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배, 너무나 살아 있음에 대한.
살아 있음. 그것은 괴물이다. 살아 있음. 그것은 숭배의 대상이다. 살아 있음. 그것은 현기증나는 무너짐이다. 나는 리스펙토르에게서 살아 있음과의 구역질나는 접촉을 보았다. 끔찍하게 무표정한 어떤 바퀴벌레의 살아 있음. 거미줄에 매달린 장미의 살아 있음. 자동차에 짓밟힌 소녀의 살아 있음. 그녀는 살아 있음을 원한다. 살아 있음을 마주하기를 살아 있음을 지켜보기를, 살아 있음 앞에 살아 있기를 원한다. “나는 궁금하다. 확대경을 통해서 어둠을 관찰하면, 어둠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지. [,,,] 확대경으로 빛을 관찰하면, 충격적이게도 더 많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보았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눈먼 상태였다.” 태양을 바라보는 눈먼 여자의 멀미. 나는 리스펙토르로부터 어떠한 무너짐, 서글프고 열렬한 숭배를 느꼈다. 숭배, 그것은 장미 잎사귀 속에서 태어나는 한 마리 구더기의 가녀린 움직임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일이다. 무엇인가 끔찍한 속삭임들이 머릿속에서 비등하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이 터지고 그 구멍으로 내장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보는 것이다. 보고 느끼는 것이다. 너무나 느끼는 것이다. 『G.H.에 따른 수난』은 끔찍스럽게 아름다운 생명에 숭배를 바치는 기록이다. 화자인 여자는 옷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기어나오는 바퀴벌레와 마주한다. 그녀는 매혹당한 신도의 혼몽과 경건함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겨움으로 바퀴벌레를 면밀히 관찰한다. 그것은 살아 있다. 오, 그것, 오로지 살아 있음으로 발가벗은 그것, 그녀는 그것이 살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면에서 고동치는 위대함이 나를 압도했다. 용기의 위대함이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공포가 결국 내게 용기를 심어준 것이다. […] 방금 전 나는 내 감정이 오직 분노와 역겨움이라고 가볍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 예전에는 결코 몰랐던 사실을 정확히 깨달았다.” 그녀는 역겹고도 위대한 살아 있음 앞에서 거대한 현존의 감각을 느낀다. 그녀의 내부에서 공포와 함께 비등하는 어떤 출혈, 어떤 삶. 그녀는 분명히 그것을 느낀다. “바퀴벌레의 몸 위로 옷장 문을 힘껏 닫”은 뒤 온몸을 덜덜 떨며 그녀를 잠식하고 발가벗기는 쾌감을 느낀다. 그녀는 그녀의 혀 위에서 나는 기이하고 낯선 맛을 느낀다. 그녀는 그녀의 이상한 맛을 느낀다. 그녀는 그녀 안의 그녀를, 그녀 안의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녀와 함께, 나는 내 안에서 우글거리는 바퀴벌레들을 느꼈다. 그것들의 다리 그것들의 날개 그것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전부 살아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부터 밖을 벌리며, 밖에서부터 안을 헤집으며 움틀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안도 밖도 없다. 나는 그녀, 리스펙토르의 그녀, 그녀의 바퀴벌레와 함께 말했다. 사실은 안도 밖도 없다. 오직 미칠 듯한 살아 있음, 처음도 끝도 없이 존재하는 살아 있음뿐이다.
