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삼촌은 고해성사실에 숨어드는 버릇을 버릴 수 없었어요. 삼촌은 잠을 청하듯 습관적으로 고해성사실로 들어가 타인의 악몽에 귀를 기울이곤 했죠. 죄인들은 밤낮없이 고해성사실로 들어왔어요. 삼촌은 마른 몸을 잔뜩 웅크리고 피아노 현들 위에서 날카로운 음률이 제 몸을 가르는 것을 즐기며 잠에 든 쥐처럼 죄인들의 흐느낌이 피부를 갈라내는 감각을 만끽했죠. 신부님, 저는 아내를 죽이고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2

엔젤 스테이크 13

너는, 남자아이는 여자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죽음을 내게 맡겼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내가 죽을 작정이었다면 난 나의 죽음을 엄마도 아빠도 심지어는 나 자신의 운에도 맡기지 않고 너에게 맡겼을 거야. 네 작은 손이 내 목을 잘 조를 수 있도록 난 네 손 위에 손을 얹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아마 실패로 끝났겠지. 나는 졸도에 가까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3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분명 삼촌이 그의 유년에 대해 낱낱이 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침묵만을 고수했던 것도 아니에요. 당신한테 말한 적이 있죠. 삼촌은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꽤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삼촌이 어릴 적, 그러니까 서커스에서 도망쳐나온 뒤 한동안 수도원 소유의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걸 내게 이야기해 준 것은 이모가 연인을 찾아 집을 나서고 삼촌이 지상에 선 박쥐처럼 구석자리의 그늘에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 고해성사 1

레몬캔디의 물방울 – 서커스의 짐승

레몬캔디는 종종 그의 고향 마을-그가 고향이라고 믿었던-에 찾아오곤 했던 서커스단에 대해 이야기했다. 본래는 대도시의 유원지에서 공연을 하던 서커스단이라고 했는데, 사막에서 붉은 보석이나 신비한 향신료들을 가지고 오는 행상들처럼 간혹 우리 마을에도 들리곤 했죠. 특히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그들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 그건 그들의 흐린 시야로 뒤덮인 삶에 있어 그토록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은 기껏해야 서커스 단원들이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서커스의 짐승

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난 한 번도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을사람들을 독살한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금에도 그때의 내가 그리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설령 그들이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타인을 해치면서 살아가잖아요. 헤집을 수 없는 속을 헤집고 상대에게 제 타액을 흘려넣어 감염시키는 일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요? 그게 아니야, 하고 레몬캔디의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 여자의 다리수술

피안개 만찬

삼촌은 뜨끈한 손가락을 자꾸만 베어냈다. 말라붙은 손가락에서 둥근 지문이 뻐끔, 맴을 도는 날갯짓. 뜬 눈으로 잠든 비늘들만이 푸흐흐, 설운 입질을 삼켜낸다. 익지 않는 고기는 이미 썩은 쓰레기 뿐이지. 몽글한 살내음 달게 차오른다. 발간 기억을 덜렁이며, 이제 내겐 마른 혀조차 없소. 흰 비늘을 한 겹 한 겹 섧게 게워낸다. 얼멍 뒤얽힌 체온이 어지러워. 다리를 벌리고 방만한 … Continue reading 피안개 만찬

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나도 더 이상 빈대들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있어요. 레몬캔디는 모르는 어릴 적의 이야기에요. 그 애는 무척이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당신의 이야기와는 모순되게, 슬플 때는 언제든지 울고 욺으로써 무언가를 요구할 줄 아는 아이였죠. 물가에 떠내려온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거뭇한 우수를 지니고 있는 아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애는 이웃들을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어린시절의 물방울 – 유년과 우물

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희는 종종 잊는다. 하메른의 강에 빠진 쥐떼들은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수구에서 바글거리는 쥐들은 그때의 우수를 공유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반복한다고 믿는 생들은, 또다시 출몰했다고 믿는 사자들은 이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너희 자신조차도. 너희는 하나의 생을 반복하지 않는다. 어제의 네가 가졌던 고독을 오늘의 너는 결코 … Continue reading 여자와 레몬캔디의 물방울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

