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5월 17일

i11년 5월 17일

어째서 그 애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까? 어째서 그 애는 내 옆에 있는 걸까?

오빠 : 그건 그 애가 유령이기 때문이야

지금 말하는 건 누구지? 아이들이 둥글고 견고한 구조물을 만들며 손을 맞잡는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간격과 간격이 조금씩 좁아지고 나는 그 바깥으로 내몰린다. 어째서 그 애들은 나를 똑바로 마주볼 수 있을까? 어째서 내가 그 애들을 마주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는가? 말해줘.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거야? 어째서 너희는 어색하지 않은 거야? 어째서 너희는 원과 원 사이를 자유롭게 옮겨다니며 웃을 수 있는 거야? 어째서 너희는 즐거운 거야? 어째서 나는 너희에게 속해 있지 않은 거야? 너희도 외롭잖아 나는 너희가 화장실 구석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너희도 외롭잖아 나는 너희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너희도 아프잖아 너희도 나와 같은 곳에 있잖아 너희도 여기 있잖아 너희도 여기잖아 그런데 어째서 너희의 외로움과 나의 외로움은 다른 거지? 어째서 내가 인사하면 너희끼리 웃어 어째서 내 옆에 앉지 않아 어째서 뒤처지는 나를 두고 팔짱을 끼고 뛰어가 어째서 나와 우산을 함께 쓰지 않아? 내게서 펜을 빌렸던 아이는 옆자리 아이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우산 없이 현관에 서 있을 때 얘가 우산을 빌려줬어 우리는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어. 어째서 내게는 우산을 빌려주지 않았니? 나는 그날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길은 좁고 어둡고 길었는데. 간혹 내게 웃으며 말을 거는 아이들 나는 그 애들에게 인사할 수 없었다. 내가 그 애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금지를 어기는 일은 범죄다. 범죄의 대가는 길고 어색하고 비참한 무시다. 내가 손을 들어올렸을 때 그리고 안녕이라고 말을 걸었을 때 너희가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어떤 외로움에 속해 있는지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들어올리되 안녕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안녕이라고 속삭이되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들어올리고 어색하게 옆머리를 더듬거렸다. 너희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또렷한 목소리로 안녕이라고 말한다. 나는 반드시 대답한다. 너희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범죄이다 범죄를 저지른 여자는 나쁜년미친년죽일년오만한년이다. 오 물론 나는 너희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자조는 체념보다 궁상맞고 지긋지긋해.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돌아오지 않을 감정을 쏟아붓는 일이 지겹다. 허공에서 무한히 떨어지는 비,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언젠가 비는 멎을 것이고 하늘은 붉은 생채기를 드러내며 비명을 지를 것이고 우리 목구멍은 타들어가 끔찍하게 갈라질 것이다.