리스펙토르의 현기증나는 기록은 계속된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런 채로 서 있었다. 온몸을 덜덜 떨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아마도 그 순간에 난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퀴벌레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한 짓을 묻는 질문이었다. […] 내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사납게 뛰는 심장과 파르르 떨리는 관자놀이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짓을 했다. 나는 죽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환호가 터지는 것이며 더구나 이렇게도 무한한 환호가 용인되는 이유는 뭘까?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살해의 순간을 기다려왔단 말인가?” 그녀가 살해한 것은 무엇인가? 살해당한 것은 살아 있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죽음이다. 그녀는 곧 “살아 있는 반신상”처럼 옷장 문 밖으로 튀어나온 바퀴벌레의 몸통 절반을 발견한다. 바퀴벌레는 죽지 않았다. 살아 있음은 삭제되지 않는다. 죽음이 도래하는 순간에도, 가령 『별의 시간』의 주인공인 마카베아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에도, 죽음은 살아 있음을 초월하지 못한다. 여자는 구역질 나게 살아 있는 바퀴벌레를 본다. 그것의 상처로부터 흰 내장이 비어져나온다. 여자는 살아 있는 벌레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녀가 무너뜨리고 그녀가 발가벗긴 어떤 생으로부터 생의 물질, 생의 축축함, 생의 역겨움으로부터 그녀는 도망칠 수 없다. 여자는 홀린 듯 벌레를 바라본다. 마치 사로잡힌 것이 벌레가 아니라 그녀 자신인 것처럼. 마치 영원한 불구가 되어 생을 멀뚱히 마주하고 있는 것이 벌레가 아니라 그녀인 것처럼. 그녀는 바퀴벌레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가까이, 그러나 영원 같은 거리의 변증법을 품고서. 그녀는 바퀴벌레의 얼굴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표정을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 아마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내가 벌레의 얼굴 표정을 보지 않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1000분의 1초 정도인 그 짧은 찰나 때문에,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나는 보고 말았다.” 그녀는 바퀴벌레의 얼굴을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듯 면밀하고 대담하게 관찰한다. 윤곽이 없는 얼굴, 주둥이 가장자리에는 더듬이가 수염처럼 솟아 있고 다면체의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바퀴벌레가 진짜 얼굴을, 진짜 삶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는 경악한다. “사실 바퀴벌레를 지금처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었다. […] 한 번도 그들과 마주한 경험은 없었다.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닌, 그러나 동시에 그녀 자신의 것인 살아 있음을 마비된 응시로 대면한다. “내가 본 것, 내가 홀린 듯이 뚫어지게 바라본 그것은, 오직 한없는 고통, 황망한, 그리고 순수함, 내가 뚫어지게 바라본 그것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생명이었으므로.” 바퀴벌레는 살아 있다. 축축하고 흉측한 진흙탕처럼, 그녀의 창자처럼, 그녀가 한 번도 마주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신체 내부처럼 그렇게 살아 있다. 바퀴벌레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신의 얼굴, 금지되어 있는 생의 얼굴을 발견한다. 마치 진흙탕 같다고 그녀는 “역겨워하면서 감탄”한다. “하늘에 고정된 태양 안에 존재하는 바로 그 생명, 움직이지 않는 바퀴벌레 안에 존재하는 바로 그 생명. 그 생명이 내 안에도 있다” 그녀는 생명들의 역겹고 감미로운 공명을 느끼면서 “두 번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응시는 그토록 위험한 것이다. 그녀는 규칙과 법, 질서의 세계로부터 추락하는 것을 느낀다. 추락은 그녀가 상상하지 못했던 깊이로 그녀를 몰아붙인다. 그녀는 끝없이 떨어져내린다. 그녀는 법과 규칙, 행복한 일상의 세계로부터 파문당한 채 “살아 있는 반신상”, 그녀의 흉측한 신 앞에 무방비하게 내쳐졌다. 그녀의 신은 검고 무감각한, 그러나 살아 있는 유기체의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 역시 그녀의 신을 응시하고 있다. 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구가 된 살아 있음도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살아 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파문당한, 타락한 영혼으로 신을 마주한다. 신은 그녀를 용서하지도 벌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신은 다만 물고기처럼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만 소리 없는 살아 있음뿐이다. 여자가, 신이 있는 곳은 지옥도 천국도 아니다. 이곳은 영속적인 위태로움, 삶이다. 끝 없는 얼굴이다. 벌거숭이가 된 방이다.
