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1년 7월 15일 – i12년 11월 9일

i11년 7월 15일

오빠2는 거울 앞에 있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말한다.

오빠2 : 마술사의 은화 같은 태양 아래 와해되어가는 공중의 무덤들. 내가 말하는 동안 내 입술이 녹아 없어지고 내 목구멍이 녹아 흘러내리고 이제 나는 완전히 망가진 육체의 틈을 벌려 빌어먹을 비밀들을 누설하고 있어. 그녀의 길고 연약한 목에 레이스 양산을 걸어 놓으렴. 그녀의 목은 물음표처럼 구부러지고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양산과 그녀의 레이스에 입을 맞추리. 그리고 검은 양들. 검은 양들이 있지. 새벽에 나는 족발로부터 분리된 불구의 돼지처럼 지상에 드글거리는 다른 모든 버러지들처럼 배를 바닥에 깔고 기었어. 양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아직 네 개의 인간 사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러므로 나는 두 발을 지상에 지탱하며 나머지 신체를 그 위로 밀어냈고 하나의 중심과 다른 중심 사이에 가상의 선을 그어 천천히 움직이며 걸었어. 공중 곡예사들의 유연한 신체를 지탱하는 허공의 줄들이 수천 개 깔려 있는 바닥을 걷듯이.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더라도 내 머리통이 곡예를 할 일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점점 거침없이 걸었지. 곧 나는 첫 번째 검은 양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곳에 있는 모든 검은 양들 속에 들어서게 되었어. 나는 양들 속에서 양들과 함께 걸어 왔지. 검은 양들의 무리는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을 잘 알고 있었어.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 긴 강이나 절벽 같은 장애물과 부딪히지도 않았어. 누군가 생고기 위 파리떼처럼 아득하게 드글거리는 우리들을 보았다면 분명 내가 그들의 목자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아니었어. 나는 다만 한 마리 양 혹은 한 마리 양을 연기하려 애쓰는 벌거벗은 벌레일 뿐이었으니. 그런데 목자 없이 이동하는 양들이 있던가? 아마 그렇지 않을 거야. 그러므로 목자는 검은 양들 속에 있는 한 마리 양이었겠지.

목소리 : 얘야 목이 말라 물을 좀 가져다 주겠니.

오빠2 : 내 망막은 마비되었고 내 입술은 녹아 없어지고 목구멍은 하얀 초콜렛처럼 녹아 흘러내리고 아냐는 어디에 있지? 우리의 하얀 비둘기는 어디에? 우리는 어디에? 여기는 어디에? 여기는 어디에 있지? 어머니 나는 매일 하나의 숨으로 하나의 희망을 불어넣어요. 희망의 비눗방울이 엷고 끈적한 막으로 점점 부풀어가고 그것이 어제와 그 어제와 어제와 어제, 어제와 마침내 오늘의 것으로 가득 차면 나는 달콤한 자학으로 그것을 하나씩 터뜨리는 겁니다. 둥근 비누거품은 점점 나를 닮아가고 이 거울, (거울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아직 깨지지 않은 이 평면도 점점 나를 닮아가고 있죠. 내가 눈을 감으면 이것도 눈을 감을까? 그런 건 알 수 없지. (웃는다) 내가 내 관 속으로 들어가 관의 하얗고 순결한 뚜껑을 잠그면 이것도 숨을 멈추고 멎은 심장이 고통스럽게 경련하는 것을 놀란 채 바라볼까? 그런 건. (웃는다) 알 수 없어.

나는 양들과 함께 왔습니다. 어머니 나는 양들과 함께 왔어요. 그것들은 우유 속에 빠진 파리처럼 검었고 당당했죠. 양의 숨결과 내 숨결이, 양의 숨결과 양의 숨결이, 목자의 숨결과 양의 숨결이 뒤섞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 내 숨은 그 무엇과도 얽혀 섞이고 있지 않군요. 어여쁜 아냐가 가느다란 목에 분홍색 레이스 양산을 걸고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비행하는 동안 나는 내 뼈로 땅을 팔 겁니다. 그리고 보물을 찾을 겁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그곳에 남아 있다면. 그리고 아직 녹아내리지 않은 뼈가 내 고기 속에 남아 있다면. 글자들은 베란다에 내버려진 부패한 고깃덩이 위에서 춤을 추는 파리떼 같아요.

