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12년 11월 9일 – i11년 11월 11일

끝인가? 이걸로 끝인가?

아니다. 여하간 나는 끝을 기다리고 있지만 끝은 찾아오지 않아. 왜냐하면 살아있음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꿈이니까. 교통사고로 깨져버린, 연약한 세공품 같은 비둘기의 머리통, 그 얼굴과 머리 사이의 간극은 무한한 거야. 오 그러나 오직 비둘기에게만, 로드킬 당한 비둘기 자신에게만 무한한 것이지. 나는 멍청하게도 기다리고 있어. 거미줄에 매달린 장미 조각처럼. 거미는 그걸 건드리지도 않지. 그것이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야. 그것이 더는 뒈져버릴 수도 없음을 알아차린 거야. 그러나 그것이 이미 뒈져 있는 것은 아니지. 정말 아니야 그것은 아직 살아 있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길고 가느다란 자국이 보이지. 그건 거미줄이야. 거미가 그녀의 섬들을 연결해놓은 다리, 공중곡예사의 줄이야.

그런데 이게 끝인가?

아니야.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았어. 할 말은 매일 매일 생기지. 매 시간이나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내일이 복받쳐 올라올 때마다 내일이 입구멍을 쑤셔 발길 때마다 내 입 속에서 드글거리던 짐승의 언어가 우글거리면서 솟구쳐 올라온단 말이야. 끝나지 않아. 끝은 오지 않아. 끝과 끝 사이의 영원을 어떻게 감당하면 좋지? 그러므로 살아가는 시간을 조금씩 소비해나간다는 소시민의 알량한 태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영원은 절대 줄어들지 않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 무한-1=무한-100억=무한이야 그 정도는 수학 문제집을 풀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오 또 새로운 할 말.

꼭 십 년 뒤 미래에 나를 찾아오게 될 돼지 목장 남자에 대한 이야기. 예언은 반드시 도래하리니. 육신을 가지고 지독한 냄새를 갖고 도래하리니.

사실 거짓말이야. 왜냐하면 나는 십 년이 지난 뒤에 글을 쓰고 있으니까. 날짜들 숫자들 과거들 사실들 연극들 사실 전부 다 거짓말이야. 11월 10일이든 i11년이든 i21년이든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장난이야 왜냐하면 나는 마구잡이로 썼으니까. 사실 시간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것들은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덧붙여진 숫자고 숫자들 숫자들 숫자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니까. 나는 마구잡이로 숫자들을 적었고 그것을 적는 순간 나는 그 숫자를 잊었고 그 숫자 바깥에서 나는 마치 그 숫자에 속해 있는 것처럼 썼지만 사실은 이미 모든 숫자들이 지나갔고 나는 그 지나간 숫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숫자들이 마치 돌아온 것처럼 굴었으니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구분 같은 것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오늘은 본질적으로 어제고 내일은 본질적으로 오늘이며 어제는 본질적으로 오늘이니까.

돼지목장에서 어린 돼지가 태어났다. 당연하다. 거기서는 언제나 무엇인가 태어나니까. 돼지는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돼지 고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집트의 성자 앙투안은 혹은 돼지 목장 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살찌우기 위해 혹은 그 자신이 살기 위해 돼지들을 기르고 있었다. 혹은 죽기 위해 길렀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죽기 위해서는 죽기 전에 살아 있어야 하니까. 창자는 춤을 추듯 미약하게 움직여야 하며 심장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어야 한다. 가죽 주머니는 터지지 않아야 하고 뇌는 세로토닌이 과다 분비되어 줄줄 흘러넘치지 않는 상태여야 한다. 침은 생식기를 적시는 대신 입구멍을 적셔야 하며 혀는 항문 속에 박혀 있어서는 안 된다. 잠깐이야 그럴 수도 있지만 영원히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돼지 목장의 성자는 새끼 돼지를 헌신적으로 학대했다. 마치 그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새끼 돼지는 성자를 믿고 따랐다. 그 애의 어머니는 이미 창자가 쏟기고 눈알이 파이고 목이 따여서 돼지고기로 팔려갔으니, 육시를 당하고 능지처참을 당하여 플라스틱과 비닐 랩 사이에서 조용히 부패해가고 있으니 새끼 돼지는 자기에게 친모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새끼 돼지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어린 아이의 내장을 적시는 달콤한 사탕, 입술이 헐고 목구멍이 녹아내려도 계속 빨고 싶은 그 감미로움, 그 축축함, 새끼 돼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새끼 돼지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 애는 불행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애는 어항에 사는 물고기들의 방식으로, 거미줄에서 태어난 구더기들의 방식으로, 사육장에서 태어난 달걀의 방식으로 행복했다. 오 그 행복은 다른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행복이여 엿 먹어라 순수여 뒈져라 진실이여 뒈져버려.