비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건 사막의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 비 웅덩이에 코를 박고 끔찍스러운 얼굴을 들여다보다 물 속으로 머리부터 고꾸라져 들어가는 검은 쥐를 바라보며 너희는 침묵한다. 나르시스가 천사와도 같은 미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져 입을 맞추었던 성스러운 액체 위에서 흐물거리며 얇고 더러운 콧수염들을 움찔거리는 작고 혐오스러운 괴물을 본 순간, 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희는 … Continue reading 자살자 쥐들의 물방울

맹목의 물방울

파르메니데스가 갈라놓은 ‘좋음’의 세계, 가볍고 부드러우며 선명한 빛이 내리쬐는 존재들의 세계에 우리는 평생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존재의 책임만큼이나 무거운 비존재의 응달에서 우리는 빛을 헤매는 존재들을, 무수한 날개를 맞비비며 가벼운 빛을 따라 상승하는 하루살이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할 것이다. 그들의 날개에서 날리는 분진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가볍겠지.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몸은 우리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여리고 … Continue reading 맹목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갈라진 목소리. 버려진 목소리들의 결속. 사람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 유령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하지만 너는 듣는 체 한다. 유령이 유령을 들을 수 없다면 지친 음성으로, 작게 쉬어버린 목소리로 소곤소곤거리며 집단적인 독백을 하는 유령들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으므로. 악몽을 꿀 수 없다면 더 이상 악몽에 대해 쓸 수도 없으므로. 어쩌면 난 삼촌보다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죄의 물방울

하나의 잘못을 고치면 모든 일이 곧바른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나의 잘못된 저주를 삭이고, 하나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하나의 잘못된 선택을 지우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거라고. 무참한 수압을 향해 피어나던 뿌리들을 제대로 목격했더라면, 그곳에 너희 대신 네가 갔더라면, 네가 갖지 못했던 고래의 검고 거대한 자궁을 기억했더라면, 고래는 너보다 깊은 심해를 기억할 아이들을 낳았을 … Continue reading 죄의 물방울

목소리들의 물방울

유리병에 간절한 이름들을 담아 망망대해에 띄워보내는 심정으로, 보야저 호에 인간의 육성과 믿음, 그들이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믿던 음악을 함께 담아 우주 속으로 무책임하게 띄워보내던 이들의 심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걸하는 심정으로, 설령 보야저호를 받아든 누군가가 있더라도 절대 그와 눈짓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령 유리병에 모래와 함께 담긴 더러운 쪽지를 펼쳐보는 자가 있더라도 그가 자신을 … Continue reading 목소리들의 물방울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변명 같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요. 내 증언이 뒤죽박죽인 건 당신도 이해해 주어야 해요. 혼란스러운 건 당신과 나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니까. 우린 결국 아무것도 겪은 적이 없고 따라서 경험에 따라 기억을 반추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내 증언은 내 내면의 바깥에서 벌어진, 어떻게 보면 나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니까. 난 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어쩌면 존재한 적조차 … Continue reading 연과 레몬캔디의 물방울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할아버지가 삼촌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이모에 대한 그의 사랑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할아버지의 연구실 바닥에 앉아 한없이 위로 떠오르는 금빛 먼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할아버지가 유령에게 말을 건네듯 중얼거리곤 했거든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이야. 그런 사람들은 꼭 누군가를 배신하게 되어 있지. 그게 저 자신이라 할지라도. 할아버지가 … Continue reading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너희, 들의 물방울

여자는 숨을 들이쉰다. 눈꺼풀 속에서 붉은 얼룩들이 흩어진다. 피부를 잃고 질주하는 말의 혈류처럼. 기억들의 마을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는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곳은 그녀의 고향도 아니었고, 한 잔의 홍차와 마들렌에서 피어오르는 장미 정원을 돌보던 사내가 찾아나선 진리는 그녀가 속해 있지 않은 세상의 것이었으므로. 날짜와 시간이 표시되지 않은 필름사진과 같은 기억들,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 Continue reading 너희, 들의 물방울

