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4월 24-25일

i11년 4월 24일

무기도 편지도 될 수 없는 언어는 어디로 사라지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은 탈존할 수도 없는가? 도래하지 않은 과거를 나는 끔찍하게 기다리고 있어. 웃음으로 질식한 피에로 여자의 혀로 나는 유령의 시를 쓴다. 유령에게 얼굴이 있다는 말은 농담에 불과한가? 유령의 시간에도 유령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령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유령이 얼마나 존재할 수 없는지 그래서 유령이 얼마나 절박하게 존재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예컨대, 역사 교사는 말도 안 되는, 결코 승인받을 수 없는 시험지를 아이들에게 나눠주고는 빈 교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다.(적어도 시험을 치르는 모든 아이들이 그녀의 유서를 읽으리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적어도 그녀의 어떤 언어는 그녀의 몸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컨대, 한 번도 비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잿빛 비둘기는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비둘기의 날갯짓은 비둘기의 육신을 공중에 띄울 만큼 빠르지 못했다. 나는 비둘기의 깨진 두개골에서 흘러나오는 삶을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육처럼 축축하고 붉은 살.

i11년 4월 23일

1교시 수학

ii중학교 1학기 중간고사

객관식 km문항 주관식 단답형 ml문항 서술형 li문항

세 방정식 균열-보존+1=0, 균열=0, 보존=3의 그래프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를 구하시오. (풀이 과정을 모두 서술하시오.) (12점. 부분점수 있음.)

2-4. 다음을 읽고 문제를 푸시오.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이냐? 왕은 메로스를 보며 물었다. 폭군을 벌하기 위해서지요. 메로스가 대답했다. 왕은 메로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가 오래도록 기다렸다고 말했다. 이 미궁에서 오래도록, 오래도록 기다렸다고 왕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왕은 메로스에게 정말 폭군을 벌하기 위해 오직 그것을 위해 온 것이냐고 물었다. 메로스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의 길고 검은 그림자가 미궁 속에서 석양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바깥에서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제 여동생이 혼례를 올리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동생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고 나면 저도 제 숙명을 당신에게 바칠 수 있겠죠. 돌아올 거야? 정말 돌아올 거야? 왕은 어린아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메로스는 물론 그러겠다고, 사흘의 말미만을 주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사흘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영혼이 담긴 사진을 찢어버려도 좋다고 말했다. 왕은 메로스가 건넨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서 메로스는 검게 그을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사진을 찢어버리면 제 영혼도 찢길 것입니다. 이곳에 담긴 영혼을 저는 세리눈티우스라고 부르지요. 제가 사흘 안에 오지 않으면 제 영혼을 찢어버리세요. 메로스가 미궁을 나설 동안 왕은 날카롭고 깊다란 벽이 그를 삼켜버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왕은 메로스의 사진과 함께 그를 기다렸다. 세리눈티우스는 말 없이 침착하게 메로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미궁 깊은 곳에서는 시간을 확인할 방법조차 없었다. 왕은 언제나와 같이 기다렸다. 미궁의 벽에 머리를 짓찧어가며. 어린시절부터 그는 기다려왔다. 기적처럼 찾아와 그를 벌할 사형집행인.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를 벌한 사형집행인은 그를 처형하지 않았다. 각각의 삶들은 그들의 사형집행인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각자의 영원만큼.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왕위와 미궁을 물려주기 전에 속삭였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단다 아가 죽어가면서도 나는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단다 멈출 수 없었단다. 간혹 길을 잃어 미궁 속에 들어온 자들은 나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곤 했지.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쫓았지만 그들을 잡을 수는 없었단다. 그들을 잡더라도 그들은 나를 찾지 못했을 거야. 아가 아가 너도 기다리겠지 너도 죽어가면서도 기다림을 멈출 수 없겠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운명은 죽음이 아닌 기다림일지도 모르겠구나. 왕은 기다렸다. 그림자가 길어지며 사라지는 시간을. 왕은 세고 세고 세고 또 세었다. 왕은 세리눈티우스가 웃는 것을 보았다. 메로스는 오고 있을까? 그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그의 마을은 얼마나 멀리 있지? 그의 여동생이 혼인을 할 때 웨딩 카페트를 가장 천천히 걸어가는 시간은 얼마나 오래 걸리지? 그의 여동생의 발걸음과 여동생의 신랑의 발걸음이 얼마나 오래? 발걸음과 발걸음이 마주치고 도달하는 시간은 얼마나 오래? 입맞춤까지의 시간은? 그의 여동생이 이미 죽었다면? 죽은 여자가 결혼을 하는 데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혹은 여동생의 신랑이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여동생의 죽은 신랑이 여동생의 몸 속으로 도착하고 그들이 마침내 육체 깊은 곳에서 마주하고 죽은 남자가 여자의 몸 속에서 여자에게 마지막 전언을 전하는 시간은 얼마나? 그가 죽은 이들이 서로를 초혼하는 모습을 보며 검은 축하주를 마시고 잠든 것은 아닐까? 그가 도적을 만나 영원히 잠든다면 그럼 그가 여기 돌아오는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도적이 그의 심장을 부수고 그의 목을 자른다면 그의 머리가 여기 도착하는 시간은 얼마나?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급류가 그의 몸을 휩쓸어가면 그가 물살을 거슬러 이곳까지 오는 데는 얼마나 걸리지? 익사한 사람은 얼마나 천천히 헤엄치지? 왕은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사진을 찢어버릴 때가 다가왔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찢어버릴 수 없었다. 왕은 기다림이 그의 유일한 숙명임을 알고 있었다. 왕은 찢어버릴 수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모든 미래를, 그는 도저히 찢어버릴 수 없었다.

