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12월 30일, i11년 3월 17-18일, i11년 3월 23일

i11년 12월 30일

그 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망각된 그 애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를 알아볼 방법을 잃어버렸기에, 네 얼굴을, 네 목소리를, 하나뿐인 네 가면을, 네 표징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너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눈을 둥글게 뭉쳐 만든 작은 공을 달을 향해 던져 본다. 눈 공은 순식간에 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 안에서 녹아내리기도 한다.

언젠가 아무도 아닌 이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어. 우리는 얼굴들의 직물 속에 들어서지 못했지만, 우리의 사지는 우리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을 훔쳐낼 수 있었어.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사라지는 현재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사명 없이 피 흘리는 작은 긍정이지. 우리의 과거는 그에 대응하는 현재를 갖고 미래는 그에게 속하는 현재를 가질 것이라 믿어.

나는 너의 죽음에게, 너의 부재와 너의 실종에 말을 걸면서 동시에 너의 생명과 너의 그림자와 너의 현존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의 부재에 대해 말하면서 나 자신의 부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언어는 언제나 나 자신의 부재에 대한 증언이었다.

결코 현재인 적 없는 미래와 언제나 잃어버린 것으로만 발견되는 우리 사이에서 떠다니고 있는 작은 백합의 거울을 믿어. 백합은 희게 부풀어오른 다리를 벌린 채 웃고 있어. 바깥으로 펼쳐지는 하얀 주름들의 은밀한 폭발 속에서 나는 나를 배반한 나의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조각들은 나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함께 했고 긴 대화를 나눴지. 허상 같은,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 언어를 우리는 서로의 귓바퀴 안쪽에 밀어넣었어. 작게 접어 놓은 꽃잎을 귓속에 넣어 놓듯이. 꽃잎은 귀 안쪽에서 펼쳐졌고 우리는 최초부터 이미 반복되고 있었던 기억 위의 텅 빈 원뿔을, 원뿔의 날카롭고 어지러운 시간을 들었어.

이미 실종된 너와 곧 실종될 나에게. 나는 네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

나는 정말, 그 애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 부서진 거울들의 천국으로 향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얀 빛의 벌레들과 거울 파편들의 날카로운 출혈로 어지러운 그곳에. 그 창백한 천국에는 내가 잃어버린 모든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i11년 3월 17일

교내 연극 대회 공고문이 붙었다. 그 애에게 연극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참가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그 애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연극 대회에 대해 말을 나누는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연극 같이 할래?”하고 물었다.

파수꾼들은 고심하였다. 나는 내가 제대로 된 주문을 외우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달은 하늘로 비상했다. 혹은 달은 테러당했다. 따위의 주문이 아니었음을. 하지만 파수꾼들은 관대하게도 나를 받아주었다.

오늘 수업이 끝난 다음에 교실에 남아서 연습을 할 거야. 자유의 첫 번째 수인(囚人)은 그렇게 말했다.

그 애와 함께 하교하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애는 내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느 친구처럼 쉬는 시간에 붙어 앉았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애가 의자를 끌어당겨 내 옆에 앉은 것이다.

그 애는 내가 최악의 배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연기는 조롱과 모욕의 희생양이 될 것이었다.(하지만 솔직히 그리 웃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훌륭한 희극 연기자조차 아니니까.)

그 애의 은밀한 예언대로 연극 연습은 그리 즐겁게 흘러가지 않았다. 수인들은 내게 빨간 모자의 연극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애들에게는 대본조차 없었다!

나는 놀랍게도-혹은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빨간 모자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수인들은 어린 새들처럼 즐겁게 키득거리며 내게 붉은 망토를 둘러 주었다. 봄의 교실은 아이들의 웃음과 체온으로 후덥지근했다. 작은 사탕 바구니를 손목에 끼우고-바구니는 날카로운 가시로 내 손목을 찔러왔다-난 교단 위로 올라가 걸었다. 그 장면이 수십 번 반복되었다. 내 걸음걸이가 빨간 모자의 경쾌한 걸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걸음은 지나치게 둔중하거나 음울하거나 과장된 희극성을 띠고 있었다.

