에메랄드빛 파리들이 아이들의 하얀 이마에 내려앉는다. 달처럼 희고 둥근 조명이 무대 한복판을 가로지른다. 장밋빛 잼이 무대 밑으로 천천히 흘러내린다.)

i11년 12월 1일

혹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날

턱 끝의 우울한 표정. 소년은 거울 속 부서진 물거품들처럼 침묵했다. 그러나 그 애에게 더 이상 말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년에게는 말이 남아 있었다. 물거품처럼 많은 말. 물거품처럼 부서지는 말. 물거품처럼 침묵하는 말. 교실의 소름 끼치는 온기. 그 애를 끌어안지 않는 아이들을 소년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아이들은 소년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지금 내가 그 애에 대해 쓰는 언어에 대해서도 너희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소년은 개처럼 살아 있었다. 꽃을 물어뜯고 우적우적 삼키는 얼굴이 하얀 거지처럼 살아 있었다. 소년은 곧 자신이 걸어가게 될 긴 골목에 대해 생각했다. 소년은 수업 중의 전형적인 졸음에 시달리며-그러나 그것이 전형적이라는 것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아무도 소년에게 수업 중의 졸음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소년의 졸음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으므로-꿈을 꾸었다. 소년의 사지는 몽롱함으로 마비되었으나 소년은 무엇인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교단으로 나섰다. 처음 전학온 아이처럼 소년은 아이들을 마주보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 반가워. 얘들아. 너희와 친해지고 싶어. 내 생일파티에 너희를 초대하고 싶어. 너희 생일파티에 초대받고 싶어.

소년은 피와 살이 없는 어떤 다리를 움직여 걸었다. 소년은 교실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복도는 창백하고 더러웠다. 공기에서는 인육 냄새가 났다. 소년은 여러 겹의 창문들로 둘러싸인 복도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창문으로 뛰어내려도 괜찮았을 것이다. 소년은 새처럼 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앙상하고 가벼운 양팔을 벌리고 펼쳐진 빨래감처럼 가볍게 날 수 있으리라는. 그러나 소년은 습관대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운동장에는 몇 마리의 비둘기들이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들의 검고 매서운 눈. 소년은 한쪽 다리가 잘려 절룩거리는 비둘기를 향해 다가섰다. 소년은 지나치게 가볍고 뭉근한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안녕.

안녕.

비둘기가 대답했다. 소년은 발갛게 볼을 물들인 채-혹은 그렇게 느끼며-물었다. 너 뭘 들었어? 비둘기가 대답했다. 네가 듣는 것. 네가 듣는 것을 들었어. 소년은 투명하고 메마른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내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유리. 내가 얼마나 오래 걷게 될까. 네가 얼마나 오래 나에 대해 말하게 될까. 비둘기의 입에서는 말라붙은 창백한 모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의 눈은 흰 막으로 덮여 있었다. 점액질로 덮인 나무에서 백색 장미처럼 흰 주름으로 뒤덮인 애벌레가 기어내려오고 있었다. 나보코프 풍의 풍경이다. 소년은 귓바퀴 주변에서 웅웅대는 특별한 소음을 들었다. 다가오고 점차 멀어지는 날갯짓 같은 목소리들. 희미하고 분명한 목소리들. 소년은 공기방울 같은 눈물을 계속해서 눈꺼풀 아래로 배설하며 속삭였다. 네가 듣는 것을 나도 듣고 있어. 비둘기는 무표정하게 부리를 뻐끔거리며 대답했다. 정물 같은 얼굴. 그러나 소년은 비둘기가 웃고 있음을 알았다. 혹은 그렇게 상상했다.

비둘기 : 나는 저주에 걸렸어. 욕심 많은 오빠들이 마녀에게 부탁해 내게 저주를 걸게 했지.

소년 : 저주에 걸려서 새가 된 거야? 소년은 정해진 대사를 읊듯 다소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둘기 : 아니야. 모르겠어. (무표정한 미소. 무표정한 미소 사라진다.) 저주 때문에 나는 내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저주 때문에 내가 비둘기가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 알 수 없다는 지점이 바로 저주의 가장 끔찍한 내용인지도 몰라. 기억 속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는데 새가 된 나는 절망적으로 늙어버렸어. 나는 몇 개의 알을 낳았고 그 알이 깨지거나 썩어버리거나 사라지는 것을 보았지. 내장의 경련과 빠져나옴 무엇인가 알 속에서 몸부림치는 소리, 물론 내가 알을 낳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꿈 속에서 이룬 모든 업적들이 그러하듯 알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고 내 몸에 속해 있지도 않으니까.

공기 중을 떠도는 달콤하고 역겨운 인육 냄새. 비둘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년은 비둘기가 박제된 시체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불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비둘기의 눈은 인형의 유리눈처럼 창백하게 번들거렸다. 소년은 바닥을 기어다니는 통통하고 불그스름한 지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도 혀도 없이 꿈틀거리는, 태양 아래의 피와 살점. 그것은 너무나 붉고 너무나 알몸이어서 소년은 끔찍한 야릇함을 느꼈다. 비둘기는 소년을 응시하더니-혹은 먼 눈을 소년을 향해 드러내보이더니-고개를 숙여 잽싸게 지렁이를 낚아챘다. 단단하고 메마른 부리 사이에서 붉은 점액질의 육체가 경련했다.