미궁으로 돌아온 메로스는 죽은 왕을 보았다. 잘린 혀에서 피가 흘러내려 신부복처럼 흰 왕의 예복을 붉게 적시고 있었지만 그의 사진은 찢기지 않았다. 왕의 피가 상처 없는 사진을 출혈처럼 붉게 적시고 있었다. 메로스는 왕을 위해 준비한 단검을 미궁 바닥에 내려놓았다.

2. 메로스가 도착할 때까지 걸린 시간을 구하시오. (단답형. 5점. 부분점수 없음.)

3. 미궁의 벽들의 직경을 모두 합친 값과 벽들의 면적을 포함한 미궁의 전체 면적을 구하시오. (단답형. 10점. 부분점수 있음.)

4. 메로스가 달린 거리를 구하시오. (풀이과정을 모두 서술하시오. 15점. 부분점수 있음.)

5. 그림에서 선분 기억미래의 길이는 얼음피라미드cm, 선분 탄도학적삶고해성사의 길이는 장미스핑크스cm, 선분 개들탄도학적 삶의 길이는 빙산cm이며 점 기억은 직각삼각형 △고해성사개들탄도학적 삶의 내심일 때, △고해성사개들탄도학적 삶의 내접원의 반지름의 길이를 구하시오. (풀이과정을 모두 서술하시오. 20점. 부분점수 있음.)

6. 개들을 위한 고해신부가 없으며 핏방울의 조각들이 빙산에 갇힌 배에 부딪히며 장미모양을 이룰 때, 펜이 날개처럼 활보하는 공간의 넓이를 구하시오.(풀이과정을 모두 서술하시오. 12점. 부분점수 있음.)

7. 다음은 어느 정신병원의 진료표이다.

이들의 나이를 모두 합친 값이 태아의 목을 감싼 목걸이의 길이 xcm의 x와 같을 때, 나이와 욕망 사이의 관계를 비례식으로 표현하시오. (풀이과정을 모두 쓸 것. 30점. 부분점수 있음.)

8. 식물과 균류팀이 세 번 시합을 하여 먼저 두 번 이기는 팀이 우승한다고 한다. 식물팀의 승률이 0.7이라 할 때, 세 번째 시합에서 식물팀이 우승할 확률은?(단, 비기는 경우는 없다.)(4점)

① 0.214

② 0.22

③ 0.314

④ 0.294

⑤ 0.318

9-10. 능동적인 사람들과 고통하는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과 수동적인 사람들과 웃는 사람들에게 죽은 자들을 위한 사탕과 산 사람을 위한 사탕을 그들의 욕망대로 나누어준다고 하자.

9. 고통하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한 사탕과 산 사람을 위한 사탕을 모두 받게 될 확률을 구하시오.(풀이과정을 모두 서술하시오. 25점. 부분점수 있음.)

10. 지문이 묻은 사탕과 녹지 않은 사탕을 더한 개수는?(5점)

① 죽은 자들과 죽지 않은 자들을 더한 수

② 모든 사탕의 이미지의 개수

③ 모든 사탕의 개수

④ 0개

⑤ 구할 수 없음.

시험이 끝나고서 그 애와 답을 맞춰보았다. 우리의 답은 공란을 제외하면 단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그 애는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읽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또한 내게만 읽혔던 문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앞으로 읽을 수 있을 것들과 읽을 수 없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a년 4월 23일

식물처럼 자라나는 먼지, 불과 물이 그녀에게 강요하는 시간, 화단에서 우글거리는 어린 벌레들, 날마다 길어졌다가 짧아지기를 반복하는 그림자,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미치게 받아들인다.

빈집, 그가 돌아와 집에 있을 때도 그녀는 이미 부재하는 그를 보았다. 왜냐하면 그는 곧 나갈 테니까. 그리고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두려움에 시달리는지 그가 안다면 그는 결코 집을 나서지 못할 것이다. 사물들의 그림자와 함께 남은 채 그녀는 그녀의 부드러운 눈에 부딪히는 날카로운 빛의 조각들을 견딘다. 그가 바깥에 남아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 그녀는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변화하는 집안에서 변화에 헛되이 저항하며 시간을 견딘다. 창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림자는 불과 음식은 썩어가는 고기의 냄새는 언제나 그 자리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 여기. 그녀는 그녀 자신을 반복하며 숨막히게 불어나는 여기를 견딘다.