서른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수인들은 짜증스럽게 체념하였고 늑대 역할의 아이를 교단 위로 내보냈다.

나는 멀찍이서 나를 지켜보는 늑대를 무시하며 빨간 모자가 할 법한 대사를 읊었다. 난 할머니에게 빵을 드려야 해. 할머니는 병자라서 바깥에 나올 수 없으니까 내가 할머니 집으로 가야 해. 엄마는 늑대를 조심하라고 했지. 숲에 있는 늑대는 나를 해치고 말 거라고.

늑대는 나를 향해 어기적 어기적 다가왔다. 그는 여주인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니, 아가?

나는 할머니를 보러 가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늑대는 나와 함께 가주겠다고 자상하게 말했다. 숲 속은 위험하단다. 너 같은 어린 아이는 길을 잃거나 숲의 검은 나무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거야.

난 괜찮다고 소리치고는 무대-교단-밖으로 뛰쳐나갔다.

수인들은 크게 웃으면서 교단 위로 올라가 칠판에 하얀 분필로 유리창과 나무 문을 그렸다.

난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칠판, 혹은 나무문을 두드렸다. 보라색 숄을 두른 늑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어오라고 속삭였다.

나는 복도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병든 노파를 연기하는 늑대를 연기하는 수인은 책상 두 개를 걸쳐 놓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아. 얘야. 난 좀 쓸쓸하고 배가 고프지만(이 대목에서 관객 역할의 수인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그래도 네가 찾아와 주어 기쁘단다. 나는 내가 있어 쓸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 얘야.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난 배부르단다.(이 대목에서 빵이 필요 없느냐고 물었다면 그럭저럭 볼만한 희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늑대의 병상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 할머니 발은 왜 그렇게 큰 거예요?

그건 병 때문이란다.(오, 혹은 내 그림자 때문이란다.)

할머니 손은 왜 그렇게 큰 거예요?

그것 역시 병 때문이란다. 병 때문에 나는 온 몸이 퉁퉁 불었어.

할머니 손톱은 왜 그렇게 긴가요? 그건 널 잡아먹기 위해서지!(그건 네 심장을 아프지 않게 빼내기 위해서란다.

하지만 고통 없이 자기 심장을 마주볼 수는 없어요. 응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검은 결여가 필요하니까. 나는 내 심장의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내가 심장을 잃어버렸다는 걸, 고통스럽고 쓸쓸하게 읽어내야 할 거예요. 심장의 응시는 심장의 결여에 대한 이미지와 같아요. 난 오래 전부터 내 심장을 마주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늑대는 찾아오지 않았죠.

어쩌면 내게는 심장이 없는지도 몰라요.

난 텅 빈 심장의 깃털 같은 이미지만 가지고 있고 새의 깃털로 가득 찬 가슴을 원하는 늑대는 어디에도 없는 거예요. 제발 누군가 침묵의 그물을 찢어내고 나를 구하러 오기를. 내 심장을, 내 심장의 텅 빔을 구하러 오기를. 나는 기꺼이 그에게 먹히며 나를 먹는 기쁨을 누릴 텐데. 나는 나에게 먹히는 동시에 나를 먹을 수 있을 텐데. 나는 나의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면서 동시에 나의 포식자의 심장을 어루만질 수 있을 텐데.

다들 나를 대신할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사과는 땅에 떨어져 썩어버릴 정도로 많이 열리고 신은 버려진 선악과를 돌보지 않죠. 너무 많은 짐승들이 사과를 먹었고 사과는 더 이상 죄의 상징이 아니에요. 난 죄조차도 짊어질 수 없이 붉게 버려졌어요. 할머니, 늑대는 벌써 할머니를 잡아먹었고 가득 찬 위장으로 늑대는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죠. 내가 원하는 것은 나를 응시하지 않아요. 내 안에서 나를 응시하며 수축시키는 것들은 창백한 장밋빛의 공백만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고 있어요.