교실 뒤에 마련해 놓은 학급도서관에서 나는 책을 한 권씩 훔쳤다. 책 앞면에는 내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나는 책을 읽으며 두꺼운 네임펜으로 문장들을 지워나갔다. 검은 선들로 책이 완전히 오염될 때까지. 내가 더 이상 그것들을 읽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런데 나는 대체 언제쯤 내 범죄를 고백할 수 있을까? 나는 알고 있어. 아무도 내 범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도 죽일 수 없었고 내가 죽인 것들에는 이름이 없고 너희는 그것들이 살아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잖아. 나는 우산 없이 걷는다. 천천히. 미지근한 빗물이 내 피부를 적신다. 나는 빗물로 젖어든다. 너희가 내 앞에서 우산을 쓰고 걸을 때마다 너희가 소리를 지르며 싸울 때마다 그리고 또 화해할 때마다 너희가 내 머리통에 공을 던질 때마다 그리고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던지지 않게 될 때마다 너희가 나를 발견하지 못할 때마다 내가 너희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죽고 싶어. 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 그러나 죽고 싶다고 수억 번 되뇌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아. 사실 나는 사라지고 싶지 않아 나는 깊이 못박히고 싶어 피부 위에는 빗물이 스며들고 인간의 피부로 만든 우산이 어느 도시의 밤 위로 펼쳐져 있고 나는 죽고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쉬는 시간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는 입술에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웃는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웃는 것을 보지 않는다. 내가 양팔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우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 나는 곧 얼굴을 가리지 않고 울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우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걷는 와중에 내가 체액을 내 턱 밑으로 쏟아내는 것을 내가 흘린 무엇인가가 복도를 약간 더럽히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나는 아이들이 순식간에 서로에게 파고들고 둥글게 원을 그리고 침을 튀기며 수다를 떨고 질기고 젊은 얼굴의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놀라워하며 바라본다. 아이들의 치아는 하얗고 목소리는 맑고 높다. 아이들은 거의 악을 쓰듯이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 애들이 말하는 내용을 듣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교실 창가에 놓인 식물처럼 아이들의 언어를 훔쳐듣는다. 그곳에 내 언어가 있는가? 그들의 언어에 내 침묵이 있는가? 나는 교실 뒷문을 열어젖히고 처들어오는 검은 짐승을 상상한다. 그것이 내 목을 물고 나를 찢는 모습을 상상한다. 찢어진 내가 교실을 흠뻑 적시는 모습을 상상한다. 교실이 조금 더 많이 오염되는 것을 상상한다. 마치 빗물을 맞은 것처럼. 오 그러나 그 짐승이 나 외에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으면. 그 누구에게도 나의 비극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아니다. 사실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약간의 경멸, 멸시, 비웃음, 그런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끝이 날카로운 접힌 우산이 내 등을 쿡쿡 찌르고 누군가 내 책상 위에 크고 검은 글씨로 낙서를 하고 그런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모욕하기 위해 내 앞에서 크게 웃는 웃음소리들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내가 매일 가방 속에 들고 다니는 노트를 누가 빼앗아 들고 큰 소리로 읽어준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다. 누가 내 서툰 연기와 틀린 대사를 지적하며 나를 비웃는다면. 오 그것만으로. 하지만 아무도 내가 대사를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내가 대사를 틀린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이들은 나와 있으면 눈에 띄게 지루해한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친구들과 통화를 하고 다른 아이들이 지나가면 반색을 하며 구조선박을 본 바다의 표류자처럼 달려들고 수다를 떤다. 나는 버려지고 점차 뒤처지고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다. 내가 사라진 자리를 나는 멍하니 바라본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사라진 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잠에 취한 아이의 응시로 나는 내게 현존도 부재도 요구하지 않는 세계의 소음을 바라본다. 나는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자의 멍한 의식으로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래도 괜찮다. 그것들은 내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그것들은 내게 대답하지 않으니까. 누군가 내가 보이도록 만들어 줘. 누군가 내가 들리게 만들어 줘. 누군가 유령에게 피와 살을 입혀 줘 누군가 유령에게 길게 찢어진 입을 선물해 줘. 너희는 할 수 있잖아 자선을 베푸는 어린아이의 붉고 통통한 손바닥으로 너희는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을 움켜쥘 수 있잖아. 매일 강박적으로 웅얼거리는 기도 애원 어떻게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를 않아 나는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원하는데 너희는 내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불구에 무능한 배우니까 그렇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깜빡이는 흐릿한 조명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배우다. 아니 지긋지긋한 자조는 그만두기로 했잖아? 자조는 지겨울 뿐 아니라 추잡하기까지 해. 마치 고독에 그 어떤 이유도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왜 내가 아파야 하느냐고 묻는 병자처럼. 왜냐하면 누군가는 아프기 때문이야 누군가는 외롭기 때문이야. 모두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외롭고 아프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아프고 외롭기 때문이야. 그 누군가가 나인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