2.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경이
살아 있음과의 접촉은 멀미와 깨어짐을 수반한다. 이러한 현기증 나는 접촉에서 유발되는 감정을 사라 아메드는 경이라고 설명한다. 리스펙토르의 텍스트는 페미니즘적 경이의 감정을 보여준다. 사라 아메드의 분석에 따르면, 경이는 페미니즘과 깊은 관련을 가진 감정이다. 『감정의 문화정치학』에서 아메드는 데카르트의 정의를 빌려 경이는 주체가 어떠한 대상을 처음으로 맞닥뜨릴 때 혹은 그런 것처럼 인식할 때 갖게 되는 감정, 즉, 인식되지 않은 것을 새롭게 마주치거나 인식되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하는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리스펙토르의 단편집 『달걀과 닭』에는 기존의 무감각한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견하게 된 여자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동물원의 짐승들을 보거나 눈 먼 남자가 껌을 씹는 모습, 혹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미를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면서 여자들은 기존의 경험이 산산이 와해되는 경험,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듯한 경악, 즉 경이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이가 페미니즘과 깊이 맞닿아 있는 까닭은 경이는 기존의 관습적 시야와 다른 새로운 앎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던 관습 내부의 여자들은 바퀴벌레와 같은 이질적인, 그러나 그녀의 삶 내부에 이미 깊이 침투해 있던 생명과 맞닥뜨리며(『G.H에 따른 수난』에서 나타나듯) 경악하며, 곧 이전의 시야와 삶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즘이 자신의 삶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 타자들의 삶을 다르게 읽고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경이가 그녀 자신을 페미니즘으로 이끈 핵심적인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아메드는 메간 볼러와 엘스페스 프로빈이 페미니즘에 있어 감정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여 배움을 막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 것을 반론하며, 오히려 페미니즘은, 특히 경이와 같은 감정은 새로운 형태의, 기존과는 다른 생산적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때 긍정적인 감정으로서의 경이에 대한 아메드의 지적은 감정을 페티시화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특정한 대상에 언제나 고정되어 있거나 이상화되어야만 하는 강령을 내재적으로 지니는 것이 아니며, 항상 다른 사유를 낳을 수 있으며 다른 사유와 연관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메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감정으로서의 경이, 특히 열림이나 새로운 결속과 관련되어 있는 경이를 강조한다. 리스펙토르의 단편 <장미를 본받아>에서의 여성 화자는 더 사랑스러운 여자, 더 정상적이며 건강한 여자로 보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동시에 장미를 본다. 장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여성 화자는 장미가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말하며 동시에 “궁극의 아름다움에 불편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녀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경고였다.” 세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그녀가 경이에 사로잡혀 새로운 삶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그 소유를 위하여 그녀가 믿었던 삶이 갈기갈기 찢기고 말리라는 경고. 주인공 여자는 그 장미를 카를로타라는 친구에게 주어버리겠다고 결심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도 위험한 일이므로. 그러나 장미를 친구에게 선물한다면 그녀는 장미를 주어버리고, 장미의 파멸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농담 같은 한 순간의 균열에 불과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곧 모든 것이 불가능함을, 장미를 완전히 없앨 수 없음을, 설령 장미를 친구에게 줘 버린다고 해도 그녀는 더 이상 장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섬세하며 치명적인 가시를 지닌, 너무도 아름답고 고요한 장미 {…} {그녀는} 장미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외출복을 입고 그녀의 하루를 계속해서 살 수 있으리라.” 매끄러운 하루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노력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녀가 장미를 응시하자, 장미가 보였다.” 그녀는 장미를 바라보는 것을, 장미에 대한 경이로 사유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녀는 황홀하게 장미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채, 깊이.” 장미에 대한 그녀의 매혹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부풀어간다. “1초 뒤, 여전히 한없이 온화하게, 그 생각은 살짝 집요하면서 거의 유혹적으로 자라났다. 장미를 주어버리면 안 돼, 장미는 네 것이야. 라우라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라우라는 “고통 없이 통곡”하며 오후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오후가 아님을 깨닫는다. “아직은 오후가 아닌가. 너무도 아름다운 오후.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오후가 아니었다.” <장미를 본받아>에서는 경이를 가능케 하는 주저함과 중지가 잘 드러난다. 이미 당연하게 인식되어 있는 관습적인 세계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이들은 새로운 앎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체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리스펙토르의 인물들은 결국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한 발자국도 변화하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그녀들의 안에 있던 경이를 체감한다. 그때, 오후가 더 이상 오후가 아니게 되며 장미가 더 이상 장미가 아니게 될 때, 여자들은 경악과도 같은 앎을 느끼고 경이를 체험하게 된다. 