연과 현의 물방울

너는 어느덧 현과 함께 오래도록 햇빛에 노출되어 희게 바래가는 옥상의 초록색 방수 페인트 위에 앉아 있었다. 너희 사이를 오가던 유구한 전통에 따라 너는 입을 다물고 그 애의 옆에 앉아 있었다. 마치 너희가 모두 살아있을 때처럼. 현은 네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써왔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식물을 기르고 분갈이를 하는, 일정한 생의 주기에 따라 아무것도 … Continue reading 연과 현의 물방울

연금술사와 광인들의 물방울

할아버지의 연금술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시간을 내키는 대로 조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마치 신과 같이 받들어지던 고대의 왕처럼 보이게 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시계의 원리를 안다면 누구라도 시간을 바꿀 수 있다고, 그건 연금술 고유의 영역조차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아무도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죠.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할아버지를 … Continue reading 연금술사와 광인들의 물방울

연과 현, 레몬캔디의 물방울

현과 네가 공유한 것이 침묵뿐인 것은 아니었다. 현이 병원에서 퇴원했을 무렵, 그는 자신이 퇴원한다는 소식을 교묘한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숨겼고 학교 옥상에 작은 침낭과 과자들을 꾸려 노숙을 했다. 그 애를 용서하기 위해 학교로 찾아온 가족들이 현을 찾아 거뭇하게 그을은 그 애의 손을 끌고 돌아가기 전까지 너희는 모두가 그의 소재를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애를 … Continue reading 연과 현, 레몬캔디의 물방울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소녀와 언어

코코펠리 여왕이 전쟁을 치를 무렵의 일이였죠. 처음에 그녀는 선한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상을 완성시키기 위해 전쟁에 매달렸어요. 초록 혹성에서 학대받는 여자들을 해방하고 사람의 죽은 시체를 품고 있는 검은 나무들을 하얗고 가벼운 송진 가루로 되돌리는 것 이외에 여왕이 바라는 일은 더 없었어요. 여자들이 잠을 청하던 밤 몰래 로켓을 만들고 빌어먹을 대지를 탈출한 것도 그 때문이었죠. … Continue reading 코코펠리 전쟁의 물방울 – 소녀와 언어

출혈의 물방울

다섯 개의 총구 앞에서 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날 집으로 돌아간 이들은 모두 잠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고 웃었을 뿐이었어. 그들이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갔을 때, 사자들의 시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고 더위에 지쳐 잠이 든 다섯 명의 아이들만이 헐벗은 채로 드러누어 있었으니까. 열사병에 걸려 쓰러진 아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삿거리가 … Continue reading 출혈의 물방울

개와 연극의 물방울

우리는 거미줄 속에서, 자신이 직접 짜내려간 아름다운 관 속에서 먹이와 함께 죽어가는 거미처럼 앞으로 내달리며 기꺼이 우리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어요. 누군가 우리의 사진을 찍었지만,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의 자그마한 물방울들로 가득찬 흐린 안개 속에서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우린 진짜 사자가 아니었지만 우리의 울음만은 진짜였어요. 예술은 진실한 가짜여야 한다고, 현의 목소리가 네 … Continue reading 개와 연극의 물방울

존재와 모순의 물방울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눈을 감고 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들이 나를 모욕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죠. 현실과 모순되는 제 존재의 모순성을 즐기며, 신체의 내부를 아프게 찔려오는 꼭짓점이 깊어져가는 것을 느끼며 당신에게 말을 걸었죠. 당신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자라났어요. 난 당신이 점차 확실한 존재로 변해감에 따라 항상적인 자아를 유지하고 있던 고정된 … Continue reading 존재와 모순의 물방울

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넌 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현의 죽은 머리는 네 머릿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청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은 희미한 윤곽선을 깜빡거리며 졸음을 참다가 꿈의 무대에서 하나 둘 사라졌다. 그 애들은 교실문도 창문도 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경계를 지우며 그 안쪽의 살과 얼굴, 입술을 희끄무레한 온기로 바꾸며 사라졌다. 끓는 물이 천장과 냄비 그 중간 부위에서 흐릿한 연기로 … Continue reading 현의 커튼콜의 물방울