이상해. 이상해 너무 이상해. 분명 이상한 일이야. 이토록 많은 시간 이토록 많은 숨 내가 살지 않은 시간 내가 내쉬지 않은 숨 내 것이 아닌 얼굴들 내가 맛볼 수 없는 혀와 입들 내가 발화하지 않은 언어 내가 만지지 못한 몸 내게 닿지 않는 체온 그 모든 것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살아서 슬프고 기쁘고 아프고 행복하고 불행하다는 것이 너무 이상해 이상하고 또 이상해서 구역질이 날 정도야. 너무 구역질을 해서 황홀할 정도야. 어떻게 이상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 앞에서 허리가 꺾인 채 짓이겨진 풀잎 야구공에 맞아 부풀어오른 우주의 비닐봉지처럼 너무 많이 불어버린 풍선처럼 터져버린 하얀 비둘기 그때 사람들은 웃었지 와아아하고 깔깔거리며 웃었어 왜 웃었지 뭐가 웃겼을까 그 사람들 이해하지 못할 웃음을 웃은 사람들 웃음을 들을 수 없었던 훼손된 비둘기 타자의 축축한 손 모두 살아 있어 그것들이 그것들을 느끼고 있어 내가 느낄 수 없는 방식으로 내가 이해할 수도 내가 결코 살아볼 수도 없는 방식으로. 그들이 나를 지나치며 웃는다. 그들이 팔짱을 끼고 시시덕거리며 웃는다. 그들이 우산을 나누어쓴다. 나는 뒤쳐진다. 그들은 뒤쳐진 나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가 내 언어의 속도를 앞지른다. 나는 리듬이 맞지 않아. 내 말이 이상하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너무 빨리 말하거나 너무 느리게 말하지. 그러므로 너는 생각보다 말이 많구나 혹은 너는 말이 너무 없어. 끔찍한 정적 하지만 너도 말하지 않잖아? 너희는 나와 있을 때만 끔찍하게 조용하잖아? 텅 빈 복도에 원의 곡선을 구성하던 어떤 몸, 영원히 가 닿지 못할 어떤 몸이 나타나면 너희는 즐겁게 웃잖아? 너희의 날숨에서는 소리가 나잖아? 나 좀 살려줘 지금까지 얘랑 둘이 있었단 말이야 하하하 웃음 소리 너희가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쉴 때마다 나는 그 이상한 소리 정말 이상해 이상하지 그래 이상해 이상해하고 내가 지껄이는 동안 어째서 그 애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것일까? 그 애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내 옆에서 조용한 들숨과 날숨 들숨을 들이쉬고 날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비를 잇새에 문 어린아이처럼 색색거리는 소리.

그 애는 여기 있다. 그 애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애가 행복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 애가 부드러운 원 속으로 파고들어 행복해지지 않기를 원한다. 그 애가 영원히 유령이기를 원한다. 나와 같은 곳에서 그 애가 불행하기를 바란다. 다른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그 애는 불행하기를 원한다. 그 애가 내 옆에 있기 때문에 그 애가 불행했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애는 연극배우처럼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리가 나는 날숨. 나는 그게 좋아. 인간의 날숨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좋아. 나는 귀기울여 그 애의 날숨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다. 인간의 얼굴에서 빠져나오는 부드러운 숨. 난 행복해지고 싶어. 친구를 더 많이 사귀고 행복해지고 싶어.