리스펙토르의 작품들이 페미니즘적인 주제와 깊이 맞닿아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이 때문일 것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TV Cultura 인터뷰에서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소설인 『별의 시간』(Hour of the star)의 여주인공인 마카베아는 하류층의 가정에서 고아로 태어나 자라고 결국 어떠한 기적조차 없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된다. 그녀는 그녀의 세계, 그녀를 둘러싼 지형과 피부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체념이나 순종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별의 시간』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카베아는 가난과 궁핍 속에서 어떠한 굴욕이나 슬픔도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그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마카베아가 최초로 결핍과 불행, 끔찍한 충격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그녀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달은 경악의 순간이다. 마카베아가 친구인 글로리아로부터 빌린 돈으로 처음 방문한 점집에서 점술사는 마카베아를 연민하며 그녀가 너무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제야 마카베아는 자신의 가난, 자신의 마른 몸과 가진 것 없는 생활이 불행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바라보는 순간, 당연했던 것을 잃어버리는 충격의 순간, 글로리아는 경이와 함께 그녀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균열을, 그녀를 새로운 빛으로 연결하는 충격적인 틈을 바라본다. 무엇인가 그녀의 내부에 있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 이름이 없는 무엇인가, 마치 그녀의 삶처럼 내내 존재했던 무엇인가, 아주 위험하고 감미로운 무엇인가, 끔찍하게 아름답고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는, 너무나 존재해서 그녀를 질식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점술사는 그녀의 미래에 부자인 외국인 남성이 나타나 그녀를 행복하고 부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언한다. 마카베아는 환희에 들떠 점술집을 나서고 메르세데스에게 뺑소니 사고를 당해 죽게 된다. 『별의 시간』의 여주인공인 마카베아는 객관적인 기준에서 무척 불행한 삶을 살다 죽는다. 그러나 『별의 시간』은 결코 불행이나 체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카베아는 마지막 순간 그녀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보물과도 같은 빛, 생명을 발견하며 그녀는 최초로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며 죽는다. 마치 새로 태어나듯이. 페미니즘에 있어서의 경이는 폭발적인 생명력과 맞닿아 있다.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즘이, 특히 새로운 관계들을 가능케 하며 열림을 유발하는 경이가 세계를 구성하는 낡은 방식들과 결별할 수 있게 돕는다고 이야기 한다. 경이는 각 신체들에게 새로운 정동을 유발하며 새로운 열림을 가능케하고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향한다. 마카베아의 경악이 어떠한 열림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차에 치여 바닥에 쓰러진 마카베아는 “너무도 살아 있어서 천천히 움직이고 태아의 자세를 취”한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녀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마카베아는 최후의 순간 처음으로 그녀 자신에 대해 의식하며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의 존재와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의식의 실에 매달린 채 정신적으로 계속 반복한다. : 나는, 나는, 나는 […] 그녀는 그녀 자신의 매우 깊고 검은 중심으로 들어가 신이 우리에게 준 삶의 숨결을 찾았다.” 처음으로 삶을 자각하고 경이를, 새로운 앎을 가능케 한 마카베아는 열려 있으며 그러한 열림은 미래를 향한다. “미래를 위하여”라고 마카베아는 분명한 목소리로 예언한다. 화자는 마카베아가 “그녀가 약간의 피와 광대한 발작, 본질, 드디어 최후의 감동적인 본질 : 승리!를 토해낸 것”을 보았다고 서술한다.
페미니즘의 경이, 깨어짐과 열림은 절망이나 체념이 아닌 미래, 희망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경이는 기존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함으로써 새로운 앎을 가능케하며, 가부장제, 상품자본주의, 시민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타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 경이 속에서 우리와 타자들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메스껍고 불안하며 흔들리는 느낌을 주는 어떤 변화를 가능케 한다. 살아 있음의 끔찍한 멀미와 고통 속에서 우리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변화한다. “신이 우리에게 준 삶의 숨결”, 그것은 그녀가 그녀 자신에게 준 삶, 그녀가 그녀의 살을 헤집어 발견한 보물이다. “생명의 발생은 죽음보다 훨씬 더 피투성이”이며 “희망을 지켜보기”란, 변하지 않는 숭배와 변화하는 미래를 견뎌내는 과정이란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지만 여자는 그녀의 몸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다. 그녀는 파헤친다. 피투성이 손으로. 참을 수 없는 비명을 구역질하며 그녀는 녹아내린 입과 소리 없는 말들이 우글거리는 목구멍에서 경이로운 열려 있음을 본다. 어떤 미래. 어떤 경악. 어떤 살아 있음들. 새벽의 검은 우유를 마신 신들, 그녀의 신들이 그녀에게 건네 준 어둠 속의 검은 사과들.
<이 글은 Web Journal SEMINAR Issue09, 2021에 “살아 있음을 마주하기: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숭배와 경이” 로 실렸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아 슬퍼집니다. 리스펙토르 책을 주문했습니다. 이우연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이작가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계속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