새끼 돼지는 헌신적인 학대로 점차 자라났다. 태어남도 기억도 미래도 기대도 없는 축축하고 따끈한 지린내 속에서 새끼 돼지는 행복했다. 그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매일 같은 천국 매일 같은 지린내 매일 같은 따뜻함. 매일 같은 남자의 손이 새끼 돼지를 쓰다듬었다. 남자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새끼 돼지를 사랑했다. 남자는 새끼 돼지에게 더 많은 사료를 주었고 간혹 새끼 돼지에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남자는 돼지들과 같은 포근한 지린내를 풍겼고 돼지들과 같은 곳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남자는 눈먼 새끼돼지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다. 어느 날 남자는 오줌보다 더 묽고 투명한 물기가 새끼 돼지의 벌거벗은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얘기를 하고 있지? 내가 왜 아직도 지껄이고 있지? 말들은 물기가 말라서 버석하고 심지어는 날카롭기까지 하다. 말들의 말라빠진 모서리가 내 혀와 입 속을 할퀸다. 오 그래 지껄일 때마다 피가 흘러내리는데 그것이 내 날카로운 말들을 조금 부드럽게 적셔 준다. 그뿐이다. 나는 계속 지껄이고 지껄일 때마다 내 입은 조금씩 훼손되고 훼손되어 흐르는 피가 내 입을 살아 있게 만든다. 나는 내 입을 느낀다. 내 혀를 조용히 적시는 새끼 돼지의 눈물을 느낀다.

남자는 새끼 돼지와 함께 울고 있었다. 조용하고 빌어먹을 눈물. 그들은 찢어진 방광에서 오줌을 질질 흘리듯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아 아가 괜찮아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을게. 남자는 돼지의 멀어버린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며 애걸하듯 속삭였다. 아가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그래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남자는 새끼 돼지를 죽이지 않았다. 다른 모든 돼지들이 시체가 되는 동안에도 새끼 돼지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것은 늙어버린 뒤에도 여전히 작고 왜소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죽여서 남자가 얻는 이득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것을 죽이지 않고 계속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새끼 돼지의 눈은 언제 멀어버린 거지? 남자는 눈물로 축축한 새끼 돼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언제? 대체 언제?

새끼 돼지의 모호하고 불투명한 잿빛 눈이 남자의 얼굴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반사하고 있지 않았다. 약간의 빛과 물기만이 그곳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눈먼 거울 불구가 된 거울 서글픈 거울.

나는 그만뒀어. 아니 아직도 그만두지 못했어. 있지도 않은 눈들과 대답 소리를 찾으려 안간힘 쓰는 일.

남자는 내게 비디오를 하나 빌려주었다. 비디오 속 여자는 나를 보려 했다. 그녀의 하얗고 불투명한 얼굴. 그녀의 눈먼 거울. 그녀의 귀신 얼굴. 그녀의 실종된 얼굴. 그녀의 머리칼은 부드러운 커튼처럼 그녀의 흰 달걀을 덮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나는 죽을 것처럼 외로웠다. 그녀가 이미 죽었으므로 우리는 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이미 죽었으므로 그녀와 나는 입을 맞출 수 없었다. 그녀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새끼 돼지의 눈은 언제 멀어버린 것일까? 남자는 생각했다.