어머니 어머니의 고기 속에 어떤 꿈과 어떤 희망과 어떤 미래가 파묻혀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절개해 한 조각 한 조각 살펴보았더라도 알 수 없었겠죠. 어머니는 당신의 마지막 병실에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겠습니다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 내 입술이 녹아 떨어지고 탄식 같은 질문들이 내 목구멍을 찢어발기고 있어요. 누군가 죽은 개의 뼈로 내 심장을 긁어대고 있어요. 미칠 것 같아. 충혈되고 할퀴어져 문드러진 내 심장에서 누런 염증이 흘러넘치는데 아직도 누군가가 그 개의 뼈로 내 심장을 긁어대고 나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있어. 녹아내린 내 목구멍이 하수구 밑으로 흘러들어가는데 나는 쥐들의 토사물과 비누거품의 시체에서 새어나온 피와 새들의 울음이 섞여든 액체 속에서 내 목구멍을 분리해낼 수도 없어.

어머니 나의 지평 밑으로 검은 태양이 꺼져들고 촛불처럼 음험한 달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누군가 훔쳐간 은화이죠. 누군가 내게서 훔쳐간 은전, 죽은 내 턱과 윗니 사이에 끼워져 있던, 카론에게 건네었어야 할 내 마지막 삯이죠. 그는 내게 뼈만 남은 오른손을 내밉니다.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제스쳐를 마치 그 제스쳐 속에서 태어난 자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녹아내린 혀 위에는 내 뼈와 뼈 사이에는 달처럼 창백한 은전이 없으니 나는 그 제스쳐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연기할 수밖에 없죠.

나는 서서히 고개를 저으며 생각합니다. 내 혀가 녹을 때 은전이 떨어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내 은전을 훔쳐갔나? 누군가 내 죽음을, 내 죽음의 삯을 훔쳐갔나?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답이 존재한다는 확신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답을 찾는 것,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죠. 왜냐하면 답은 무한한 빌어먹을 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미줄에 진드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새벽의 이슬 같은. 혹은 골목길에 종기처럼 돋아난 더러운 유리창들 같은.

나는 녹아내린 입술과 녹아내린 혀와 녹아내린 목구멍을 벌려서 웃습니다. 턱 밑이 크게 벌어진 여자처럼 얼굴을 잃어버린 군인들처럼 그렇게 웃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 검은 양들 속에 섞여서. 대체 신은 언제 오는 거죠? 그의 목자와 양들이 전부 죽을 때까지 그는 오지 않을 거예요. 대체 신은 얼마나 더 우리를 기다리게 할 것인지, 나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어쩌면 우리의 신은 기다림뿐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가 기다림이 아니라면, 그는 그의 기다림뿐 아니라 우리의 기다림의 내용과 미래까지도 전부 알고 있을 거예요.

아, 어머니 쥐들의 발톱이 새들의 슬픔이 가장 깊은 탄식들이 내 심장을 긁어내고 있어. 항상 같은 방향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위에서 아래로 내 심장을 긁어내고 있어. 목구멍이 녹아내리는 방향도 입술과 혀가 녹아내리는 방향도 항상 위에서 아래죠. 그러나 내가 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적어도 벌레처럼 기기만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나는 내 양발로 지상의 무게를 지탱하고 내 나머지 고깃덩이를 아래에서 위로 들어올렸죠. 오 정말이에요. 분명히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 아래에서 위로의 방향이었어요. 마치 비상하는 것처럼. 혹은 한없이 추락하는 것을 유예하는 것처럼. 어머니 그러나 나는 언젠가 아래에서 위로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내 심장에서 흘러내린 염증이 내 피와 섞여 내 다리까지 섞여들어가고 있으니 내 다리는 완전히 망가질 것이고 나는 내 부패해가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 곧 정말 버러지처럼 지상을 기어다닐 수밖에 없겠죠. 내 옷은 닳아 헤지고 그 밑으로 드러난 연약한 배는 흙과 돌에 갈려 튿어진 채 붉고 부드러운 창자를 쏟아낼 겁니다. 아무도 가 닿지 못한 먼 위에서는 신의 응시처럼 냉혹하고 집요한 빛이 내리쬘 것이고 나는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단 하나의 은전도 없이 나는 강물 속에 뛰어들어야 할 거예요. 카론은 나를 구하는 대신 멍하고 무감각한 해골의 눈구멍으로 허공을 응시할 것이고 나는 강의 가장 검고 깊은 곳까지 한없이 빠져들게 될 겁니다 나는 다시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오로지 하나의 방향만으로 나아가게 될 겁니다.

목소리 : 물을 줘. 얘야 제발 내게 물을 줘. 물을 뿌려 줘. 혹은 물을 부어 줘. 뭐든 좋아 내 끔찍한 목구멍에 물을 쑤셔넣어. 난 목이 말라. 목이 말라. 내 말 안 들리니? (긴 사이) 정말 안 들리니?