소년은 관능적이고 육중한 경련 앞에 마비된 채 비둘기의 부리 사이에서 헤엄치는 육신을 바라보았다. 제 어미가 도축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돼지처럼, 자신의 육신이 훼손되는 모습을 무력하고 혼몽하게 바라보는, 능지처참 당하는 죄수처럼. 살해자 앞의 희생자처럼. 제 목에 고양이의 희고 날카로운 이빨이 박힌 것을 느끼는 새끼 쥐처럼. 얼굴을 가로지르는 꿈의 흉터 없이, 눈동자 없이, 그러므로 감은 눈도 없이, 몸부림치는 지렁이의 미끈하고 절박한 살. 그것은 영원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비둘기는 무력하고 늙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흰 막에 감싸인 점액질의 둥근 상처. 비둘기는 상처 속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소년은 기이하게도 모욕당한 기분을 느꼈다.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소년은 울었다. 눈도 없이 흘릴 눈물도 없이 점액질로 축축한 지렁이의 육신이 비둘기의 깊은 허공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소년은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먹을 수 있어. 비둘기는 소녀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먹을 수 있어.

너는 볼 수 있어? 소년은 물었다.

그래. 손끝의 연약하고 애처로운 표정, 밤의 사체, 악몽의 절벽 밑바닥에서 경련하고 있는 빛, 나는 볼 수 있어. 내가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그것들을 볼 수 있었어.

새는 작고 징그러운 머리를 소년의 무릎에 기대었다. 미래를 향해 부서지는 물거품들. 비둘기의 입 속에서는 음탕하고 서글픈 악취가 났다. 허공에 짙게 배어 있는 인육 냄새. 타원형의 검은 달걀 같은 소년의 얼굴. 소년은 그 애의 검고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허공에 노출시킨 채 속삭였다. 난 이제 가야겠어.

비둘기 : 그래. 가기 전에 부탁 하나 해도 괜찮을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사랑의 빠진 자의 충실함으로 비둘기의 언어를 들었다.

비둘기 : 나는 보물을 찾고 있어. 이젠 그게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 그런데 나 혼자서는 그걸 찾을 수가 없어. 나를 도와줘.

비둘기는 소년에게 은밀한 애무를 가르쳐주는 연인처럼 소년을 창백한 눈짓으로 이끌었다. 비둘기는 제 가슴에 고개를 처박더니 날카롭고 지렁이의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부리로 가슴을 짓찧기 시작했다.

펜테질레아 : 자매들아. 내 귀여운 암사슴, 아킬레우스는 어디 있지?

여전사1 : 여왕이여, 가여운 우리 여왕이여, 아킬레우스는 오지 않아요. 당신이 그를 개의 입 속 장미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렸잖아요.

펜테질레아 : 뭐? 그가 없다고? 그가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그가 오지 않는다고?

여전사2 : 그는 오지 않지만 그가 더 이상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는 당신에게 있어요. (여왕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며) 당신 입술을 야릇하게 적신 피와 그보다 깊은 곳의 붉은 것.

펜테질레아 : 그래서 그가 오지 않는다고?

여전사2 : 그는 오지 않아요.

소년은 비둘기의 가슴 속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비좁은 구멍이 소년의 손뼈를 야릇하게 잡아당기며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비둘기의 차갑고 흰 기름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흐느꼈다. 꿰맨 살이 터지는 것 같은 서글픈 쾌락과 고통. 소년은 허공을 떠다니는 빛의 껍질들을 보았다. 밤의 잔여물 같은 먼지가 비둘기의 눈 위에 내려앉았고 소년은 물컹하고 미끈거리는 것을 움켜쥐었다. 과잉의, 흐느끼는, 내가 이제 무엇을 쓸 수 있을까. 눈 없는 인형 인형의 유리는 육식 식물의 입 속에서 느릿하고 절박하게 몸부림치는 파리. 소년은 허공에 가득한 인육 냄새를 맡았다. 살기 위해 소년은 인간의 언어를 배웠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소년을 원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지 살아있음이 유리전구 같은 것이라서 어디든 던져버리면 박살나버리는 것이라면 좋을 텐데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눈이 없는 인형은 눈물도 없이 흐느낀다. 그래도 소년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가고 있었다. 좋아. 계속 그렇게 가.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인간의 언어로 사랑하고 죽어가고 사랑받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기원의 진실 같은 것은 없어. 소년이 손을 빼낸 뒤에도 비둘기는 젖은 부리로 제 몸을 조금씩 뜯어내고 있었다. 언제까지 나는 인간의 언어로 아파야 하지. 어째서 나는 인간의 언어를 배운 것일까. 어째서 희미한 확신도 순종하는 검은 입도 없이 나는 점액질로 뒤덮인 타원형의 검은 머리통을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는 것일까. 대답소리 같은 것은 없어. 연푸른색 스카프로 목을 동여매고 문고리에 나를 매달면 그뿐이야. 나와 나의 시체. 나와 나의 실패. 나의 실패와 나의 시체. 그뿐이야.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삶은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간다. 훼손된 신체와 마비된 사지로 퍼렇게 부어오른 혀로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소년 : 몸을 전부 뜯어내고 나면 뭐가 남아

비둘기 : 뜯어낸 몸. 뜯어낸 몸의 조각들.

소년은 비둘기를 찢어발기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해갈되지 못한 갈망이 소년의 몸 안쪽으로 돌아가고 소년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아, 소년은 덜덜 떨면서 중얼거렸다. 슬픔의 고름이 몸의 구멍으로 분비되었다. 비둘기는 인형의 눈구멍에 부리를 처박는다. 내가 배운 언어가 뭔지 이제 나도 모르겠어. 너무 많은 한숨을 불어넣은 사과는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버릴까. 소년은 흰 벽처럼 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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