그가 없는 시간 그녀는 불어가는 먼지들을 쓸어내며 여기를 보존한다. 그녀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여기. 행복은 있으나 환희는 없는 여기. 그녀는 그녀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녀는 그녀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녀는 굶주리지 않았고 멀쩡히 작동하는 사지가 있고 병들지 않았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있지도 않고 강간당하지도 않았고 목이 잘리지도 않았으므로 그녀는 행복하다. 그녀는 행복에 감사하는 법도 배웠다. 불행하지 않기에 행복하다 행복하기에 감사하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했다. 그녀는 그녀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달리고 싶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을, 가장 천박하고 위험스러운 곳을, 사람들이 그녀에게 결코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검은 숲을 그녀는 미쳐버린 맨다리로 뛰고 싶었다. 심장이 터지고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릴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구원할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때까지.

집에서, 부드러운 흰빛을 간직한 장미처럼 그를, 그림자를, 변화와 그에 대한 저항을 묵묵히 기다리며, 견뎌내며 그녀는 행복이 깨져버리기를 은밀하게 기도한다. 검은 숲이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 그녀를 그토록 두렵게 만들었던 검은 이파리들, 악몽을 붉게 물들이던 삐에로의 미소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녀는. 검은 숲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그녀는 기꺼이 달릴 것이다. 익사한 벌레들이 젖은 날개로 부유하는 더러운 물웅덩이에 입을 맞추고 그 속에 뛰어들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디? 여기, 영원히 안전하고 행복한 사막에는 출혈하는 미소도 오염된 물도 없었다. 그녀를 피폭시킬 하얀 물 같은 건.

그녀는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림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 아이처럼 그녀는 기다린다. 어린시절에는 부모를 자라나서는 남자를 그녀는 기다린다 기다린다. 식물의 이파리가 서서히 돋아나는 것을 그녀는 온종일 지켜본다. 컵 위에 먼지가 내려앉는 모습을 그녀는 지켜본다. 지켜본다. 그녀는 시계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둥근 시계 안에 가두어진 초침 분침 시침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움직이지만 돌아온다 그것은 결코 일정한 시간의 각도를 원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시계가 원이라는 사실을 360도는 영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의 기다림이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아무리 기다려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변화마저 반복된다는 것을 그녀는 발견했다.

그녀는 시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기침했다. 초침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녀는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초침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그녀는 비명을 지를 작정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비명을 멈췄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침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변화는 여전히 원형의 반복 내부에 속해 있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왜 비명을 지르냐고 묻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비명을 질러도 소용없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 그녀가 하지 못한 일을 보여주는 침묵.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다만 사물들의 지긋지긋한 출현, 그녀가 외우고 외우고 외워서 이제는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그 모든 출현만이 대답으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그녀는 생각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검은 숲에서 검은 우주에서 붉은 별 위에서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에서 죽고 싶어. 이 지긋지긋한 침묵 속에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나 어떻게? 그녀는 다른 곳을 알지 못하는데 다른 곳에 갈 방법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다른 곳에서? 그녀는 시계를 응시하며 초를 세기 시작했다. ‘신의배신’은 2초 ‘영원한아이’는 3초 ‘날개잘린새가갇힌창’은 5초. 그녀는 작은 것들, 지나치게 작은 것들, 미세하고 지겨운 것들을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몸을 넘쳐 흘렀고 부풀어오르는 젖처럼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하렘의 여자들이 장미향수와 비단 드레스를 사랑하듯 그녀는 말 없이 솟아오르는 식물의 변화를, 그 미미하고 확실한 대답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녀가 더 위험하고 검은 곳에 갈 수 있다면 그녀는 그토록 미미하고 안전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를 죽이지 않는 것들이 그녀를 죽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사랑은 그녀에게 끔찍한 모욕을 주었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 그녀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감사를 사랑했고 행복을 사랑했으나 그녀는 결코 행복과 감사와 안전을 원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원형과 시계초침의 부드러운 째깍거림을 사랑했으나, 새들의 조곤거리는 지저귐을 사랑했으나, 그녀는 그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이 좁은 실내에서 그녀의 사랑은 짙은 체취로 번져가고 그녀는 숨이 막힌다. 그녀가 사랑하는 인형들과 수를 놓은 부드러운 천들. 그녀가 인형들의 볼 위에 검은 눈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남자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 그녀는 그가 인형들의 눈물을 보지 못하리라고는 감히 의심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인형들을 보고 있었으므로 인형들의 끔찍한 변화를 그가 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보지 못했다. 그는 인형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인형들의 변화를 눈치채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안에 속해 있지 않았으니까. 그는 인형들의 배치와 인형들의 얼굴과 인형들의 잔혹한 부동성에 예속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는 인형보다 훨씬 위험하고 불명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작들에 속해 있었으니까.