오빠2 : 카론은 검은 물 위에 비추어진 자신의 반영만을 백치처럼 바라볼 것이고 나는 한없이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위에서 아래로의 단 하나의 방향으로. 어머니 우리는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검은 양들은 모두 죽었는데. 그들은 검은 물을 향해 나아갔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과 그들의 목자는 모두 검은 물로,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뛰어들었죠. 최초 이전의 시간에, 빛 이전의 빛과 어둠 이전의 어둠에 신은 무엇이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그가 모든 장소를 창조하기 전에 그는 어디에 있었나요? 그의 앎의 시작과 끝 이전과 이후에 그는 무엇이었고 무엇을 알고 있나요? 내 심장이 멈춘 채 녹아내리는 동안 개들이 악몽 같은 이빨로 내 심장을 물어뜯는 동안 쥐들의 더러운 발톱이 내 심장을 긁어내리는 동안 나는 미칠 듯한 가려움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어요. 오, 항상 같은 방향으로. 그러나 신은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내게는 이름이 없고 내 목 위에는 이름표가 없고 그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본 적이 없으니. 이름 없는 자에게는 구원조차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어머니 어머니도 나도 구원받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오직 기다림만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어머니 내 망막이 검게 마비되고 내가 검은 물 밑에서 검은 물의 맹시만을 바라보는 동안 내가 살아 있었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에 속해 있는 동안에도 아직 내가 뛰어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i11년 6월 1일

안녕. 안녕. 나는 교실의 빈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그곳이 내 자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곳은 비어 있었고 나는 그곳의 좌석 촉감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마치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처럼 그곳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나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다른 자리에 앉으면 다른 아이들도 다른 자리에 앉게 될까? 그 애와 인사한 뒤 나는 이어폰을 꽂았다. 하얀 이어폰은 휴대폰과 연결되어 있었다. 휴대폰에는 불법적으로 다운로드한 202개의 곡, 그리고 202개의 수열들. 내 미래의 공간을 예정하고 있는. 목소리들이 만들어내는 틈새의 공간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은 바깥의 인상을 조금도 흐리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교실 앞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서는 담임교사의 기척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더 이상 내 안에 무슨 말이 남아 있을까? 목소리들이 내게 읊어준 사실들부터 시작하자. 사실 목소리들은 내 것이 아니지만 그들은 그 목소리를 성모처럼 자애롭게 내게 선물하였다.

1. 어린 새와 오빠들의 이야기는 망상처럼 불어가고 있다.

2. 전 과목의 성적은 80점대였다. 나는 내가 그 괴상한 문제들을 제대로 풀어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읽지도 못했고 이해하지도 못했던 문제들, 내가 마주하지도 답하지도 못했던 문제들, 내가 정말 그것들을 4/5 이상 맞추었단 말인가?

3. 나는 여전히 행성처럼 사람들이 주위를 돌고 있다. 혹은 인간의 그림자 주위를. 그 둘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 내게 속하는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목소리들, 목소리들은 내게 모든 상세한 정보들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전언은 어렴풋하고 불투명하다 간혹 그들이 어둠 속에서 팔의 피부에 대한 묘사만이 카프카처럼 그로테스크하게 빛난다와 같은 구체적인 언어를 내게 안길 때도 있지만 대개 목소리들은 흐리고 무책임하다.

4. 목소리들은 유령인가?

5. 목소리들은 가족인가?

6. 목소리들은 실종자들인가?

7.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와 오빠 그들 셋은 각자의 새장을 짊어지고 떠났다. 새장 바깥으로 삐져나온 가느다란 다리들이 벌레처럼 땅을 짚고 밀어내고 있다. 그들은 나아간다.

8. 어쩌면 그들은 이미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나와도 세계와도 무관한 보물들을 짊어지고 그들은 내 세계의 유리창 너머에서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행성처럼 혹은 행성 주위를 도는 암흑물질처럼 서서히 공전하고 있고 나는 그들을 발견하고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9. 혹은, 아무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 나는 뛰어내리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절망했음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11. 내가 기다리는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그가 나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 천국은 나를 찾아 하얀 구더기처럼 기어오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그곳을 찾아 떨어지고 있는가?

12. 사실, 나는 아직 뛰어내리지 않았다.

13. 그러나 떨어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느 지점에 시작을 부여하는가이다. 하나의 시작을 부여하기, 그것만으로도 나는 수천 번의 추락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시작을 갖는다면 나는 그 처음을 마지막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14.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을 먹어치우는 것에 달린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나를 먹어치우는 것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끔찍한 거식증을 앓고 있고 그것은 나를 향해 입을 벌리지도 않는다. 잠깐, 그것의 목구멍은 녹아 없어졌다. 그것의 서글픈 대가리가 희미하게 헐떡거린다. 그것은

15. 지금 어디에? 지금은 어디에? 여기를 말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16. 와우. 대단한 질문이야. 계속 이렇게 하면 끝을 잊을 수도 있겠어.