나는 그만 하고 싶어. 기다리는 걸. 사랑하는 걸.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사랑했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를 끌어안지 않으며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죠.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멸종해야 나는 짐승들의 얼굴을 찾는 것을 그만둘 수 있을까. 내 안에서 들끓는 짐승들, 얼굴이 녹아내리고 붉은 머리가 울부짖는 짐승들이 보이지 않는 수렁으로 흘러내려가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검고 창백한 물거품들뿐이에요.

할머니. 나를 안아 줘요. 그 검고 긴 손톱으로 내 심장을, 심장의 빈자리를 움켜쥐어줘요. 나는 나의 사과를 먹고 싶어요. 안쪽이 검게 썩어버린 내 사과. 대체 몇 장의 유언을 적어야 죽음이 찾아올지. 대체 몇 번의 울음을 터뜨려야 삶이 찾아올지, 이제 난 모르겠어요. 할머니, 말라르메의 시구처럼 나는 모든 책을 읽어보았고 모든 장미를 뜯어냈으며 모든 향기를 맡았고 모든 시를 써버렸지만 탕진된 결여 뒤에도 삶은 찾아오지 않았죠. 죽음조차도.

할머니의 피는 달콤해 보여요. 할머니의 죽음은 감미로운 악취로 반들거리는군요. 나를 잡아먹을 것은 할머니인가요, 늑대인가요? 유령인가요 짐승인가요? 짐승의 유령인가요? 난 나의 무덤을 직접 파낼 수 없을 거예요. 엄마는 다른 빨간 모자를 찾을 거고 빨간 모자들은 망가진 새장의 비둘기처럼 도망치거나 나방처럼 불을 향해 날아들겠죠. 곧 죽을 나의 유령인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어요.)

늑대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달겨들었고 그것으로 연극 리허설은 끝났다. 수인들은 내 연기가 연극을 망쳐버렸다고 말했다. 내 소심한 발성과 어정쩡한 제스쳐 때문에 리허설이 끝날 무렵에 창 밖은 잉크처럼 검었다.

빨간 모자 연극은 크게 호응 받지 못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다른 반 애들도 비슷한 연극을 할 거라고.

그럼? 그럼 뭘 할 건데? 수인들은 물었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빨간 모자 연극은 시시해. 빨간 모자는 유머 있고 주목받는 역할이어야 하는데 네 연기는 재미가 없어. 수인은 칼날처럼 적나라하게 말했다.

난 빨간 모자 연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나 수인들은 빨간 망토가 맞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빨간 망토는 보자기처럼 넉넉했으므로 누구라도 두를 수 있었다.)수인들은 이야기를 바꾸는 데 더해 끔찍한 실패를 막기 위해 대본을 쓰는 게 좋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모든 작업은 내게 떠맡겨졌다.

이번 주 안에는 대본을 완성해야 해. 그래야 연습할 수 있을 테니까. 수인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얌전한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교문을 나서면서 나는 나를 기다리는 그 애를 상상했다. 나는 그 애의 환영과 연극 리허설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그 애의 환영은 그림자처럼 검고 부드러웠다.

내게도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고 연주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 화려하고 광폭적인 음계와 아르페지오, 균열 투성이의 음들이 검은 원뿔 위를 떠돌면서 밤의 액체 속에서 퍼져나가고 있어. 크림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그 애는 내게 보물의 익명성에 대해 말했다. 왕이 숨겨 놓은 절대반지는 녹여내어 작은 금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백만 개의 금괴들이 있는 동굴 속에서 이름을 잃고 작은 모래 알갱이처럼 되었다고. 아무도 절대반지를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그러한 방식으로 절대반지는 완벽하게 파괴되는 것이라고.

그 애의 그림자는 우리 집 현관 앞에서 미끈한 바닥 멀리 퍼져 사라졌다. 집에 들어서 의미 없는 인사를 하고 난 식탁에 앉아(그 애의 엄마도 이런 식으로 시를 쓸까?)대본 작업을 했다.