인형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그녀가 흐느끼며 남자에게 말했을 때, 남자는 그제야 인형들의 눈물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인형들이 처음부터 그랬느냐고 그는 어린아이를 혼내듯 말했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는 교사였고 여자는 학생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것이 단순한 배역일 뿐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심각하지 않았고 시침과 분침이 이루는 각도가 변하고 나면 그는 곧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배역을 바꾸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교사이고 여자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아이의 역할을 학습해왔고 지금도 이전과 같은 배역만 연기할 수 있었다. 그가 바깥에서 수많은 역할들을 연습할 동안 그녀는 언제나 아이의, 학생의 역할만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눈물로 여자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그는 여자의 날개를 잘라 놓고 여자가 날지 못한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대체 왜 우는 거야? 그는 단단하게 경직된 얼굴을 여자에게 무기처럼 들이밀며 말했다. 울지 마.

그러나 여자에게 우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그였다. 여자는 우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고 우는 것 이외에는.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곧 그가 사라지고 나면 그녀의 비명과 울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자를 말리고 혼내기 위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는 홀로 남아 계속 울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이가,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사라질 수 있는 이가 그녀였다면. 여기를 견딜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녀에게는 바깥이, 대안이 없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여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깨어나면서, 그녀는 그녀가 절망적으로 안전한 여기에 속해 있음을 알았다. 여기 여기 여기 여기 눈을 뜰 때마다 그녀는 조금도 낯설지 않은 여기였다. 그가 그녀에게 질려 다른 몸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여기, 여기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관통하는 초침을 상상했다. 초침으로 찢어진 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걱정과 죽음과 삶과 꿈과 망상으로 잠식된 부엌에서 사물들은 살해당한 원의 주검을 멍하니 목격하고 있다. 그녀는 맨손으로 화분의 이파리들을 쥐어뜯었다. 투명하고 미끈미끈한 체액이 그녀의 손을 적셨다. 그녀는 끔찍한 구역감을 느끼며 식물들을, 살아 있는 손들을 찢어발겼다. 그러나

그 난장을 치워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 그녀가 살해한 식물들의 주검을 쓸어담아 정리해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그녀의 범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범죄의 빈자리도 범죄의 난장도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모든 변화의 흔적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가 변화 속에 몸을 담그고 잠든다고 해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곳의 변화는 너무나 미미하니까. 그녀가 부엌에서 갖는 악의, 행위도 미래도 없는 악의마저 그녀를 그에게 예속시켰다. 그녀는 힘겹게, 그로부터 악의를 떼어내야 했다. 냄비와 옷과 다리미와 식기와 소파와 베개와 인형과 식물과 먼지에 들러붙어 있는 사랑과 악의의 신경다발들을 고통스럽게 떼어내야 했다. 감정의 신경을 사물로부터 떼어낼 때마다 그녀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아픔과 공허에 시달려야 했다. 상실감이 그녀를 덮쳐왔지만 그녀는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공중을 떠다니는 너덜너덜한 감정의 촉수들이 더 이상 어떤 사물에도 들러붙어 있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그녀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바랄 수 있을 때까지. 다른 곳에, 형체도 촉감도 없는 심지어는 존재조차 없는 다른 곳에 그녀가 사랑을 바칠 수 있을 때까지. 눈물로 멀어버린 눈으로 그녀는 불타는 장미, 출혈하는 장미의 미래를 바라보려 했다. 미래를 보기 위해, 여기가 아니기 위해 그녀는 신을 배신하고 기도를 배신하고 남자를 배신하고 과거를 배신하고 낙원을 배신하고 아버지를 배신하고 역할을 배신하고 행복을 배신하고 삶을 배신해야 했다. 그 모든 배신과 고통 끝에도 그녀는 희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곳에 도저히 다다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곳의 시간을 셈하는 언어들을 상상하는 일뿐이었다. 잘린 날개를 도둑들의 손목에 꿰매어 주고 그들이 미래를 불가능을 훔쳐내는 것을 절망적으로 견디는 일뿐이었다. 그동안 감정의 신경들은 그녀의 장소에 그녀의 사물들에 창문 밖에 비친 종이조각 같은 달과 테이블 위의 흠집과 파리의 날개와 화초의 낙엽과 전자레인지의 얼룩에 악착같이 들러붙었고 그녀는 맨손으로 그 모든 전선들을 수천 수만 번 뽑아내었다. 행복을, 삶을, 악의와 자애를 포기하고 냉동고처럼 차가운 우주에 내던져진 먼지처럼 부유하며 그녀는. 미래조차 그녀를 끌어당기지 않는 눈 먼 허공에서 그녀는. 신조차 그녀를 초대하지 않는 무신론적 우주에서 그녀는. 안착하지 못한 채 부풀어가는 무한한 걱정과 메슥거림과 현기증과 고통과 절망, 그녀는 아직 미래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과거도 아니었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음으로 그녀는 행복에 저항했다. 행복하지 않은 언어로 그녀는 행복을 배신했다. 음험하고 절박한 배신은 그녀가 지닌 유일한 언어였다. 침묵을 배신하는 비명, 불감을 배신하는 고통, 눈 멂을 배신하는 응시, 응시를 배신하는 눈 멂, 죽음을 배신하는 살아있음. 그것으로 좋은가? 아니. 물론 그녀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녀에게 불가능한 것들, 대화와 되돌아오는 눈빛과 단단하고 구체적인 상징들을 요구하였다. 그녀는 아이의 배역이 지긋지긋했다. 집안에 홀로 남아 곧 사라질 그가 돌아오기를 얌전히 기다리는 역할. 대체 언제까지 여자는 삶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i11년 4월 25일