17.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끝을 잊을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을 원하고 있으며 오직 그것에 대한 욕망 속에서 태어났다. 목소리들은 간혹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간혹 절망적으로 냉담하다. 감미로운 혼수상태가 나를 게워내고 나면 내가 나를 게워내고 나면 내가 끝까지 게워내고 나면 그러면 나는 끝을 가질 수 있을까?

18. 그들은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나를 나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벌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긴 유형 중에 있고 내게 벌을 내린 이는 나를 잊어버렸다. 그는 오지 않는다. 구원도 파멸도 도달하지 않는다. 나는 구원만큼이나 파멸을 바라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나 먼 곳에 있고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끝에 대한 열망일 뿐 끝은 아니다. 그 무수한 다른 현재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19. 늙은 남자는 다른 현재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것들이 다만 다른 곳에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20.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21.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나를 듣지 못했다.

그 애는 그 애의 엄마가 쓴 시들을 훔쳐내 내게 보여주었다. 쉬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마치 혼자 있지 않은 것처럼 가까이 있었다. 숨결이 뒤섞이는 거리. 자신이 깨뜨리고 있는 그 침묵으로 돌아가고 있는 기도 소리. 나는 침묵을 침처럼 질질 흘리며 그 애의 엄마가 쓴 시를 읽었다. 언어의 흘러내리는 배열, 액체처럼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경멸스러운 글자들은 무척이나 내 것 같았다. 나는 그 안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내 가증스러운 눈꺼풀을 보았다.

행성처럼 혈관을 돌고 있는 큐브들 큐브 속 큐브들 큐브 속 소수들 큐브 속 찢겨짐들 큐브는 큐브를 찢고 혈관을 찢고 몇 개의 단어 너머로 나아갔다 그곳의 큐브들 조금 더 붉은, 조금 더 환한, 조금 더 절망한.

i11년 7월 15일

형사 : 안녕, 얘들아.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그레텔 : 안녕하세요. 엄마는 도시로 갔어요.

헨젤 : 아빠는 무덤으로 갔고요.

형사 : 그래. 귀여운 아이들이구나. 사실 난 형사란다. (경찰 수첩을 보여주며) 너희를 찾아온 건 (긴 사이) 너희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야. 그보다 너희 밥은 먹었니?

그레텔 : 아니요.

헨젤 : 아니요. 배가 고파요. 우리에게 밥을 줄 건가요, 엄마?

형사 : 엄마?

그레텔 : 아니에요. 오빠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나도 마찬가지고요. (침을 삼키고) 이해할 수 있나요?

형사 : 그래.

헨젤 : 그럼 어서 밥을 주세요 엄마

형사 : 그래. 조금만 기다리렴. (좁은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고기 좋아하니, 얘들아?

헨젤 : 고기요? 무슨 고기요? 암컷 고기? 수컷 고기?

형사 : (껄걸 웃으며) 재밌는 아이구나. 정말 재밌어. (그레텔에게 눈짓을 하며) 네 오빠 말이다. 정말 재밌는 아이야.

헨젤 : 난 수컷이에요. (불안스럽게) 그렇죠?

형사 : 그렇지.

헨젤 : 그리고 엄마는 암컷이고요. 그렇죠?

형사 : (의미심장하게) 그래. 아무래도 너는 미쳤나보구나. (그레텔에게) 너희 아버지는 언제쯤 집에 돌아오시니?

그레텔 : 아빠요? (의아해하며) 아빠는 무덤에 갔다니까요?

헨젤 : 아빠는 무덤에 갔다니까요?

형사 : 그래. 거기서 언제쯤 돌아오시냐고.

헨젤 : 무덤에서 돌아오는 사람도 있나요?

그레텔 : 바보야, 자기 무덤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자기 무덤에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어.

헨젤 : 난 잘 모르겠어.

그레텔 : 그건 네가 멍청해서 그래.

형사 : 그보다 너희 아직 배가 고프니?

그레텔 : 그럼요.

형사 : 그럼 일단 이것부터 먹으렴 (호주머니에서 사탕과 초콜릿들을 꺼내 그레텔과 헨젤의 손 위에 쏟아낸다. 반짝거리는 은박지들이 깨진 별처럼 빛난다.)

그레텔, 헨젤 : 감사합니다.

헨젤 : (그레텔에게 속삭인다) 그거 말해도 될까?

그레텔 : (헨젤에게 눈짓하며) 형사님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여기 낯선 여자가 왔어요.

형사 : (놀란 듯 헨젤과 그레텔 가까이 다가선다)

그레텔 : 그 여자는 처음에 문 밖에 있었어요. 우리에게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고 또 고기를 먹고 싶느냐고 물었어요.