신이여 나는 당신에게 기도하나니 당신이 내게 기도하기를. 나는 바라옵고 또 바라오니 이제는 당신이 내게 기도하기를. 내 걸음을 지나쳐가는 등, 나를 두고 멀어져가는 색색의 우산들, 내 피부 속에 스며든 겨울의 빗방울 그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몸 속에 스며들었던 어떤 빗방울 어떤 시간 어떤 외로움 그건 사라지지 않아 내 시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아. 그것은 다만 더 작고 분열된 형태로 변형될 뿐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죽음 이전과 이후를 받아들인다는 것.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삶 이전과 이후를 받아들인다는 것. 여자아이는 그녀의 피부에 장미잼을 발랐다. 날개들이 그녀의 피부 위로 달겨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보물을 숨기고 있었니? 보물은 네 안에 있어. 비둘기는 말했다. 소녀는 그녀를 앞서가는 발걸음들을 보았다. 오직 그녀의 외로움 오직 그녀의 삶 오직 그녀의 죽음. 그러나 그녀의 것이 아닌 외로움, 그녀의 것이 아닌 삶, 그녀의 것이 아닌 죽음을 어째서 그녀는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가령 그녀를 가두고 해방시키던 새장의 외로움, 경련하는 식물의 외로움, 섞여드는 숨결과 숨결의 외로움 어째서 그녀는 그것들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느낄 수 없는 것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어 느낄 수 있는 것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어.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신이여 내가 당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오래 전부터 당신을 상상하며 당신에게 드리는 내 기도를 상상하며 울고 있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새는 꿈에 취한 느슨한 눈동자로 속삭인다. 보물은 네 안에 있어. 처음부터. 소녀는 하얀 벽, 하얀 응시, 허공을 관통하는 하얀 달, 소녀는 은빛의 포크를 들고 보물을 파낸다. 장미잼이 그녀의 피부에서 흘러내리고 새는 지저귄다. 보물은 네 안에 있어. 누군가 이 고통스러운 기쁨을 발견한다면 그래고 내게 입을 맞춘다면 누군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빗물에 젖어든 손으로 내 목을 감싸안는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거야. 소녀는 속삭인다. 내 마지막 날숨이 소리를 낸다면 누군가 그 소리를 듣는다면 누군가 그것을 백조의 노래로 만들어 준다면 누군가 그것이 백조의 노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애는 왼쪽 다리를 떨며 내 이야기를 듣는다. 왼쪽 발이 나무 바닥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달라붙는다. 떨어지고 달라붙는다. 나는 넓어졌다 줄어드는 간격을 멍하니 바라본다. 안녕 안녕 우리는 아침에 인사를 나누었고 지금은 인사가 아닌 다른 말을 하고 있어.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단 한 마디라도 듣고 있는 걸까.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를 단 한 조각이라도 듣고 있는 걸까. 나는 내가 하는 말을 듣는 너를 상상하면서 너를 단 한 조각이라도 듣고 있는 걸까. 그 애가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가 증명할 수 있지? 아무도,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 그 애가 유령이고 나 역시 유령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가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수업 시간에 쉬는 시간에 허공을 바라보며 투명한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 내가 울고 있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아. 그 애는 아직도 친구들을 원한다. 더 많은 친구들 더 많은 행복을. 하지만 너는 실패할 거야. 나는 말한다. 너는 실패할 거야. 네게서는 오래도록 빨지 않은 걸레에서 나는 악취가 나니까. 너는 물이 많고 쉽게 썩는 과일이니까. 너는 유령이니까. 나 말고 다른 이들이 너를 볼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그 애는 증명하지 않는다. 그 애의 엄마와 그 애의 엄마의 시와 그 애가 여기 지금 있다는 사실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사물들의 그림자가 생존하는 방식으로 긴 달빛이 잔존하는 방식으로 화성의 해변에 묻힌 보물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나는 살아 있다. 담임교사가 들어온다. 그는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그는 우리를 훑어본다. 우리를 보지 않는 눈으로 그는 우리를 본다. 우리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본다. 그는 말한다. 그가 아니라 그녀였던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혹은 그녀. 그녀 혹은 그가 말한다. 언젠가는 그였고 언젠가는 그녀인 그가 말한다. 어차피 내 일기는 사실이 아니니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 혹은 그녀 그래 그가 말한다. 조용히 해. 하지만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우리가 지껄인 빌어먹게 많은 말들에는 소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밀담을 나누는 연인들처럼 간혹 속닥거린다. 조용해. 너무 조용해. 나는 소리 내어 말한다. 혹은 소리 내어 말하려 시도한다. 담임교사는 나를 노려보지도 내게 경고하지도 않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본다. 그 애가 있다. 그 애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그 애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그 애가 이미 떠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그러므로 지금 나는 그 애가 여기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울고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숫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사실 나는 지금이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고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 있으니 처음부터 날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내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그 애에게 털어놓고 싶었으나 내가 그 애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그 애는 내 옆에 있었던가? 내가 그 애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그 애가 내 옆에 있었던 적이 있는가? 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여전히 그것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말했던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말했던가? 내가 남의 추억을 빌어먹고 남의 시간과 남의 이야기와 남의 온기를 빌어먹으면서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았는지 말했던가? 나는 교실에서 바퀴벌레처럼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다른 아이들의 삶을 훔쳤다. 바닥에 떨어진 비스킷 조각을 운반하는 개미처럼 나는 적의도 증오도 없이 그들의 것을 빌어먹었다. 오 그래 죄책감도 없이 나는 삶을 훔쳤다. 나는 내가 비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너희들이 치사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너희는 지옥에 가지 않을 거고 나는 천국에 가지 않을 거야. 이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야. 이곳은 천국 같은 지옥도 지옥 같은 천국도 아니야. 하지만 또 다시 천국 같은 날이 밝아오고 허공은 천국처럼 창백하고 희게 빛나는데 나는 새벽의 검은 우유와 약간의 사탕 조각을 쥐새끼처럼 훔쳐 먹고 너희와 같은 곳에 살아 있었지. 너희 교실에 얼마나 많은 쥐새끼들이 우글거렸는지 알고 있어? 내 밑바닥에 얼마나 많은 사탕 조각들이 쌓였는지 알고 있어? 난 그 사탕 조각들을 내 체온으로 녹여서 여자를 빚어냈지. 그녀의 이름은 여배우야. 여배우는 여배우가 되고 싶어 해. 그녀는 단 것을 좋아하고 물기 있는 것을 즐겨 먹어. 그녀는 새벽의 이슬에 젖어든 석류 혹은 바퀴벌레의 체내에서 박동하는 작은 심장을 좋아해. 나는 너희를 미워하지 않아 너희를 원망하지도 않아. 그러니 나의 그녀에게도 너희가 좋아하는 것들을 너희의 좋은 점들을 알려주지 않을래.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싶어 너희에게 사랑받고 싶어. 너희와 함께 생일 케이크 위 촛불들을 불고 싶어. 너희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부풀어오른 풍선들을 터뜨리고 싶어. 그림자는 육체로부터 점점 뒤쳐진다. 육체는 가볍게 뛰어오르고 그림자는 장미잼을 흘려 넣은 것 같은 허공 뒤편으로 점점 흘러내린다. 유리병 속에 갇힌 도마뱀의 이미지. 영화 속 여주인공은 도마뱀처럼 벌거벗은 채 육중하게 자라버린 도마뱀을 보고 웃는다. 너는 너무 많이 자랐어 이제 다시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거야. 새장은 무방비하게 열려 버린 가슴으로 한 마리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새장은 새를 찾아 나설 수 없다. 새장은 다만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새장이 기다림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새가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새는 새장이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새장에게는 모든 것을 소리쳐 폭로할 수 있는 입도 목구멍도 없으니까. 다만 길고 얇은 흉터 같은 간격들만이 새장이 가진 육체일 따름이니까. 그럼에도 새장은 새를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유리병 속을 적시는 도마뱀의 숨결 그 자리에 묻어 있을 어떤 언어, 유리병 바깥의 도마뱀은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는 그 애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 애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애는 여기 없으니까. 왜냐하면 오늘은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그 애가 여기 있는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그 애가 실종되기 전의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그 애가 유령이 아닌 것처럼 살았던 오늘이 아니고 오늘은 여기가 그 애의 자리인 오늘이 아니니까. 도마뱀이 유리병 속에 채워 넣은 도마뱀의 언어로 도마뱀은 질식해간다. 짙은 이산화탄소, 도마뱀은 색색거리며 가쁜 숨을 쉰다. 도마뱀의 혀가 파랗게 질려간다. 푸른 장미 꽃잎처럼 여리고 짙은 색깔. 마른 채로 젖어 있는. 나는 중독된 것처럼 푸른 하늘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는지 나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내가 인간의 언어를 배웠는지 아무도 내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나의 어머니는 내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 주었는지 어째서 그 애의 어머니는 그 애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 주었는지 어째서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아닌 것의 사유를 속삭이는지, 마치 짐승처럼, 아니 달을 향해 날아오르는 날벌레처럼 우리가 속살거리는지 누군가 알려 줬으면. 신이여 기도하소서 나를 위해 기도하소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 단 한 마디 정도는 해도 괜찮잖아요? 많은 말을 바라는 것도 아니야 단 한 마디만.

