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3월 13일

토요일이다. 아침엔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담장을 넘어서. 자물쇠가 잠긴 교실 창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문을 위로 들어 열어젖히면 끝이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사실들은 내게 쉽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은 내게 거북스러운 표징으로 주렁주렁 매달린다. 행복해야 할 이유는 믿을 수 없이 많고 행복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나를 가죽 밑의 심연으로 몰아붙인다. 나는 나의 행복을 배반하고 나의 행복은 나를 배반한다.

교실 가장 뒷자리 책상에 앉아 감사노트에 문장들을 적어 내렸다.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 곧 죽을 것이라 감사하다. 아직 썩지 않은 사지를 가지고 있어서, 유리로 만들어지지 않은 홍채를 가지고 있어서 감사하다. 하지만 대체 누구에게 감사한단 말인가? 신에게? 삶에게? 신은 불행한 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불행한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신은 죄를 지은 아담을 창조하기 이전에 아담이 죄를 지은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나는 기만당한 아담이고 신은 처음부터 그가 원했던 죄의 세계에서 희희낙락한다. 배우들을 잃어버린 배역, 머리를 잃은 얼굴과 배반당한 모든 운명들. 노트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실제로 작년에는 참지 못하고 미술시간에 그리던 그림을 찢어버렸다. 미술교사가 내 그림에 대해 충고를 건넨 직후였고 교사는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충고를 참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만 사실 내가 참아내지 못했던 것은 표면 위를 애무하는 기만적이고 모호한 추상들이었다.

언어를 참아내야 해, 유리. 패러디들의 의미 없는 영원회귀를, 살갗이 벗겨진 발을, 허공을 헤엄치는 심장 비늘을, 실없는 미로를, 자기 실로 목을 매단 아리아드네의 맨발을 참아내야 해, 유리.

창문 밖에는 너무 많은, 보이지 않는 짐승들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감사 일기를 쓰는 전통이 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보이지 않는 입자들에, 몸에, 환경에, 우연에 감사했고 너무 많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상처받는 것들을 보지 못했다. 내가 눈 멀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동안 눈 먼 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귀 먹지 않음을 감사하는 동안 귀 먹은 자들은 무엇을 듣는가? 나는 허공을 황망히 헤매는 결여들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배곯지 않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동안 미치도록 배가 고픈 이들은 무엇을 듣는가?

나는 감사 일기가 끔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교사는 감사하도록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감사할 것들을 적어나갔다. 나는 죽음이 실재함에, 무한한 장미들을 상상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로지 그것에. 단 하나의 기적도 나를 찾아들지 않더라도 기적의 부재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죽음에게, 그리고 나의 신에게 감사합니다.

나의 신은 눈 먼 창녀다. 그녀는 연약한 검은 자궁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검은 내장이 있다. 그녀의 입은 애벌레의 뇌처럼 주름졌다. 빈 교실을 적시는 빛을 손가락으로 꼬아 묶어 두었다. 빛으로 목을 맬 수 있다면.

그 애의 책상을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책상 한 귀퉁이에 책상 밑에 있던 펜으로 메모를 적어 두었다.

주름투성이 장미는 장미를 배반하며 펼쳐지고 있다.

배우들이 사라진 무대에서, 오로지 배역들의 메마른 껍데기만이 남은 교실에서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 애의 책상 위를 매만지는 내 손가락의 입술들은 무엇을 말했던가?

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 시인이 되고 싶어.