형사 : (경악하며) 고기를?

그레텔 : 네. 고기를요. 고기는 죽은 짐승이거나 죽은 여자거나 죽은 아이죠. 우리는 그 여자가 우리에게 우리의 고기를 대접하려 한다는 걸 알았어요. 혹은 그녀 자신의 고기일 수도 있었죠. 그런데 그 여자가 정말 우리 엄마라면 그녀는 우리 엄마를 살해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녀는 우리나 우리 엄마를 죽여 고기로 만들려고 했던 거죠. 이제 그녀는 방 안에 있었고 헨젤은 그녀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고기를 주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녀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를 찔렀고 고기로 만들었어요.

헨젤 : 하지만 먹지는 않았어요.

그레텔 : 그래요. 그래서 그 자리에는 고기가 있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고기는 아니었어요.

형사 : 위험했구나. 고기를 먹고 싶냐고 묻는 건 아주 위험한 징후야. 그런 놈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나 살해자, 이상성욕자, 범죄자란다.

헨젤 : 그렇군요.

형사 : 그래서 그녀를 어떻게 했니?

그레텔 : 무덤에 묻었어요.

형사 : 어느 무덤에? (노트를 꺼내 필기하며) 어느 무덤?

그레텔 : 우리 아빠의 무덤에요.

헨젤 : (비웃으며) 아니야. 그건 우리 엄마의 무덤이었어요.

그레텔 :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 아빠의 무덤 안에 있는 우리 엄마의 무덤이겠지. 그녀가 정말 우리 엄마였다면 말이야.

i11년 6월 2일

우리는 누구에게도 잉태되지 않은 존재들. 잉태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생 없이 존재한다. 우리는 마치 사는 것처럼 살고 있다. 포유동물의 젖에 고개를 묻고 편안하게 출혈하는 어떤 봄 같은 것을 우리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다. 대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말하지 않는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것을 그만둘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찾아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나와 그 애의 관계 포유동물과 포유동물의 관계 가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희생자와 희생자의 관계 가해자와 희생자의 관계. 희생자는 가해자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희생자는 가해자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다. 희생자는 그림자에 연결된 그림자를 멍하게 바라본다. 그림자가 움직인다. 가해자의 긴 그림자가 지구의 자전축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희생자는 장미처럼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희생자의 자궁에는 황홀한 혼수상태에 잠겨 있는 어린 씨앗이 있다. 그것은 마치 달걀처럼 살아 있다. 그것은 마치 달걀을 낳지 않는 암탉처럼 살아 있다. 희생자는 불확정적인 무한함 속에서 희미한 헐떡임을 느낀다. 그녀는 어디인가 여기는 누구인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언어가 모두 소진되고 나면, 그 수 개의 문장들 뒤에 따라올 미래는 무엇인가?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침묵, 악을 쓰고 발버둥치는 침묵, 침묵들이 있다.

혹은 침묵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이 있다. 희생자는 학교 운동장의 벤치에 앉는다. 체육복을 입고 공을 던지는 아이들이 보인다. 희생자는 일찌감치 금 바깥으로 나오고자 했지만 그들은 선의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머리통의 수를 세어보더니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여자가 금 바깥으로부터의 공의 운동과 접촉하기 이전까지 여자는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여자는 바깥으로 나왔다.

희생자는 학교 운동장의 벤치에 앉아 있다. 그녀는 기어다니고 소리지르고 구토하는 나무들을 본다. 환호성을 지르며 공을 던지고 발을 구르는 어린 나무들. 아직 십수 년 밖에 살지 않은. 여자는 갑작스러운 구역감을 느낀다.

희생자는 푸른 물을 질질 흘리는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위에서 누군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녀는 그에게 어떤 신호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갓난아기의 가냘픈 움찔거림처럼. 그녀는 손을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식물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나무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여자는 벤치 위에 올라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고 발을 구르고 공을 던지며 환호하는 어린 나무들, 그들은 여자를 보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듯 가해자의 얼굴을 상상한다. 그는 두 개의 눈구멍과 두 개의 콧구멍과 두 개의 귓구멍을 가지고 있다. 그는 동물성의 신경섬유와 근막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늘고 긴 하늘들을, 대기 위의 무덤들을, 새벽의 검은 우유로 젖어든 목구멍을 가지고 있다. 그는 존재하는가? 희생자는 알 수 없다. 그녀가 희생자라는 사실을 누가 알려주었지? 물론 목소리들이. 다른 모든 사실들에 대해 그러하듯. 그들이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불명확하고 모호한 말로. 그녀가 그것을 잘못 알아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령 그들은 그녀가 가해자이고 그가 희생자임을 전달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혹은 어떤 가해자인 여자와 어떤 희생자인 남자에 대해 말하려 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녀가 아니라면, 그들이 그녀에게 연루되지 않았다면 목소리들은 대체 어째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인가? 그러므로 그녀와 그가 당사자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가장 편한 해석이다. 나아가 그녀가 희생자이며 그가 가해자라고 추측할 만한 몇 개의 소소한 증거들이 있다.