엘리자베트는 바짝 마른 빵들을 그녀의 옷 속에 넣고 걸었다. 언젠가 신은 빵이 그의 살이라고 했다. 수녀들은 그녀가 신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손이라고 했다. 여기 신의 정결한 손이 걷는다. 신의 손이 신의 살점을 숨기고 걷는다. 신의 손-여자는 오랜 굶주림으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빵의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가 그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것이 더욱 깊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그녀의 내장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그러나 그녀는 꿋꿋이 걸었다. 그녀는 거친 손으로 빵 조각을 떼어 걸인들에게 내밀어야 했다. 그것이 그녀의 사명이었다. 그것이 신의 의지였다.

더러운 시장에는 길 잃은 벌레처럼 비척거리는 사람과 짐승들이 넘쳐났다. 수도원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지칠대로 지친 여자는 더러운 물웅덩이가 고여 있는 시장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푸른 먼지가 앉은 사과들 뒤에서 늙은 여자가 엘리자베트를 흘겨보았다. 사물처럼 무심한, 그러나 축축한 눈들.

엘리자베트는 그녀에게 혹시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늙은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다시 더러운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건너편에는 여전히 늙은 무기질의 시선.

안녕하세요. 그녀는 다시 인사했다. 혹시 배가 고프신가요?

그녀 앞에 서 있던 남자는 키가 크지만 끔찍하게 마른 노인이었다. 해골처럼 앙상한 그의 얼굴, 늘어진 가죽을 엘리자베트는 연민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래 배가 고파 끔찍하게 고파, 하고 그는 말했다. 너는 아름답군.

그는 엘리자베트 앞에 쭈그려 앉으며 기묘한 선언조로 말했다. 너는 아름다워. 그리고 젊군. 정말 젊어.

빵을 좀 드릴까요? 엘리자베트는 미소지으며 물었다.

남자는 중얼거렸다 너는 아름다워 그리고 젊어 그리고 빵을 가졌어 내게 빵을 주겠다고.

엘리자베트는 대답했다. 그래요. 빵을 드릴게요. 하지만 이건 제 빵이 아니에요. 이건 신이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건네라고 제게 맡겨 놓은 거죠. 그러니 이 빵은 처음부터 당신 거예요. 자, 신이 당신에게 건네는 선물이에요.

엘리자베트가 안간힘을 쓰며 단단한 빵조각을 떼내는 동안 남자는 중얼거렸다. 아름답고 젊고 빵을 가진 네가 내게 빵을 주겠다고.

아니요. 엘리자베트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제가 당신에게 빵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이건 처음부터 신이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고 제가 신을 대신해 이걸 당신에게 전달하는 것뿐이에요.

신이 그렇게 말했어? 남자가 엘리자베트에게 물었다. 남자의 해골 같은 얼굴이 깊이 일그러졌다.

신이 네게 그렇게 말했어?

그래요. 엘리자베트가 속삭였다. 내가 잠들 때 신은 언제나 내게 그렇게 말씀하시죠. 너는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게 내 뜻이니.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나는 대답해요.

남자는 덜덜 떨며 여자의 둥근 어깨를 움켜쥐었다. 앙상한 손이 여자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신이 네게 말한다고 신이 네 아버지라고? 그래 그랬군. 아름답고 젊고 빵을 가진 여자야 내겐 빵이 필요 없어. 빵은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어.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거칠게 주무르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여자의 옷에서 빵이 떨어졌다. 시궁창에 빠진 더러운 빵. 쥐들과 바퀴벌레들의 양식이 될 빵. 빈궁한 짐승들의 자식들을 먹여살릴 빵. 가장 여리고 더러운 이빨들이 신의 흰 살을 물어뜯을 것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의 몸 속에 사정하는 동안 여자는 생각했다. 이것은 신의 의지인가? 남자가 가느다란 팔과 주먹으로 여자의 뺨을 내리치는 동안 여자는 생각했다. 빌어먹을 년 네가 가진 걸 전부 내놔 네 부드러운 가죽과 하얀 얼굴 자비와 꿈 네 아버지까지 전부 내놔 줄 거라면 전부 내놔 빵 같은 건 필요 없어.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주름진 얼굴을 붙이고 흐느꼈다. 여자는 깊은 구역감에 기침했다. 엘리자베트는 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 깊은 용서? 더 깊은 자비? 더 깊은 사랑? 신은 그녀가 신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그녀는 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의 자랑스러운 손에 불과했다.