엔젤 스테이크 12

어떤 날은 다른 꿈을 꾸기도 하지. 여자는 남자아이가 여자의 꿈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듯, 언제나 파리의 꿈을 꾸느냐고 묻기라도 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긴 복도 위에 서 있어. 복도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공중을 부유하고 있음을 나는 느껴. 난 중심을 잃지 않고 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어서 서 있지만, 내가 고착되어 있는 바닥은 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나는 느껴.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2

사자가면의 물방울

우리는 함께 사자 가면을 만들기 시작했어. 연극 소품에 사용하려고. 우리는 포르말린에 말린 사자의 얼굴을 연기하려고 했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다 실패했지. 주황색 골판지에 갈색 털실을 덕지덕지 붙인 가면은 사자보다는 도깨비처럼 보였으니까. 프린트로 인쇄한 사자는 털 한 올조차 없이 민둥맨둥했어. 마치 피부를 도려내 여린 속살을 드러낸 것만 같았어. 박제하기 전에 가죽을 벗겨놓은 것처럼. 인터넷에서 사자 가면을 … Continue reading 사자가면의 물방울

학창시절의 물방울

학교에 다닐 때, 미술시간에 학생들 앞에 나가 어떠한 인물의 생김새를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네가 그 인물의 코와 얼굴 윤곽, 눈썹이나 입술의 모양에 대해 묘사하면 학생들은 네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다. 평소 글을 쓴다고 했던 너는 아이들의 추천을 받아 교단 앞으로 나가 선생님이 준 사진 속 인물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그의 코는 크고 둥글어. … Continue reading 학창시절의 물방울

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수천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리본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파동을 묘사하듯, 창백한 선영을 이어나가듯. 무수히 겹쳐 검게 보이는 투명한 날개들에 손을 집어넣고 옷장의 문을 열자 목소리가 들린다. 토성의 고리처럼 어디에도 없는 흔한 상징. 메타포. 너희는 상징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보이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너는 알지 못한다. 여자의 상징이 … Continue reading 환각과 망각, 결핍의 물방울

마네킹의 물방울

초록 혹성이 불에 타 사라진 뒤 네 꿈은 정착할 곳을 잃었다. 산만한 이미지들이 고장난 만화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너를 어지럽혔지만, 인격을 잃은 의식 너머언어의 파편들은 이미지들을 엮어 놓을 적합한 논리조차 갖추지 못한 채 잔상을 따라 흔들렸다. 여자는 마네킹이 늘어져 있던 진열대 안쪽에 짐승의 침처럼 미지근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넌 그녀가 무얼 하는지 알 … Continue reading 마네킹의 물방울

출산과 탄생의 물방울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한 번 태어난 사람이라면 돌이킬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출산의 과정이 있어요. 마치 아이를 출산하듯 제 자신을 죽음으로 낳으며 새벽을 내내 앓다 가는 사람들을 본 적 없나요. 부모의 출산을 번복하듯, 허벅다리 안쪽에 새겨놓았던 문신을 지져 지우듯,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견뎌 죽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나요. 당신도 언젠가는 … Continue reading 출산과 탄생의 물방울

우주조난자의 물방울

생은 우주보다 깊은 환각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생은 입체가 아닌 평면이라는 걸, 모든 방향으로 끊임없이 증폭되고 복제되는 종이들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겠죠.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토성의 고리 끝자락을 보고 싶어 손가락을 깨물고 살끝에서 비어져나온 유치한 피를 삼키고 유치한 눈물을 흘리고 유치한 오줌을 질질거렸던 사내 이야기를 말이에요. 그가 바랐던 것이 초록색 사과였거나 붉은 흙이었다면 상황이 … Continue reading 우주조난자의 물방울