1. 아무도 그녀를 추적하지 않는다. 그녀는 단 한 번의 경찰 조사도 받지 않았다.

2.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3. 그녀는 가해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느끼고 있다. 혹은 그와 그녀의 관계가 그녀를 느끼고 있다.

4. 그녀는 그녀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듣고 있다. 들어왔다.

5. 무엇보다도 그들은 간혹 그녀를 희생자라고 불렀다. 그녀의 몇몇 문장들의 주어는 희생자였다.

그렇다면 범죄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이 가장 어려운 점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그녀가 당한 모든 일들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몇 기억들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을 목소리들이 불러주는 이야기 혹은 혼수상태의 감미로운 악몽과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WAI1년 8월 12일

하얀 벽. 어둠 속 사과처럼 세계가 잉태한 달걀. 그것은 우주를 유영하는 먼지처럼 빛나고 있다. 빛은 가장 어두운 장소이고 어둠은 더 이상 어두워지지 않는 장소이다. 여자는 악착같이 숨을 참아가며 쥐들의 속닥거림을 듣는다.

어미쥐 : 그래 여배우를 연기해 봐 아가 그럼 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어린쥐 : 어머니 (입술을 벌벌 떨며) 나는 여배우예요. 즉 나는 여배우가 아니에요. 그래요. 어머니 말이 맞아요. 내가 새가 되려 할 때 나는 내가 새가 아닌 모든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멈칫거리며) 내가 잘 하고 있나요? 내가 사는 것처럼 살고 있나요? 나는 어디에나 있는 죽음과 삶을 사는 어디에도 없는 자를 알고 있어요 어머니 나는 여배우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배우가 아니죠. 아니에요. 다시 할게요. 나는 여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여배우예요. 어머니 다른 모든 자들이 그렇듯 나도 배우라면 내가 여배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미쥐 : 잠깐, (긴 사이) 안 들리니?

어린쥐 : 안 들려요.

어미쥐 : 어떻게 안 들릴 수 있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아무도 듣지 못할 수 있지? 달걀이 잉태하고 있는 달걀 달걀 속의 세계 세계 속의 달걀 달걀 속의 달걀 어떻게 안 들려? 그러니까 너는 내가 비명을 지르는 동안 내가 오직 침묵만을 배설했다는 말이냐?

어린쥐 : 꼭 그런 말은 아니에요.

i12년 11월 9일

몇 시간 후면 10일이 될 것이다. 내일이 꾸역꾸역 밀려온다. 조금 전에는 11월 8일이었다. 숫자 같은 것은 사실 아무런 상관도 없다. 무엇과? 나와. 혹은 목소리들과. 목소리들은 내가 도망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구체적인 말들은 삼간다. 아폴론 신전의 예언처럼, 아니, 그보다는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목이 잘린 암소가 뿜어낸 핏줄기처럼 모호하고 강렬한 음성들.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어쩌면 그들은 다만 웅얼거릴 뿐, 어떤 말의 전조를 흐느낄 뿐, 아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모든 말을 토해냈고 내가 듣고 있는 것은 그들 말의 긴 반향, 혹은 기억일 뿐인지도 모른다. 도망쳐. 그들이 말한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어둠 속 사과는 붉지 않다. 그것은 달걀처럼 희게 보인다. 그러므로 어둠 속 사과 혹은 어둠 속 달걀. 달걀 속 어둠 혹은 사과 속의 어둠이 내게 속삭인다. 도망쳐.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얼어붙은 포유동물의 뾰족한 젖꼭지가 점차 녹아내리는 동안 나는 한 소년의 등에 업힌 새의 꿈을 꾸었다. 새는 냉동육처럼 단단했고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소년은 마치 새를 잉태할 준비를 하는 산모처럼 보였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그들 목소리들의 광기를 이해하겠는가?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한다. 마치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한 마디라도 말했던가?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말하지 않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말한다. 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넌 도망쳐야 해. 무엇으로부터? 나를 기억하며 동시에 잊어버리는 목소리들로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천 개의 목소리들로부터?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대사를 발명해냈다. 가령

엄마 : 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오빠 : 넌 도망쳐야 해.

아빠 : 무엇으로부터?

엄마 : 달걀이 잉태하는 달걀로부터 달걀이 잉태하는 세계로부터.

오빠 : 유리. 어제 나는 죽은 새의 꿈을 꿨어.