어째서 네가 사라졌는지 모르겠어. 너는 그다지 있지도 않았는데, 너는 너를 없던 걸로 만들고 싶었니? 나는 곧 그 애를 완전히 잊어버릴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 그를 향해 속삭였던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 기억과 애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했던 것처럼 그 애를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혹은 잊지 않을 것이다. 간혹 잊고 간혹은 잊지 않을 것이다. 그 간격들 속에서 나는 유령들의 응시를 발견할 것이다. 유령들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유령들을 응시하고 있다. 허공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어째서 그들이 나를 두고 떠난 것인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나는 그들을 목 놓아 부를 수도 없겠지. 내 입은 녹아내렸고 내 목구멍은 장미 꽃잎과 함께 녹아내렸으니까. 나를 없었던 걸로 만들고 싶어? 내 빈 자리에 피어 있는 흉측하고 거대한 꽃을 상상하면 나는 끔찍한 기쁨으로 고통스럽다. 내 입은 게걸스럽게 벌어지고 녹아내린 목구멍의 자리를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들여다본다. 훼손된 목구멍은 감탄스러운 맑은 빛의 응시들을 게걸스럽게 삼킨다.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 말 체육 시간 내 손을 향해 부드럽게 역류하는 공의 곡선 그것만으로 나는 만발했을 것이다. 만발해서 음탕하고 짙은 체취를 흘려대었을 것이다. 기쁨은 역류하고 언어와 사물은 황홀하게 접붙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보는 방식이 너희가 나를 보는 방식과 유사했다면 나는 그것을 한없이 근접시키는 상상을 하며 울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보는 방식과 너희가 나를 보는 방식은 결코 같지 않았고 내가 너희를 바라는 방식과 너희가 나를 바라는 방식 내가 너희를 상상하는 방식과 너희가 나를 상상하는 방식은 결코 같지 않았고 나는 황홀한 구토를 박탈당한 채 내 안으로 내 모든 것을, 내 점막 내 입술 내 목구멍 내 숨 내 입 내 치아 내 언어를 전부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어와 사물을 연결하던 신경들을 고통스럽게 끊어낸 뒤 그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연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미라는 너희의 미라와 다른 것을 나의 행복은 너희의 행복과 나의 장미잼은 너희의 장미잼과 나의 새는 너희의 새와 다른 것을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게 되었지. 너희는 내 언어가 인간의 언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나의 자리와 사물의 자리 나의 자리와 사물의 위치 유령의 응시와 유령의 존재방식 보는 것의 입장과 보이는 것의 위치, 너희는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 너희는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방식으로 때로는 보이는 것의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어. 파상풍에 감염된 인간의 절단된 오른팔이 살아 있다는 것을 새벽의 검은 우유를 마시고 숨이 멎은 어린 쥐새끼가 살아 있다는 것을 쥐새끼의 주둥이에서 역류한 부드러운 거품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종자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멸종된 짐승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산화탄소에 취한 도마뱀의 벌어진 눈꺼풀 속의 미세한 주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태양계에서 내몰린 명왕성의 방식으로 낚시바늘에 매달린 허공의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너희는 믿지 않았어. 그러나 나는 믿지 않을 수 없었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만발한 섬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생태계였으므로. 상실과 갈망으로 피어난 꽃들은 나를 혹은 허공을 혹은 내가 속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허공의 응시를 마주보았다.