더 깊은 나락들만이 우리의 빌어먹을 보물이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존재했던, 그리고 존재하고 있는 것들. 남자는 생각했다.

나를 데리고 가지 않을 거라면 여기 나와 함께 남아 줘. 새끼 돼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우리는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데 우리는 죽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닌데. 남자는 생각했다. 어떻게 아무도 듣지 못할 수 있지 내가 우리가 이렇게 지껄이는데 어떻게 아무도 우리가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데 어떻게 아무도 어떻게.

나는 먼지로 만든 인형을 끌어안는다. 인형은 은하가 자전하는 만큼 고요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인형은 로드킬 당한 천사만큼 고요하고 끔찍하게 무너지고 있다. 비둘기에게는 오직 비둘기의 죽음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니?

공원으로 나가면 미친 듯이 발작하며 뛰어다니는 어린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질처럼 붉고 검은 열매들을 매단 채 뽑혀나간 뿌리로 뜀박질하는 나무들. 그들은 다시는 땅 속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뿌리로 뛰어다니고 깊은 구멍으로 비명을 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나무들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감미로운 식물성의 잠에서 깨어난 시끄러운 새들. 문학은 미쳐버린 앵무새이다. 나는 아직도 시를 쓴다. 소리를 갖지 못한 단어 하나하나가 유리조각처럼 내 입 속을 넝마로 만드는 동안에도 나는 탐욕스럽게 그 단어들을 짓씹고 삼키고 게워내고 있어.

새끼 돼지는 언제 눈이 멀었지? 남자는 생각한다. 몇 개의 문장 뒤에 우리가 우리의 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남자는 생각한다. 새끼 돼지는 입이 벌어진 심장처럼 웃고 있다. 새끼 돼지는 연약하고 부드럽다. 와인이나 맹물에 넣고 끓인 돼지고기처럼. 아직도 따뜻하다. 남자는 허공을 응시하며 부드러운 노래를 흥얼거린다. 물 속에서 삶아지는 어린 양의 허벅다리처럼 부드러운. 우물 속의 여자는 점점 나를 닮아가다가 갑자기 찢어진 입을 외설적으로 드러내며 웃는다. 뭐가 웃겨? 네가 나를 보는 게 네가 나를 보려 하는 게 네가 나를 보지 못하는 게 그리고 내가 너를 보는 게 내가 너를 보지 못하는 게. 어째서 내가 눈 멀기 전에 나를 보지 않았니? 내가 내 눈물에 익사하기 전에 어째서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니? 내 심장이 멈추고 내 입술이 녹아 없어지고 내 탄식이 나를 찢어발기는 동안 거미줄에 걸린 장미는 찢어진 입술로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노래한다.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 노래가 남지 않을 때까지, 노래가 남지 않아도, 그녀는 노래한다.

새끼 돼지는 언제 눈이 멀었지? 황홀한 역겨움이 그의 목을 조르고 그는 깨닫는다. 그가 돼지들과 함께 돼지들의 도살장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그가 이곳에서 살았으므로 그가 이곳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언제? 이해를 못하는군. 언제 같은 건 없어. 그가 말한다. 새끼 돼지의 목소리로 끽끽거리며 어린 짐승의 울음으로 꿀꿀거리며 그가 말한다. 행복한 어린 돼지. 행복 속에 냉장된 돼지는 찢겨지는 아픔도 거북스러운 숨 막힘도 없이 행복할 것이다.