아빠 : 그게 뭐였지? 그걸 뭐라고 부르지?

엄마 : 뭘?

아빠 : 내 왼쪽 다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말이야. 그거.

오빠 : 노화? 죽음?

아빠 : 아, 그래. 괴저. 괴저 말이야. 내 왼쪽 다리에 괴저가 있어. 곧 잘라내야 할 거야.

오빠 : 와아. 아빠. 다리를 잘라내면 그걸 박제해서 인형을 만들어 줘요.

아빠 :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다리 인형 말이냐?

오빠 : 그래요. 아빠. 유리. 왜 말이 없어?

유리 : 말하고 있어 (고개를 숙이고는)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못 들었어?

오빠 : (이상스러운 듯 쳐다보며) 그래. 못 들었어. (의심하며) 정말 말한 거 맞아?

유리 : 그래.

오빠 : (잠시 생각하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유리. 네가 말했던 게 아니라 우리가 말했던 거지. 넌 착각하고 있어. (긴 사이) 아직도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엄마 : 유리. 그러면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누구야?

유리 : (잠시 생각하더니) 나.

아빠 : (걱정스럽게) 그럼 지금 말하고 있는 건?

유리 : (곧바로) 나.

아빠 :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엄마 : 그래. 유리. 우린 지금 심각해.

유리 : (파리한 얼굴로) 알겠어요.

오빠 : 지금 말하고 있는 건 누구지?

유리 : (오랫동안 고민하고는) 나.

엄마 : 그래. 잘했다. 아가.

아빠 : 하면 잘 할 수 있잖아.

오빠 : 그럼 더 어려운 질문을 하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지?

유리 : 나.

엄마 : 세상에. 아가. 유리야. 지금 뭐라고 했니?

유리 : 나.

아빠 : 끔찍하군.

엄마 : 넌 지금 너 자신을 학대하고 있어. 그것도 가장 헌신적인 방식으로. 마치 사랑하듯이 너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랑과 학대는 달라. 가장 다정하고 애틋한 학대조차도 사랑은 아니지. 가장 냉담하고 끔찍한 사랑도 학대는 아니야.

아빠 : 제발. 유리. 넌 나름대로 자랑스러운 우리 딸이야. 뭐 바라는 게 있니?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니? 그들이 네게 오줌을 마시게 했니? 네 입에서 뜨뜻한 지린내가 나서 대답을 못하는 거니? 그들이 네게 달걀을 낳게 했니? (잠시 생각하더니) 그것도 깨진 달걀을?

유리 : 그들이 내게 어둠 속의 사과를 먹게 했어.

엄마 : 가엾은 것. 그건 사과가 아니야.

유리 : 그러면?

엄마 : (잠시 생각하더니 눈물을 흘린다) 그건 달걀이야. (긴 사이) 그러므로 닭이야. (긴 사이) 죽은 닭! (사이) 살아 있는 닭! (사이) 살아있음! 세상에. 얘야 그걸 빨리 토해내. 지금 당장 토해. 토하라고. 토하지 않으면 너는 달걀과 닭, 죽은 닭과 살아 있는 닭을 모두 낳게 될 거야.

아빠 : 진정해. 여보.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났어. 지금 토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엄마 : 그들이 (말을 더듬으며 흐느낀다) 언제 그걸 먹였니?

유리 : (손가락으로 수를 셈하며) 그러니까 (긴 사이) 작년? 아니, 재작년인가?

아빠 : 재작년일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

엄마 : 그럼 작년이겠군.

오빠 : 아 끔찍해라 그럼 넌 오늘 그걸 낳을 거야.

유리 : 뭘?

엄마 : 달걀과 닭, 죽은 닭과 살아 있는 닭! 네 뱃속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니?

유리 : (눈을 감고 여린 목소리로) 그걸 낙태해야 할까?

엄마 : 낙태라니. (소리를 지르며) 넌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어 넌 오늘 그걸 낳을 거라니까?

오빠 : 그럼 오늘 저녁에는 달걀 프라이를 해 먹자. 갓 낳은 달걀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장난스럽게 헛구역질을 하며) 그것도 내 여동생이 낳은 달걀은!

아빠 ; 달걀이 아니라 닭일 수도 있어.

엄마 : 아마 달걀일 거야.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여하튼 오늘 저녁엔 그걸 먹자꾸나.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뼈나 달걀 껍질이나 깃털을 넣고 버리면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거야. 설마 내 딸이 그걸 낳았으리라고는! (흐느낀다.) 태동이 느껴지니?

유리 : 잘 모르겠어.

엄마 : 숨을 참아 봐. 숨을 참고 들으라고.

유리 : (숨을 참고 잠시 후 고개를 젓는다)

아빠 : 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오빠 : 걱정 마. 유리. 네가 뭘 낳든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면 돼.