여자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누운 채로 구토를 하자 늙은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때렸다. 남자는 마치 그가 강간당한 것처럼 울었다. 빌어먹을 년 빌어먹을 년 네가 뭔데 내게 빵을 줘 빌어먹을 년 내가 신을 기도할 때 너희 빌어먹을 년놈들이 어디 있었는지 말해 봐 내가 기도할 때마다 그는 내게 가장 나쁜 것을 줬지 그 빌어먹을 새끼는 내가 기도할 때마다 나를 비웃었어 내가 기도하는 것을 멈출 때까지 내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내 운명을 붉은 고깃덩이처럼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고 마구 짓이겨댔어 그런데 이제 와서 이 빵이 내 것이었다고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고 그런데 왜 이제 온 거야 내 빵을 왜 이제야 가져 온거야 이런 건 필요 없어 필요 없어 이제 필요 없어.

늙은 남자는 여자의 안에 몸의 일부를 파묻은 채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여자는 구원을 찾아 헤매는 신자처럼 사과 무더기 뒤 늙은 여자의 사물 같은 눈동자를 찾아 헤맸다. 늙은 여자는 엘리자베트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그 젖은 눈동자를 여자는 필사적으로 응시했다.

헐떡거림, 구토, 흐느낌, 비명.

엘리자베트는 끈적거리고 더러운 체액과 공포의 웅덩이 속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마비된 것처럼.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대체 무엇을 그녀는 살아남으려 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 것일까? 늙은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선 뒤 엘리자베트의 하얀 젖은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엘리자베트는 늙은 남자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신음조차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죄를 범한 것일까? 그녀의 허벅다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콧물 같은 체액과 피가 그녀의 죄인가? 콘라트는, 남편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겠지. 내가 경고했잖아. 빌어먹을 빈민굴을 함부로 돌아다니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난 미리 경고했어. 그런데도 그곳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것은 네가 기어코 그곳에 갔기 때문이야. 네가 미쳤기 때문에 네가 죽은 거야.

그녀는 신의 뜻대로 이곳에 왔을 뿐인데, 그것은 그녀의 죄인가? 신의 뜻에 응한 것이, 신이 원한 대로 한 것이 그녀의 죄인가?

그녀는 죽은 물고기처럼 하얗게 떠가는 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여자는 경악스럽게도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시간이 더 흐른 뒤에도 그녀가 죽지 않을 것임을, 그녀가 살해당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저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개처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일어섰다. 신의 살은 시궁창에 처박혔고 냄새나는 짐승들의 양식이 될 것이다. 신이 그의 살을 시궁창에 내버렸고 그녀가 강간당하도록 만들었다면, 신이 그녀를 강간하고 살해하려 했다면 그러나 그녀가 끝내 살아남았다면, 그녀는 신의 의지 없이도 걸을 수 있을까?

여자는 처음으로 일어섰다. 구역질나는 경이와 함께. 왜냐하면 그녀는 이곳에서 죽었으니까. 그녀는 이곳에서 죽었어야 했으니까. 그녀는 강간당했고 그녀는 더 이상 정결하지 않았고 그녀는 죄인이었고 그녀는 천국에 가지 못할 테고 그녀는 신으로부터 버려진 것이 틀림없는데도 그녀는 살아 있었으니까. 그녀는 살아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웃었다. 그녀의 하얀 옷을 더럽힌 붉은 얼룩이 장미처럼 보였다. 신의 메마른 살이 붉게 젖은 장미로 변하는 기적, 그것은 신이 아닌 그녀의 기적이었다. 이 미칠 듯한 고통은 신이 아닌 그녀의 아픔이었다. 찢어진 몸의 수난 역시 신이 아닌 그녀의 것이었다. 여자의 장미는 여자의 것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선물받지 않은, 여자의 생명이 피워낸 여자의 장미. 그 끔찍하고 절망적인 미래는 여자의 것이었다. 여자의 것. 여자의 것. 장미로 변한 빵을, 더 이상 빵이 아닌 것을 품고 그녀는 걸었다. 용서도 증오도 없이. 사물처럼 무감하고 젖은 늙은 여자의 거울 같은 응시가 그녀의 발걸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i11년 4월 25일

사물들의 뼈를 자르는 기계들의 흐느낌. 나와 그들은 도살될 날을 받지 못한 짐승들이다. 언어의 길들임 속에서 나는 공허하다. 공허 바깥을 나는 알지 못한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그리고 정결한 새들 중 가장 정결한 것들을 바친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어? 살려줘요 혹은 내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혹은 무성의 천사들은 달콤한 화살을 쏘아 우리의 가슴을 찢어놓지.

순수를 잃은 아이는 무력하게 흐느낀다. 내 감성과 내 죽음과 내 존재 그것들이 나를 찢어놓고 있어요. 햇살의 날개와 비의 침묵 오후의 적요 엄마 품의 편안함 그런 것들이 나를 찢어발기고 있어요.

