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양과 장미

앨리스는 영화를 찍었다. 그녀는 주연배우였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영화 어디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찾을 수 없다.

엔젤 스테이크

그녀는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였다. 아무도 그녀가 무엇인지,
그녀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아냐는 천사가 되면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천사들은 매일 신에게 풀어달라고 애원했지만 신은 알아듣지 못했어.

그레텔과 헨젤의 새

실종자 아이(들)의 이야기.

여자가 가벼운 입맞춤을, 입맞춤의 궤적이 올라탈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었다면. 그러나 그녀에게는 깊고 흉측한 심연의 미소밖에는 남지 않은 것을. 숲은 역설적으로 나른한 정적 속에서 익사해가고 있었다. 아 하지만 아무도 익사할 수 없는, 아무도 죽을 수 없게 만드는 우글거리는 물거품들. 끓어오르는 우유처럼 부드러운 중량감으로 떠오르는 세계의 윤곽들. 여자는 불법적인 꿈을 꾸는 늙은 성직자처럼 울었다. 허락받지 못한 탯줄의 그림자가 그녀의 미지근한 젖가슴 위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늙었고 너무 늦게 태어났고 아기처럼 울부짖기에는 너무 지쳤다.

멸종된 짐승들

히스테리 짐승들.

그들은 끔찍한 굴욕과 슬픔 속에 웅크린 채로 말을 구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원하므로. 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으므로. 있지도 않은 말을, 말이 되지 않는 말을, 원하므로, 원하므로, 너무나 원하므로.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미친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말을 하고 싶어서 미쳐버렸다는 걸 안다.

(<<악착같은 장미들>> 미출간 내용을 올립니다.)

피나무 유령

아이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유령이 있다고.

<2019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동상 수상작>

현의 행성들

붉은 행성에 소녀는 혼자 남았다. 그녀는 그녀의 언어의 유일한 생존자다.

내일의 하루살이들

굳이 숨을 쉬지 않아도 욕망하지 않아도 움켜쥐지 않아도. 제 밑을 찢어내며 같은 겨울을 맴도는 열차에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창문들이 돋아나 있어. 죽음에는 등도 뼈도 없는데 등이 굽은 방랑자를 보고 헤어지지 못한 귀신의 얼굴을 떠올린 사냥꾼은 무엇을 쫓고 있었던 것일까. 창에는 내부도 외부도 없다. 그저 너머와 너머 서로의 금과 금의 바깥이 있을 뿐이다. 네가 망가뜨린 시간에는 계절도 날짜도 없다. 회고의 날들을 추억하는 시인에겐 고향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접점이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접붙일 수 없는 말들을 억지로 엮어가며 시를 낳는 것은 아니다. 묽은 체액을 먹고 짙은 먹빛으로 번져가는 말들을 읽고 우리는 자란다. 우리는 우리가 마실 수 없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 우리는 우리가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삼키며 자란다. 말을 살찌우는 것이 논리가 아니듯 시를 살찌우는 것이 언어는 아니다. 향기롭기보다는 비극적인 추억을, 비극적인 추억보다는 도착적인 시간을 원할 때가 있다. 향기롭지도 비극적이지도 도착적이지도 않은 시간을 쓰는 삶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어휘 없이 모든 것을 부르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러한 순간들은 인화지 없이 찍어낸 사진과 같아서 기록될 미각도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어떠한 감각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애써 그러모은 빛의 얼룩을 순식간에 상실한 채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필름 없이 빛만으로 찍은 사진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