새끼 돼지는 언제 눈 멀었지? 남자는 생각한다. 행복하고 부드러운 새끼 돼지, 그러나 은밀하게, 새끼 돼지는 기다리고 있다. 어둠 속의 붉은 사과. 아직 그것은 검게 보이지만 곧 돼지는 그것이 붉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멀어버린 불구의 눈으로 그것은 붉음을 삼킬 것이다. 그것은 피를 흘릴 것이다. 어린 돼지는 배신당할 것이다. 열매는 피투성이이고 가시가 박힌 입천장도 피투성이이고 그 애의 현존 역시 피투성이일 것이다. 그 애가 가시 사과를 멀어버린 눈으로 쑤셔넣어 삼킨다면 그 애의 눈 역시 돌이킬 수 없이 피투성이일 것이다. 그래서 그 애의 눈이 멀어버린 걸까? 미래의 상흔 때문에? 미래의 탐욕 미래의 불행 미래의 비극 미래의 붉음 때문에? 오 그것은 불행할 것이다. 새끼 돼지는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눈물로 축축한 눈으로 그것의 검은, 혹은 붉은 눈을 바라본다.

i11년 11월 11일

나는 자주 나 자신의 시체를 상상하곤 해. 황홀한 발산과 이글거림, 혹은 조용한 무너짐과 녹아내림. 언젠가 내가 나 자신의 시체를 볼 수 있을까? 언젠가 내가 나 자신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을까? 천사처럼 혹은 구더기처럼 흰 뼈와 그 위를 덮은 붉은 살을?

오늘은 언제인가? 오늘 그 애는 여기 있었던가? 아무래도 좋아, 괜찮다고 말했잖아.

오빠 : 아직도 모르겠어? 지금 누가 말하고 있는지

목소리, 목소리, 목소리들. 내게 가족이 있었던가? 내게 내가 있었던가? 내게 내가 아닌 자들이 있었던가. 신의 눈 앞에 한 마리 새끼쥐가 서 있다. 신은 수천 개의 날개뼈로 둘러싸여 있었다. 날개뼈에서 돋아난 하얗고 건조한 깃털들. 내가 살아 있다고 누가 처음 말했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지? 어린 쥐는 작고 역겨운 주둥이를 움찔거리며 속삭였다. 신이여 내 소원을 이루어줘요 신이여 나는 여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신이여 나는 달콤한 갈채로 질식해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신이여 모두가 나를 보는 무대 위에서 나는 죽고 싶습니다. 신은 그 애의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신은 그 애에게 벌을 주었을까? 아니면 그 애를 구원했을까?

어린 쥐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신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착란 새 태양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신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오래 전부터 나를 보아왔다는 듯이. 너무나 오래된 깃털들에서는 쉰내가 난다.

어린 쥐: 나는 악마처럼 아름답고 천국처럼 쓸쓸해요. 왜 나는 무대 위에 설 수 없어요? 왜 나는 무대 위에서 토하고 웃고 사랑하고 죽을 수 없어요? 내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하지만 당신은 알아야 해요. 그 기도들이 얼마나 많은 알약으로 쌓였는지. 브롬메탈린 콜레칼시페롤에 구원 있으리 한 조각의 푸른 알약에 새벽의 검은 우유를 더럽히는 브롬메탈린에 구원 있으리. 그녀는 두 개의 검은 눈을 가지고 있죠. 허공의 잠자리 허공의 성, 모래들이 그녀의 입 안에서 무너져내리고 그녀는 그녀의 혀를 토해내요. 그녀가 뭘 연기하고 있는지 들어볼래요? 그녀는 하나의 알을 연기하고 있어요. 오 아니에요. 그녀가 왜 그것을 낳았는지 아무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처럼 말이에요. 어떤 삶에는 마치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죽음에는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웃으며) 뭐라고요? 그래요 나는 사실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요. 내 영혼이 무너져내리고 내 것이 아닌 보물이 내 심장을 찢어발기는 동안에도 내 것이 아닌 언어가 내 입을 불태우는 동안에도 나는 기다리고 있어요. 난

(긴 사이)