기계가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지만 주위는 적요하다. 다른 아이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자살조차도 이곳에서는 상스럽고 만연한 증상이다.

여자야, 나는 내 환희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어 나는 내가 없는 자리를 보고 있어. 어린 새가 중얼거린다. 단 위에서, 새는 더러운 잿빛이다. 작고 연약한 머리, 그것이 작을수록 그것이 연약할수록 우리는 그것이 더 징그럽다고 말한다.

오빠가 그의 제단에 무엇을 바치려 했는지 나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릴 적 오빠는 지나치게 자폐적이었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홀로 중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집 바깥에 있을 때는 누군가 오빠에게 말을 걸어도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 오빠 병신이야?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귀여운 양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내게 물었지. 천사가 되기 위해 자살하는 아이들. 죽음에 실패하는 아이들. 오빠는 그런 아이였다. 오빠는 실패했고 실패를 믿었고 그곳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고 타조들이 제 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제단 위의 어린 새를 사랑했고 실패자의 역할을 떠맡는 수밖에 없었지.

나는 오빠와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방랑자의 역할을 택할 수 있었을지 이해할 수 없다.

너희 오빠 병신이야? 하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순간 나는 자폐가 아님의 공모자였어. 오빠, 내가 그 칼을 삼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토해낼 수 없는 거라면 나는 목구멍이 없는 유령의 침실에 들어갈 수 없는 걸까. 내가 죽었을 때 그들은 내 머리맡에서 부채질을 해 주었지. 내 장미를 적신 불이 더 멀리까지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불은 순식간에 꺼졌어. 재조차 남기지 않고. 그들은 실망해서 멀리 사라져버렸지. 혹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지도 몰라. 내 재와 내 아름다운 좌표와 내가 없는 도시들.

오빠가 있는 자리에는 내가 없어 우리가 각각 존재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있는 자리에는 내가 아닌 것이 있지 않고 내가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 내 안에는 내가 아닌 것들만이 있어.

오빠는 인형의 머리카락을 자르듯이 문구용 가위로 내 혀를 잘라주려고 했는데. 오빠는 두 개의 뭉툭한 손가락으로 내 혀를 끄집어내고 그 안쪽에서부터 벌려진 가위의 틈을 밀어넣었지. 살이 틈과 마찰할 때 살에서는 장미처럼 붉은 피가 쏟아져내렸고 나는 비명을 질렀어.

오빠, 내 혀는 잘리기에는 너무나 두툼했어. 비에 부풀어오른 대지처럼. 결국 나는 잘리지 않았고 내 혀도 잘리지 않았고 여기 이렇게 남아 있는 건 보존제 없이 지나치게 천천히 부패해가는 살. 여기 내 유일한 자리에 앉아 나는 나를 둘러싼 살이 모두 녹아내리기를 기다린다. 흐느낌이 흐느낌으로 잘려나가는 도살장에서. 내가 얼마나 존재했는지 내가 얼마나 토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믿지 못할 거야. 나는 모든 날숨을 구토했지. 한 조각의 영혼도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안구를 감싸고 있는 푹신한 근육에 함몰된 바늘을 뽑아내듯.

핀셋으로 눈을 집고 훼손된 물리적 상처에 맺힌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오이디푸스는 안티고네를 남겨두고 길을 떠나네. 내 몸을 구성하던 낱낱의 언어들이 모두 휘발되어 사라지고 의지할만한 추억의 영토조차 없는 곳에서 나는 나에게 할당된 좌표를 멍하게 응시하고 있다. 순수한 잔인함으로 빛나는 아이들의 천진한 손이 내 뜬 눈에 비비탄 총알을 처박고 난 뒤에도 내 이미지의 생애는 끝장나지 않았지. 내가 토한 것을 손가락으로 긁어모아 삼키면서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지 않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걸.

배신감과 황망함에 덜덜 떠는 안티고네의 창백한 얼굴을 눈 먼 남자는 보지 못했네. 죽은 새는 흙탕물의 급류 위에 떠내려간 노아의 제국을 보지 못했네. 우리가 방랑하지 않는 동안에도 사막은 방랑하고 있었지. 사진들을 잘라 붙인다. 오이디푸스의 얼굴과 여호와의 얼굴과 노아의 얼굴과 메데이아의 얼굴과 내 개의 얼굴과 암비둘기의 얼굴 조각들을 잘라 심연의 머리 위에 종기처럼 붙인다. 지치지도 않고 번져가는 종기들이 도달하고 싶었던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passion of passivity or passivity of passion

눈 위에 눈의 조각들을 오려 붙인다 그것은 얼룩이고 악성 종양이고 염증이고 궤양일 테지 가장 역겨운 것이 보여주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어. 불행하자 신들이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는 달콤한 지옥 속에서 신들은 교미하고 있다 그들이 이상적인 나락을 낳는 동안 나는 마비된 어린 몸으로 그들의 체액 깊은 곳에 빠져 익사했지.