나는 갈수록 많은 시들을 쓴다. 부패해가는 언어의 껍질들이 나를 질식해오는 것이 두렵다. 나는 숨 쉬는 법을 잊어가고 있어. 잊힌 것이 잊는 것을 붙잡는 동안 나는 숨을 멈추고 생기 없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고 있다. 오늘은 있는데 나는 없다. 그림자는 있는데 형상은 없다. 우리는 그림자들의 동굴들을 바삐 오가며 여러 색채의 그림자들을 수집하는 거야. 바깥으로 나가면 우리의 눈은 광폭한 햇빛에 멀어버릴 것이고 결국 우리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 죽음을 향해 기어가는 수밖에 없을 거야. 아니, 우리는 결코 죽음을 향해 기어갈 수 없다. 죽음은 오로지 그의 유동적이고 불가해한 의지에 따라 우리를 천천히 짓눌러 오는 것이다. 신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그의 잔혹한 무관심은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 불구가 되고 기형화되는, 일그러진 붉은 도형들이 칠판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교단 위로 올라가 검은 칠판에 달라붙은 망가진 도형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손톱 끝에서는 끔찍한 흐느낌이 울려퍼졌다. 나는 울고 있었다. 식물적인 고통이 내 손을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나는 책상들 위에 힘없이 늘어진 젖은 도형들을, 혹은 그 붉은 그림자들을 하나씩 올려놓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차라리 그곳이 법정이었으면, 차라리 내 앞에 판관이 있었으면. 차라리 나를 죄인으로 창조한 부조리한 신이 내 앞에서 웃고 있었으면. 속죄는 부조리보다 견디기 수월하다. 설령 그 속죄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더라도. 내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죄의 사체가 짊어지워졌다면 나는 세계의 악취에 집중하며 계단을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죄조차 없었다. 나를 처벌하는 손, 낙원 바깥으로 밀어내는 신의 하얀 손도 없었다. 나는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있었을 때, 나는 언젠가 내가 유괴당하고 살해당하리라는 강박적인 예감에 시달렸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나쁜 일을 당하게 될 거야. 엄마와 아빠와 오빠는 매일 내게 속삭였다. 늑대를 따라가면 안 돼. 친한 사람이라 해도 따라가면 안 돼. 너는 온몸이 꽁꽁 묶이고 입이 막히고 눈물은 네 볼 아래로 넘쳐 흘러 너를 썩게 만들고 말 거야. 우리는 결국 너를 구하지 못할 거야. 우리는 너를 잃게 될 거야. 그리고 너는 우리를 잃게 될 거야.

나는 유괴당한 공간에서 내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꿈꾸었다. 살해자는 미소 지으며 울고 있었다. 그는 내게 구해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나를 구하는 대신 살해하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 없는 거울 안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추상적인 선들이 와해되고 있었다. 그와 나는 거울 속에서 녹아내리는 우리의 얼굴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악몽 속에서 나는 죽음을 잠처럼 편안하게 여겼고 나의 살해자는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살해하고 있었으니까.

아, 이미 실종된 나의 가족과 곧 실종될 나에게 : 집요하고 창백한 내 예스들이 보이나요? 나는 모든 것을 긍정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겁에 질리고 생기 없는 입술로 나는 나의 실종과 삶에 동의했어요.

최초의 유괴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괴물을 낳는 잠과 불면증 속에서 나는 나를 죽일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교실 속에서 수런거리는 투명한 그림자들 틈에 앉아 시간을 분만하는 이름 없는 동물들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들이 분만한 무수한 시간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내 중층적이고 산발적인 규정들을 보았다. 압축적인 검음 속에서 바글대고 있던 은밀한 규칙인 술어. 내 존재의 감추어진 내용인 내 존재의 술어들을. 등뼈가 부러진 술어들은 불구의 몸으로 바즈락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도달하는 나의 술어를 흐느끼며 끌어안았다. 나는 나 자신의 생성을 닮아가는 불구의 운동이다. 나는 내 부러진 척추에 대한 무관심한 의존이다. 차라리 죄의 노예가 될 수 있다면. 차라리 그림자를 잃어버린 정오 속에 영원히 갇힐 수 있다면. 숨과 숨의 단위들은 개미 떼처럼 불어가고 나는 나의 숨 속에서 질식해가고 있다.

참지 못하고 모든 창문을 열어젖혔다. 방충망까지 열린 창문 안으로 엄지 손가락만한 말벌이 들어왔다. 해독되지 않을 암호를 갖고 도주한 전서 비둘기도 한 마리.

너는 살아 있는가?

창백한 예스.

너는 도망치고 있는가?

창백한 예스.

너는 속죄에 대한 향수로 질식하고 있는 당나귀인가?

창백한 예스. 예스, 예스, 예스, 그 모든 창백한 예스들.

나는 끔찍하게 퇴색한 긍정을 앓고 있다. 발길질과 강간과 살해에도 나는 입이 찢어질 때까지 웃으며 예스를 외칠 것이다. 나를 파괴하고 살해하는 짐승들의 검은 발이 모두 농담으로 허물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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