내가 너희의 눈을 얼마나 가지고 싶어 했는지, 너희의 세계를 얼마나 살고 싶어 했는지 지금 털어놓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 실패한 언어와 실패한 인간, 실패한 세계. 내가 이 실패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말하는 것은. 틀린 대사로 아무리 지껄여도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않아. 왜냐하면 내가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들킬 수 없는 비밀이기 때문에. 꿈 속에 불을 지르자. 그곳이 달걀처럼 충만하고 흰 연기로 뒤덮일 때까지. 그 애는 허공을 보며 속삭였다.

나는 다른 친구들을 가지고 싶었어. 나는 교실 한가운데서 생일 축하를 받고 싶었어. 인사를 하고 인사를 받고 싶었어. 모두가 애정을 나누는 방식으로 애정을 주고 싶었어 그리고 받고 싶었어.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 나는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네게 인사를 했던 거야.

사실, 그 애는 단 하나의 문장도 내게 속삭이지 않았다.

사실, 그 애는 내게 많은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단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그 애가 말한 무수한 말들을 나는 단 한 마디도 듣지 않았다.

사실, 나는 다른 친구들을 가지고 싶었다. 사실, 나는 그 애가 말하는 길고 창백한 간격들을 견디지 못했다. 사실, 그 애는 다른 친구들을 가지고 싶었다. 사실, 그 애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 애를 듣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 애를 듣고 싶었다.

사실, 그 애는 내게 말을 걸었다.

Series Navigationi11년 3월 1일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