오빠는 떠났고 엄마와 아빠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그들이 두고 간 목소리들이 날마다 나를 깨운다. 학교에 가야 해. 학교에 가서 아직 도축되지 않은 몸들을 봐야 해. 왜냐하면 너는 학생이니까. 더 이상 학생이 아닐 때까지 너는 학생이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너는 학생이니까 학교에는 네 책상과 네 의자와 네 사물함과 네 자리가 있단다. 출석부에도 물론 네 이름이 있지. 담임교사는 네 이름을 부르지 않지만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그 빈 공간에는 네 이름이 있어. 장담할 수 있단다. 그러니 학교에 가. 더 이상 학생이 아닐 때까지 학교에서 살고 학교에서 실패하고 학교에서 죽고 다시 학교에서 살렴.

그러나 사실 나는 학생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나는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내가 내 안의 가장 깊고 위험스러운 곳으로 탈존할 때 내 언어의 유령들은 불면한다. 그들은 깨어서 날개 잃은 암벌처럼 속삭이지만 결코 나를 돕지는 않는다.

사물함 속에 들어 있는 한 쌍의 문구용 가위. 색종이를 오려낸 가위 집요하게 날아와 박히는 가위 난해하게 더 난해하게 죽은 가위가 살아 있는 개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배역을 맡을 수 있을까? 지배하는 노예의 역할을, 찢는 이빨이 달린 개의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삽입 없는 애무의 다발들. 어딘가에는 삶이 있을 것이라고 나들은 믿었지.

붉은 파스텔을 들고 손목 위에 벅벅 칠한다.

파스텔의 분진이 날린다. 하루가 끝나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소요되는 걸까? 학교에서 그리고 학교 바깥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죽음들을 잉태해야 하는 걸까? 창가에 오려 붙인 달의 조각을 보며 글을 쓴다.

내 귓불을 물어뜯는 입술들. 나는 태어난 적 없이 죽어버렸네. 다음 문장을 번역하시오. 사물함에 버려진 입술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문구용 가위의 구멍 두 개, 손가락 없이 남아 있는 두 개의 구멍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나의 유서가 끝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삶이 죽음들을 맞이할까. 나는 말을 하고 싶었어. 말을 해서 닿고 싶었어. 붉게 칠한 아름다운 칼날들을 삼키기를 원했어. 내장에 언어의 단면들이 파묻히기를 바랐어. 혈관을 떠도는 염증이 나를 죽이기를 원했어. 짙은 냄새를 풍기는 언어의 배아들을 품고 살기를 원했어. 삶과 죽음의 변증법 가상과 현실의 변증법 꿈과 잠의 변증법 설마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말하진 않겠지. 무엇인가 있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이렇게 아팠던 거지. 이렇게 많이 죽을 수 있었던 건 무엇인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잖아.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줘. 제발.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너희는 나만큼이나 존재하지 않으니까.

엄마, 가끔 나는 오빠랑 엄마랑 아빠 세 명이 내 생일 파티를 해주려고 냉동실에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나는 아직도 냉동실을 열지 않고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생일들 그 날들 중에 언젠가 엄마랑 오빠랑 아빠가 하얀 냉동실 문을 열고 나오는 거야.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면서. 내가 죽기 전에 이 지긋지긋한 사라짐이 사라지기를 바라. 천사들이 색색의 풍선들을 촛불처럼 불어 끄고 큐피드의 납화살은 천사들의 부풀어오른 볼을 쏘아 맞추고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던 돼지 방광이 터지고 나면 우리는 케이크를 썰어 먹는 거야.

나는 가장 음탕한 처녀고 가장 무감한 창녀다. 악몽에서 나를 만지는 돼지들은 피투성이 손톱을 그러모으며 울고 있어. 하나의 몸과 다른 몸을 하나의 정신과 다른 정신을 이어 붙이는 결혼식은 끊이질 않네. 우리는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잊어버렸지.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결혼하는 거야. 나팔관은 새의 부리와 구명조끼는 메스와 루비는 깃털과 다시 다시 다시 결혼하는 거야. 우리는 입을 맞추고 몸을 잇대고 서로의 이름을 잊었네.

이름을 잊었다면 다시, 다시 결혼하는 거야. 얼음은 노란 잉크와, 날카로운 펜촉을 가진 만년필은 은실과 다시, 다시, 다시. 붉은 실밥이 다 뜯어진 인형이 웃고 있네. 우리는 결혼했으니까 입을 맞추는 거야. 우리는 죽었으니까 상처를 찢는 거야.

아니야. 우리는 살아 있으니까 상처를 찢는 거야.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입을 맞추는 거야. 붉은 실을 더 뜯어. 그 안쪽의 붉은 것이 보이도록. 사랑하고 싶잖아. 살고 싶잖아.

나는 그저 누군가 나를 읽어주길 바랐을 뿐이다. 내가 쓰거나 쓰지 않은 무엇인가를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내 내장의 미로는 기다리고 있었다. 내 내장을 끄집어놓고 내 미래를 점쳐 줘. 내가 뽑아놓은 내 내장을 읽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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