밤이 생각해 낸 대본의 줄거리는 이렇다.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딸을 유독 예뻐하던 어머니는 딸에게 그녀의 모든 보물을 상속하기로 하였다. 보물에게 보물을 상속하는 것은 어머니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가 죽고 나자, 보물의 상속자인 여자아이는 남자 형제들로부터 핍박받는다.

남자 형제들은 여자아이를 죽이고 보물을 차지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남자 형제들의 간절하고 애달픈 염원을 신은 기꺼이 들어준다. 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간곡하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신은 남자 형제들에게 여자아이를 비둘기로 만들 테니 그 틈에 여자아이를 죽이라고 속삭인다.(여자 형제를 죽이는 것은 끔찍한 범죄지만 비둘기를 살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므로. 남자 형제들은 암비둘기를 죽이고 나서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범죄의 음험한 그림자에 쫓기지도 않을 것이고 지옥에 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자아이가 암비둘기로 변한 뒤 남자 형제들은 암비둘기를 잡아 새장 속에 넣어 둔다. 남자 형제들은 유달리 희고 가녀린 암비둘기를 사랑하게 된다. 암비둘기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리로 울고 남자 형제들의 손에 자그마한 머리를 맞대며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남자 형제들은 암비둘기의 부드러운 구름 같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미소 짓는다.

어느 날 남자 형제 중 막내가 암비둘기를 손목 위에 올려 놓고 뒷마당으로 산책을 나간 사이에 암비둘기는 그녀처럼 새하얀 구름을 향해 도망치고 형제들은 암비둘기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암비둘기를 찾아 정원과 숲, 도시 곳곳을 헤매지만 암비둘기는 지나치게 많고 그들은 그들의 암비둘기를 식별할 방법이 없음을 서글프게 인정한다. 암비둘기를 알아볼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암비둘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남자 형제들은 신에게 암비둘기의 얼굴을 돌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들의 애달픈 염원을 신은 관대하게도 들어 준다. 암비둘기는 다시 그들의 여동생으로 돌아오고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그들은 정원 한 켠에서 알아본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여자아이는 원래부터 그녀의 것이었던 모든 보물을 챙겨 다른 도시로 떠난다. 남자 형제들은 새로운 암비둘기를 기르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받으며 사랑한다. 그들은 암비둘기의 얼굴들을 알아볼 수 없음을 체념하며 인정한다. 익명의 사랑과 익명의 소유와 익명의 전유와 익명의 훔쳐냄. 그들은 각자의 존재와 사랑을 얼굴 없는 새의 그림자로부터 훔쳐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본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i11년 3월 18일

밤새 꿈을 꿨다. 꿈 속에서 나는 화상에 뒤덮인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끓는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열이 났는데 어떤 목소리는 내게 물과 불의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대체 무엇을 위하여? 나는 삶을 감내하듯 화상을 감내하였다. 그것이 내 몸이었고 내가 가진 유일한 피부였으므로.

두 번째 꿈에서 나는 내 피부를 벗기는 무두장이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피부를 벗겨 달라고, 그러면 고통도 사라질 것이며 화려하고 새로운 피부로 나를 감쌀 수 있을 것이라고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이것은 Tale of Tales의 두 자매에게서 파생된 이미지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두 자매는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왕의 구애를 받지만 왕은 두 자매가 노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매는 꾀를 내어 왕과 동침하는 대신 완벽한 어둠을 요구하지만 왕은 약속을 깨고 어슴푸레한 붉은 촛불로 자매의 일그러진 주름들을 확인하고야 만다.

왕과 동침한 자매는 창문 밖으로 버려지고 왕은 그녀의 늙음을 되새기며 썩은 음식을 먹은 짐승처럼 구역질을 한다. 자매는 비참함에 울고 숲을 지나가던 검은 요정이 그녀에게 젊음을 선물한다. 집안에서 왕에게 불려간 자매를 기다리던 다른 자매는 왕비의 초대를 받고 궁정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아름다워진 자신의 언니를 발견하게 된다.