여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여배우가 할 법한 말을 하고 몸짓을 하고 여배우가 지를 법한 소리를 지르죠. 그렇지만 여배우의 삶 여배우의 미래 여배우의 비극 여배우의 최후 그런 것은 내게 안배되어 있지 않아요.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누구의 탓도. 단지 나는 그걸 원하는 걸 멈출 수 없을 뿐이에요. 어둠 속에서 내가 찍찍거리고 있는 걸 들키고 싶을 뿐이에요 발가벗고 무너져서 혐오스러운 진흙탕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내 오물이 달빛 아래 어떤 사물을 더럽힐 수 있으면 좋겠어. 내 오물이 내 천사가 내 신이 무언가를 적실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런데 이제는 정말 하얀 것이 하얀 벽 하얀 종이 하얀 것 텅 빈 것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 무언가 불순한 것, 순결로 불순한 것, 그것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

신이여 그래도 내 기도를 들어주는 건 당신뿐이군요. 그래도 내가 기도 드릴 이는 당신뿐이에요. 버러지처럼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먼 곳으로부터 왔죠 어쩌면 아직도 먼 곳에 있죠. 이름도 방위도 없는 곳에. 이제 자조하고 싶지는 않아. 자조하는 건 너무 쉽고 지긋지긋한 일이야. 이 지긋지긋한 기도, 신, 어둠 속 사과, 내 뱃속에서 썩고 있는 새벽의 검은 우유. 부엌의 여자는 내가 그녀의 특별한 요리를 마시고 천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죠. 어떤 날개가 움직이고 있어 흰 벽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 나는 백치가 되어버렸네. 검은 우유 속에 처박힌 보물들의 쓸쓸함. 지구 반대편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사물의 그림자들의 서글픔. 도로 한복판에 버려진 사슴의 시체는 누가 치우는 걸까. 구제역에 걸려 단체로 매립된 돼지들은 땅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많은 꽃들이 피어 있는 화단에서 늙은 장미의 그림자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옥상에서 투신하는 무력한 비둘기를 보고 사람들은 왜 웃었던 걸까. 그때 그 웃음 그때 그 농담 그것들은 무슨 의미였던 걸까. 신이여.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하나니 나는 오직 나의 기도를 위해 기도하나니. 곰팡이 핀 빵 곰팡이 핀 당신의 살 살 위에서 피어난 꽃 나는 그것들을 위해서 기도하나니.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나에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누구였지?

내 그림자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 어둠 속의 하얀 눈동자. 쥐약이 든 우유 속의 새하얀 눈동자. 살인자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가 문턱을 밟고 가면 나는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녀가 문턱을 밟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면 나는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 뒤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그녀를 죽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구 내가 아닌 신들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여자는 욕실 속을 떠도는 허공을 불투명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속삭여요.

참, 내가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는지 당신에게 말했던가요? 나는 침울한 쾌감을 느끼며 내 비명을 바라보고 있어요. 나는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 단지 그것뿐이고 세계는 견딜 수 없이 느리고 서글픈 속도로 와해되고 있어요. 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 삶이 예술이라는 것뿐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실패기 때문이죠. 오르페우스의 새가 천사의 알을 뒤덮은 구더기들을 쪼아먹고 있어 천사의 구더기들이 오르페우스의 새를 갉아먹고 있어. 보물은 네 안에 있어. 오, 들어 보았나요? 그 대사는 내 역작이었죠. 새는 소녀에게 말했고 착한 소녀는 그녀의 긴 손톱과 포크로 그녀의 여린 속살을 헤집어댔죠. 끝까지 봤어요? 그럼 거기서 뭐가 나왔는지 알아요? 뭐가 나왔는지? 허공을 헤집어 쑤시는 백조의 부리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요? 아, 당신이 한 마디만 해준다면 좋을 텐데. 아 혹은 오 혹은 어 하는 빌어먹을 신음이라도 좋은데.