레몬캔디의 물방울

곧 사연 많은 남자를 죽일 수 있을 거예요. 너는 옷장 속에 방치된 침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익숙한 메일을 확인했다. 다시, 그녀의 메일이었다. 넌 이미 한때 네온소다팝시티의 이야기꾼이었던 레몬캔디의 사연을 다시 떠올렸다. 병원이 붕괴되고 나서 우린 무너진 잔해 속에서 그녀들을 찾았어요. 짓이겨진 멍울들은 제 몸을 트고 피어나는 꽃처럼 아렸고, 붉고 노랗게 번져간 꽃잎들은 아름다웠어요. 우리는 그녀들의 짙게 … Continue reading 레몬캔디의 물방울

실험쥐 2

전두엽에 갇힌 쥐새끼가 울고 있다. 너는 C-fiber 신경 자극에 다름 아니라며, 그가 네 고통을 기록한다. 신음한다. 울고 발열한다. 잔열. 잔떨림. 섬망. 출력된 글자들이 운다. 굶다 지쳐 굶다 미쳐 저를 굶던 쥐가 글자를 찢어 삼킨다. 고통이 목에 걸려, 쥐새끼가 기침한다. 고통이 젖는다. 고통으로 울던 쥐. 엄마 나는 쥐새끼예요. 낯설도록 흰 냄새, 실험복을 입다 벗다 입다 벗던 … Continue reading 실험쥐 2

사내의 물방울

흉측하게 비어 있는 사내의 일상에 분주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침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연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을 일도, 여린 속살을 간지럽히며 거리로 나가 병든 연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상을 내다버리는 일도 그에게는 없었다.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지켜본 이는 없었지만 만약 그와 입을 맞추기 위해 그의 눈을 지긋이 응시한 이가 있었더라면 그는 끝이 뜯겨져나간 태엽장치처럼, 톱니와 … Continue reading 사내의 물방울

연과 여자의 물방울

사막의 야생동물은 비명을 질렀다. 짐승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짐승의 울음은 사막의 밤이 듣기에는 너무 고요했고, 사막 경계의 캠프를 지키는 늙은 원주민들이 듣기에는 너무 높았다. 사막의 야생동물은 길들여진 적도 사냥된 적도 없었다. 짐승은 늘 같은 자리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사내가 사막의 밤에 불시착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의 황금빛 머리칼과 커다랗고 둥근 눈, 사막의 은빛 달과는 … Continue reading 연과 여자의 물방울

매장의 물방울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너는 그의 옆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치아를 딱딱 맞부딪히는 소리. 서늘하고 달콤한 흙의 향기. 밤을 쏘다니는 짐승의 울음.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그림자들. 손을 맞잡고 사랑을 속삭이는 유령들. 너희에게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 잡음 사이로 섞여드는 목소리. 그녀에게 대안이 있었다면 당신은 죽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누구도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 Continue reading 매장의 물방울

옷장의 물방울

눅눅한 옷장과 그 틈새는 너희와 분리할 수 없는 너희의 살이었다. 너는 옷장을 두고 나갈 수 없었다. 옷장 속에 남자를 밀어넣었다. 난 거울 앞에서 태어났어요. 끊임없이 복제되던 표정들을 기억해요. 막과 막 사이에서 비어져나오던 살들을 기억해요. 무수하게 증폭되던 빛이 내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놓던 아픔을 기억해요. 잠깐, 너무 서두르진 말아요. 우리가 타인보다 많이 가진 건 시간뿐이니까. 그동안 난 … Continue reading 옷장의 물방울

사막의 물방울

너희는 옮길 수 없는 병만을 앓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입술을 부비고 혀를 섞고 성기를 포개어도 나눌 수 없는 병이 너희의 속에서 잊히지 않은 고독처럼 매섭게 썩어가고 있었다는 생각. 그런 상상을 하면, 당신과 손을 잡았든지 당신 속으로 들어갔든지 당신과 밀어를 속삭였든지 당신과 같은 은어를 나누었든지 모두 상관없이 우리는 이대로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어쩐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 Continue reading 사막의 물방울