왕비가 되지 못한 자매는 쓸쓸함에 몸서리를 치며 언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아무도 그런 그녀의 곁에 함께 있어주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언니처럼 젊어질 수 있느냐는 물음에 왕비는 껍질을 벗기면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홀로 남은 자매는 질투와 외로움 때문에 제 껍질을 벗겨줄 사람을 구하러 돌아다닌다.)

그가 나의 피부를 벗기는 동안 나는 무력감과 고통에 흐느끼고 있었다. 얇은 포장지조차 없이 겉으로 드러난 속은 끔찍하게 아팠으며 나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난 연한 하늘색의 새틴 드레스를 피부 위에 걸쳤다. 아리고 붉은 속살에 부드러운 하늘빛 드레스 자락이 고통스럽게 엉겨붙어왔다. 하늘빛 드레스는 붉은 피로 물들었으며 나는 근육과 신경 위에서 버석거리는 나의 아름답고 어설픈 포장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난자를 둥글게 감싼 은박지처럼.

우리는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잃을 수 있다.

당연한 것에 대한, 삶에 대한, 고통의 경감에 대한 끔찍하고 애처로운 욕망은 죄가 아니다. 어째서 어떠한 종교는 그러한 욕망이 죄라고 하는가? 욕망은 모두 비고 처참한 결핍에 대한 것이다. 결핍이 그토록 우리를 고통스럽게 주름잡는데, 어떻게 그것을 응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언니의 왕을 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겁간해야 했다. 그의 피부를 벗기고 그의 심장에 장미의 날카롭고 긴 가시를 꽂아 넣어야 했다. 그에게 신부의 연한 흰빛의 드레스를 입혀야 했다. 버석거리는 흰빛이 그의 벗겨진 붉은 살을 감싸도록. 어째서 나는 나의 피부를 벗겼던 것일까?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은 나의 늙어빠진, 화상에 얽은 피부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소유한 것은 나의 고통과 불행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유하지 않은 것도 잃을 수 있다. 가령 내 것이 아닌 왕과 내 것이 아닌 젊음과 내 것이 아닌 영광, 내 것이 아닌 성기까지도 잃을 수 있다.

나는 꿈 속에서 왕을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꿈에서 깨어난 뒤에는 그 간절함도 점차 흐릿해져갔다.

어린 배우들은 학교에서 내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암묵적인 방식으로 이미 내가 해고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본은 쓸 것이다.

그 애는 연극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는 식으로 내게 충고하지 않았다.

나는 밤에 꾼 꿈 이야기를 그 애에게 했다.

내가 왕 역할을 해 줄까? 그럼 넌 내 피부를 벗기고 나를 강간하는 거야. 그 애는 웃으면서 말했다. 또 하고 싶은 게 있어?

난 왕의 폐에 유리 호스를 꽂아 넣고 싶다고 말했다. 그 유리 호스 내부에는 진동하는 무수한 박판들이 들어 있어서 왕이 비명을 지르거나 끙끙거리거나 신음을 흘리거나 숨을 내쉴 때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올 거라고.

그 애는 즐겁게 맞장구를 치다가 주사위로 배역을 정하자고 했다. 난 우리 둘이서 연극 대회에 나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고 그 애는 동의했다.

우리는 수업 시간 내내 벌거벗은 속살을 감쌀 새틴 드레스와 주름 투성이 노파 분장과 왕의 검은 수염과 음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i11년 3월 23일

날카롭고 하얀 배신. 수인들은 내게 대본이 완성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래.

난 하얀 비둘기와 탐욕스러운 남자 형제들에 대한 대본을 내밀었다.

좋아. 오늘부터 연습하자. 수인들이 말했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수업이 끝난 뒤 그 애는 나와 함께 피부가 벗겨진 왕과 노파의 연기를 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긴 머리의 수인은 그 애에게 내가 자기들과 함께 연극 연습을 할 거니 기다리지 말고 가라고 했다.