그래요. 당신은 대답하지 않죠. 당신은 어쩌면 거기 있지도 않죠. 당신은 당신의 시체를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당신의 진짜 얼굴, 뼈와 살로 된 진짜 얼굴을 마주본 적이 있나요. 당신의 얼굴이 지금 당신을 보고 있나요. 천국같이 조용하고 서글픈 나날이에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도. 그래요 내일은 오지 않아요. 내일은 언제나 오늘 혹은 어제일 뿐이죠. 내일은 오지 않아요. 우리는 내일이 존재한다는 망상과 함께 살아갈 뿐이에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도 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오늘은 내일이나 어제보다도 더 빌어먹을 추상이고 관념이기 때문이죠. 천사의 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백조처럼 빌어먹을 망상일 뿐이기 때문이죠.

제발 말 좀 해봐요. 내가 이렇게 지껄이는 동안 당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래요. 당신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이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부드러운 장밋빛의 먼 지평에서 나는 한 마리 늑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게 내 여배우가 연기하는 배역의 내용이기 때문이죠. 그것 외에도 나는 고래 뱃속의 피노키오 화성의 창녀 화석이 된 새 등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어요. 유리병 속에 담겨 있는 편지처럼 고통스러운 언어로 나는 희망하고 있어요 희망, 밤과 새벽의 틈에 서식하는 비밀스러운 존재들의 희망. 허파들의 감미로운 움직임이 떠벌리는 모호한 헐떡임의 희망. 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나요? 그들도 그렇게 말했죠 내가 살아 있다고 그런데 누가 처음 그 말을 했던가요? 내가 살아 있다는 말. 그림자들이 신처럼 당신처럼 내게 무관심하다는 말. 그러나 침묵들은 무관심하지 않죠. 비명을 지르는 그 유명한 침묵들은. 내 얼굴에 염산을 끼얹고 내 목을 조르는 섬세한 멸시. 누가 그 말을 했죠 별은 인간을 위해 빛나지 않는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나요?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나요? 아직 그리고. 내 눈동자에 들러붙은 역겨운 피의 문자들. 내 각막을 녹여내는 눈동자의 반영들. 신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은 빌어먹을 백치고 귀머거리에 벙어리야 당신은 끔찍한 유령이야. 신이여 내 눈 먼 짐승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누군가 내 벌어진 상처를 축축하고 부드러운 눈물을 눈멂을 숨기고 있는 눈꺼풀을 벌리고 그 속에 달콤하고 고통스러운 사탕 파편들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내 눈구멍 속으로 들어가 더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 내 여린 두뇌에 생채기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미쳐버렸습니다. 신이시여 그래서 나는 미쳐버린 겁니다. 인간에 두뇌에 들어가서는 안될 이물질이 나를 더럽혀서 그래서 내가 미쳐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있나요? 내 머릿속에? 내 눈꺼풀 속에? 내 안구 깊은 곳에 그것이 정말 있던가요? 말해 줘요. 제발 내 안에 그게 있다고 말해요. 나를 녹이고 훼손시킬 정도로 달콤한 것이.

소녀는 천사처럼 하얀 뼈와 마주칠 때까지 파고 또 팠습니다. 소녀는 아팠습니다. 소녀는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소녀는 계속 팠습니다. 하얀 새는 날아가지 않고 계속 소녀의 옆에서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니, 햇빛의 방향이 조금 변할 때마다 소녀의 그림자가 조금 기울어질 때마다 새는 사라졌지만 또 나타났습니다. 나타났지만 또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하얀 모래성을 파헤치듯 그녀의 흰 살을 더 이상 희지 않은 살을 파헤쳤습니다. 카네이션처럼 붉으며 벌레처럼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소녀로부터 끝없이 떨어져내렸습니다. 붉고 우글거리며 살아 있는 무언가. 그것이 소녀로부터 떨어져내렸습니다.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왜냐하면 우리는 천사가 아니니까. 왜냐하면 새의 날개를 뼈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를 가진 천사는 천사가 아니니까. 고기가 되어버린 천사는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스테이크의 벌어진 살점 속에 비치는 순결한 피도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테이블에서 이탈한 은색 포크도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입 속에 들어 있던 붉은 잎사귀들도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언제나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천박하고 순결한 장미처럼 나비의 흰 이빨처럼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Series Navigationi11년 3월 1일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