붉은 고래 엄마의 물방울

구석자리에 사는 괴물들을 너는 어릴 적부터 보아왔다. 괴물을 보는 사람은 괴물이 될 수 없다. 괴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괴물을 죽일 수 없다. 너는 오랫동안 구석자리에서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괴물들과 함께 살아왔다. 옷장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내가 아니니까. 난 그가 포기한 그녀의 마음이에요. 아냐. 넌 그녀가 아니야. 우린 아무도 해치지 … Continue reading 붉은 고래 엄마의 물방울

너-여자-레몬캔디, 너희, 들의 물방울

네가 여자를 만나듯 현도 요제프 칼을 만난 것일까? 계절마다 현의 앞에서 투신하는 소년이 요제프 칼일까? 어느새 옷장 속에서 기어나온 여자가 네 발가락을 깨물었다. 검은 눈이 너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현을 긋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제프 칼의 연주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에요. 확실히 기묘하고 탐미적인 소리였지만, 20세기 이후부터 그런 연주는 제법 흔하지 않나요. 난 그와 … Continue reading 너-여자-레몬캔디, 너희, 들의 물방울

현의 미로의 물방울

다시, 잘려 죽은 나무의 텅 빈 창자 속에서 웅크리고 숨어 있는 페이지들. 너는 현의 책을 꺼내 펼친다. 그 애가 네게 해주었던 말들은 모두 그 속에 있었다. 그 애가 네게 해주지 않았던 말들은 모두 그 속에 있었다. 삭아서 희미할 정도로 얇은 선의 흔적만 남은 E 현이 돌연 끊어지며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난자당한 얼굴, 벗겨진 껍질에는 어떤 … Continue reading 현의 미로의 물방울

시신의 물방울

맨손은 비에 젖어 있었다. 거뭇한 등을 움칠거리면서 기어가던 벌레가 네게 다리를 들여 보였다. 너는 시체를 자주 보게 되었다. 유령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너에게 보이는 시체들은 온전히 죽은 것도 죽지 않은 것도 아닌, 죽음이 증류되어 떠나간 뒤 여남은 삶인 것이다. 그녀가 지시하는 곳에 매달린, 널브러진, 조각난, 불탄 모든 시신들은 … Continue reading 시신의 물방울

연과 아이의 물방울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믿지도 않는 꿈을 더 꿀 수는 없었다. 울먹이며 종이를 찢듯 날카롭게 옮겨적었던 어휘들을 기억할 수도 없었다. 너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잠금장치가 망가져 있는 문은 쉽게 속을 들여다보였다. 탐정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떠한 음성을 들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현관문 앞, 자그마한 낚시 의자 위에 … Continue reading 연과 아이의 물방울

연과 현의 물방울

햇빛이 매몰되어 뜨겁게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현은 주저앉았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에서 한여름처럼 진진하고 역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 애는 네게 손짓하지 않았다. 너희는 늘 그랬다. 서로의 속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서로를 해치는 법도 없었다. 침묵을 보듬어주는 그 애의 곁에서 너는 늘 편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애는 한 번도 너를 앓지 않았고 너를 미워한 적도 없으며, 네 … Continue reading 연과 현의 물방울

연과 여자의 물방울

옷장 속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경멸하고 있죠. 이제는 편지도 보내지 않잖아요. 아니야. 너는 여자를 달래듯 속삭였다. 네가 맡은 역할이 불만족스러웠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네게도 역할이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너를 경멸하지 않아. 알잖아. 내게 남은 건 어설픈 문장들 뿐인걸. 소리도 없이 줄줄 흐르는 말들. 나를 경멸하는 게 아니라면 내 행동을 … Continue reading 연과 여자의 물방울

연과 아이의 물방울

개연성도 핍진성도 상관없다. 지금껏 썼던 글, 네 멋대로 짜내려갔던 어휘들은-너는 날실과 씨실을 배열하는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지.- 없는 것이니까. 발자국이 곰보처럼 패인 골목 바닥을 밟으면서 했던 생각들처럼. 혹시 너는 비둘기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네 머리칼을 스치고 날아가는 시원하고 더러운 바람이 이렇게 그리울 수는 없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네 어깨는 뭉툭한 뼈와 살 뿐이었던 것처럼. 덜컹거리면서 … Continue reading 연과 아이의 물방울