엄마 : 뼈는 삼키면 안된단다. 아가. 사실 전부 먹어치울 필요는 없어. 누구나 먹다 남은 치킨, 달걀, 깃털, 그런 것들을 버리고는 하니까.

유리 : 그러고 나면?

엄마 : 그리고 우리는 떠날 거야.

오빠 : 우리는 떠날 거야.

유리 : 가지 마.

아빠 : 그럴 순 없단다. 미래는 변하지 않고 과거는 변할 수 없으니까.

유리 : 너희는 꼭 너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듯이 말하네.

오빠 : (키득거리며)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잠시 생각해보더니) 사실 너는 말한 적이 없지만.

유리 : 나는 기다리고 있어. 끝을. 끝이 내게 찾아오기를 하지만 그것은 결코 나를 찾아오지 않아. 신이 영원히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처럼, 그 하나의 무한한 영원,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그러므로 끝은 내게 오지 않아. 하지만 난 그것을 찾아 나설 수 없어. 내 위치, 내 장소가 나를 빌어먹을 피막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어. 내가 가진 것은 오로지 기다림뿐이야. 그런데 오빠, 난 가질 수 있는 것은 없는데 바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도 더 많아서 그것 때문에 죽어가고 있어.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은 오지 않아. 살아 있지만 삶이 내게 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태어난 기억도 없이 어쩌면 태어남조차도 없이 살아 있어. 죽음 없이 죽어가고 있어. 내가 하나의 달걀을 낳고 아니 어쩌면 닭을 낳고 그러고 나면 다들 사라질 거지? 다들 가버릴 거지? 제발 날 데리고 가. 그렇지 않으면 여기 나와 함께 남아줘.

엄마 : 얘야. 아가. 유리. 너는 착각하고 있어. 우리는 결코 떠나지 않아. 떠나지 않은 우리만이 네게 남아 있잖니.

아빠 : 그러니까 네 부탁은 이미 실현된 것이기도 하고 또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단다. 우리는 이미 떠났고 우리가 떠난 미래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오직 떠날 수 없었던 우리만이 네게 남아 있으니까.

유리 : 왜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어?

오빠 : 그걸 우리에게 물어봐야 소용 없어. 그들은 우리도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너와 함께 남았지. 우리는 너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

엄마 : 네가 그들을 원하고 기다리는 만큼, 꼭 그만큼 우리도.

유리 : 나는 기다리고 있어. 끝을. 시작을. 아니 정확히 뭘 기다리는 거지? 끝의 시작? 혹은 시작의 끝?

아빠 : 그런 걸 고민할 필요는 없어. 끝도 시작도 너를 듣고 있지 않으니까.

유리 : 뭐? 그런데 너희들 정말 말하고 있는 거야? 어디에서? 바깥에서? 안쪽에서? 내 안의 소리와 바깥의 소리를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어. 언제는 그걸 구분할 수 있었던가? 나는 다만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야 어쩌면 그것만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 나는 고막이고 피막이고 나의 경계야 하지만 나는 안도 밖도 아니야 나는 안에도 밖에도 없어 나는 어디에도 없어 나는 아무도 아니야 나는 고막도 피막도 나의 경계도 아니야 귀는 느껴지지 않는데 귀에 고인 말들만 느껴져 입은 느껴지지 않는데 입에 고인 말들만 느껴져.

오빠 : 그래. 우리는 바깥도 안도 아니야.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어. 우리는 네 고막이고 네 안이고 네 피막이고 너의 경계이지만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지 처음부터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었다면 유감이지만. (미소지으며) 그래도 우리는 너를 사랑해. (미소 사라진다.) 들리니?

유리 : 뭐가?

오빠 : 네 목소리 네 침묵 소리 없이 네 입 속에서 바글거리는 말들.

유리 : 그게 태어나면 (우물쭈물거리며)그게 전부 태어나면 그게 전부 태어나서 내 입을 물어뜯으면 (긴 사이) 나는 죽을까?

엄마 : 그렇지 않아 얘야. 다른 모두가 죽어도 너는 죽지 않아. 너만은 죽지 않아. 너만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아. 너만이 시작도 끝도 없이 살아 있어.

유리 : 살아 있다고? (사이) 정말? 나는 내가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내 말들? 내 시간? 하지만 (사이)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 너희는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 마치 내가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오빠 : 너는 살아 있어. 거미줄에 매달린 장미 꽃잎처럼, 로드킬당한 비둘기처럼, 수영장에서 익사한 어린 고래처럼, 영속적으로 와해되어가는 영혼으로, 너는 살아 있어.

유리 : 정말? 어둠 속의 사과처럼 내가 그렇게 살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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