그 애는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저었고 그 애는 검고 느린 걸음걸이로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난 수인들과 함께 대본을 보며 배역을 나눴다. 수인들은 내게 배역을 주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여자아이가 저주를 받은 동안 변해 있던 작고 하얀 비둘기의 역할을 맡았다. 비둘기에게는 대사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나는 은밀하게 비둘기에게 사랑해, 하는 속삭임을 삽입했다. 언젠가 비둘기의 주인들이 사랑해, 라고 말하는 어린 비둘기를 버리도록. 나는 하나의 은밀하고 사소한 배신을 첨가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냈다.

미안해. 너를 배신하려던 게 아니었어. 나는 내가 해고되었다고 생각했고 내겐 내가 해고되었느냐고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어. 난 이미 첫 번째 대본을 다 썼고 뒤늦게야 그 대본이 아직 유효하다는 걸 알았는데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었겠어! 우리 둘이서 그 대본의 모든 인물들을 연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여기까지 적고 나서야 나는 그 애에게 첫 번째 대본을 보여준 적이 없음을 기억해냈다.)네가 내일부터 내게 인사하지 않을까봐 두려워. 네가 이 메일에 답장을 보내지 않을까봐 두려워. 나는 너와의 관계를 완전히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너와 관계했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죽는 순간 삶이 존재했다는 걸 깨닫는 많은 짐승들처럼. 어째서 누군가에겐 간단한 일이 내게는 이렇게 어려운 걸까? 어째서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은 우리를 끔찍하게 일그러뜨리고 고문하는 걸까? 어째서 우리는 갖지 못한 것만을 고통스럽게 욕망하는 걸까? 욕망이 영원한 결핍의 운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 모든 배신이 우습게도 난 조만간 그 애들의 연극에서 해고될지도 몰라. 연극은 내 것이 아니므로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운이 좋게 연극 무대에 오를 수도 있고 내 예상대로 중간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쫓겨날 수도 있겠지. 대본을 되찾아오고 싶지는 않아. 어떤 식으로라도 하얗고 둔중한 비둘기가 무대 위에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해할 수 있겠니?

P.S. 너를 위해 하나의 작은 실험을 준비해 봤어. 레몽 루셀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인데, 하얀 대리석 문 한가운데 쥐의 끈적이는 붉은 심장을 올려놓고 그 주위에 가장 강력한 접착제를 발라 놓는 거야. 독수리가 쥐의 심장을 찾아 달겨들기 전까지 작은 아이인 너는 문 아래쪽에 고정시켜둔 붉은 띠에 양쪽 팔을 고정시켜. 독수리가 심장을 탐하기 위해 하얀 문의 접착제 부분에 노랗고 단단한 발을 내려놓으면 그 발은 접착제에 단단히 들러붙을 거야. 그럼 작고 교활한 아이인 너는 비명을 지르면서 독수리를 놀라게 만들어. 독수리는 깜짝 놀라서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르는 거야. 비석처럼 새하얀 문에 매달린 너도 독수리와 함께 날아오르는 거지. 그 최초의 비행, 질주, 추락의 짙고 암울한 예감을 생각해 봐. 나는 진실로, 네가 기쁘기를 바라.

밤 11시 40분 경에 그 애에게서 답장이 왔다.

네 예상과 달리 나는 그리 화가 나지 않았어. 집에 와서 조금 울었지만 너 때문은 아니야. 사실 나는 어떻게 네게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난 한 번도 친구에게 화를 내 본 적이 없어. 왜냐하면 모든 분노는 언제나 넓게 퍼져서 대상 없이 축축한 허공 위를 흐르거나 모조리 내게로 되돌아왔으니까. 나는 분노와 싸움, 화해의 매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해. 그러니까 네게도 평소처럼 말을 걸 거야. 내가 울었던 건 너와 함께 연극을 하는 순간을 달콤하게 상상해왔기 때문이야. 하지만 네가 다른 애들과 함께 연극을 한다면 나와는 하지 못하겠지. 한 명의 참가자가 두 개의 무대에 동시에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네가 허락한다면 난 내가 아닌 다른 아이를 연기하며 너와의 무대에도 설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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