푸른 아이의 물방울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기억해? 아이는 네 손가락을 움켜쥐고 이야기했다. 응. 그녀가 끝내 춤을 추지 못했다는 데까지 이야기했어. 그래. 피륙을 구겨 넣은 유리병에서는 값비싼 향기가 났어. 난 그걸 머리에 끼얹고 바깥으로 나갔지.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나를 쳐다봤어. 거리를 떠돌던 개들은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찡그렸지. 벌집 모양으로 생긴 후각 신경들 때문에 그들은 사람보다 더 괴로웠을거야. 난 향기에 괴로워하는 … Continue reading 푸른 아이의 물방울

편지의 물방울

병동의 사람들은 소독약 냄새가 짙게 배어든 침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등 뒤에 짙은 빛깔로 내려앉은 시간의 상흔. 너희는 서로의 등을 숨긴 채 더 이상 감기지 않는 눈으로 빈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빈 곳은 이제 남아있지가 않아. 허우적거리는 눈짓들. 그녀는 침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지상을 떠날 날을 위하여 하는 연습이라고. 네가 매일 글을 … Continue reading 편지의 물방울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사내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한때 그는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여인이, 마음을 잃은 몸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가늠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여자를 찾아 헤맬 정도로. 붉은 숲에서 그녀의 얼굴을 가진 꽃을 보고 꿈을 꾸듯 그 옆에서 잠들었을 때에도, 밤새도록 이슬처럼 내려앉은 꿀이 가슴팍에서 반짝였을 때에도, 굶주린 개미들이 그를 애무하며 갉아먹었을 때에도 E flat의 진폭은 그의 머릿속에서 흐느끼고 … Continue reading 네크로필리아 음악가의 물방울

초록혹성의 물방울

같은 몸에 거주하는 두 개의 인격은 그 정의상 서로를 모르고 있다.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두 개의 인격은 그 정의상 하나이다. 초록 혹성이 불타 사라지는 동안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너희의 사랑스러운 패잔병들은 뭉근한 머리를 꺼떡거리면서 잔해로 변해가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꿈의 최후는 그리 낭만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았다. 소년의 귓바퀴에 모래를 흘려넣던 사내는 소년의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소년은 … Continue reading 초록혹성의 물방울

네오소다팝시티의 물방울

안녕, 안녕, 안녕. 안녕. 네온소다팝시티의 주민들이 인사한다. 너희는 반가움에 얼굴을 찡그리며 서로의 주위를 맴돈다. 파랗거나 노랗거나 붉거나 무르거나 질기거나 끈적한 풍선껌들이 너희의 얼굴이다. 변조한 목소리로 레몬캔디가 네게 묻는다. 말을 꺼내는 그의 눈이 붉게 반짝인다. 네온소다팝시티의 시스템 상에서 말이 겹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질 수 없는 피사체를 서글프게 바라보는 카메라의 붉은 램프처럼 저 홀로 차고 붉게 물드는 … Continue reading 네오소다팝시티의 물방울

현의 물방울

옆 침대에서 풍기는 여름 냄새. 달큰한 오물의 냄새와 뒤얽힌 냄새가 역겨워서 그 애의 목을 조르고 두툼한 베개로 얼굴을 짓누르고 싶었다고, 현은 말하지 않았다. 상상의 감실에서 그 애를 가장 모욕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고문한 적이 있다고, 현은 말하지 않았다. 너는 그 애에게 향긋한 침묵 너머의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에게 비밀이 필요 없었던 것이 … Continue reading 현의 물방울

서커스의 물방울

오래도록 서커스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폭죽 소리에 귀가 멀고 말았어요. 어머니는 의자보다도 키가 작은 난쟁이었다고 해요. 하루는 그녀가 아버지의 공연을 도와 무대에 섰어요. 붉은 술을 주렁주렁 매단 그녀는 탐스럽고 아름다웠다고 하지요. 사람이 아닌 짐승들에게도 그렇게 보였나봐요. 무대 한가운데에서 저가 지나가야 할 비좁은 불구덩이를 묵묵하게 지켜보던 사자가 갑자기 몸을 돌려 그녀에게 향한 거예요. 오랫동안 동물원에서 공수해온 죽은 … Continue reading 서커스의 물방울

엔젤 스테이크 11

그 뒤 밀레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고 그녀는 결코 답장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뒤늦게야 내가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낸 적이 없음을,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썼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도달한 적도, 그녀를 향한 적조차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밀레나의 주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1

수수께끼의 물방울

이야기에 해답은 없을 것이다. 이건 정답이 없는 수수께끼이다. 중요한 것은 신호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메일을 구태여 읽어 보며 그 속에 담긴 상징들을 유추해내려 애썼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별이 쏘아보냈던 빛을 읽어내듯 너는 자의적으로 메일의 내용을 해석했다. 눈맞춤에 이어지는 성좌구조에는 별과 눈과 시선이 모두 담겨 있을까, 별의 마음과 눈의 마음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걱정을 … Continue reading 수수께끼의 물방울

한밤의 이야기의 물방울

늙은 왕비는 백설공주를 사랑했어요. 죽어버린 공주에게 입을 맞추는 왕자는 그녀의 입술이 얼마나 붉었는지 알지 못했어요. 그녀의 눈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그녀에게서 얼마나 향기로운 냄새가 났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요. 공주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입술은 더이상 납과 같이 창백하고 아름다운 푸른 빛깔이 아니었고, 독을 배설해낸 그녀의 혀는 더이상 밤처럼 검은 빛깔이 아니었어요. 왕자의 눈앞엔 살아 있는 … Continue reading 한밤의 이야기의 물방울

다시, 메일의 물방울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목이 없는 메일이었다. 너는 미련없이 메일을 삭제하고는 생각했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읽지 않고 버려도 상관없었을 텐데. 우스운 일이었다. 너는 매일 조금씩 늙어가는 사람들이, 너에게 닿지도 않는 궤도의 사람들이 어디에서 태어나 빛나고 사라지는지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면서. 다만, 혹시 네게 도달하는 글자들이 네가 기다려온 미지에서 출발한 것일까 봐. 모든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확실히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 Continue reading 다시, 메일의 물방울

서문의 물방울

우리는 근거 없는 하나의 선언이다. 서로의 모순을 정리할 수 없는 조각난 음성들이다. 아무도 우리의 비명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망가진 조각들이므로. 제 자리에서 발광하며 누군가 별자리를 상상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서글픈 환각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현실이며 동시에 허구이다. 우리는 살을 가진 허상이고 들리지 않는 울음을 우는 유령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피를 마시며 자란다. … Continue reading 서문의 물방울

i11년 12월 1일 – i11년 12월 1일

i11년 12월 1일 소년은 물질처럼 단단하고 지친 환영을 느꼈다. 소년은 가느스름한 상처를 벌려 떴고 그의 앞에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애틋한 반영이 있었다. 소년은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선생님 언제 내 이름을 불러줄래요? 내가 앞에 나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소년은 오렌지빛 뺨을 떨며 흐느꼈다. 형이상학적 언어와 대수적 기호들이 일그러진 신체에 맞닿을 때 소년은 몸서리치며 작은 … Continue reading i11년 12월 1일 – i11년 12월 1일

Z3년 2월 1일 – I11년 1월 1일

Z3년 2월 1일 여자는 흰 벽처럼 순수했다. 그들이 여자로 씹질을 해대는 동안에도 여자는 순수했다. 그녀가 흰 벽처럼 단단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면, 빌어먹을 순수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검고 차가운 거리에 정물처럼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몇 개의 그림자가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는 연푸른 눈동자와 장미비누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 여자는 쇼윈도 밖으로 쫓겨나온 … Continue reading Z3년 2월 1일 – I11년 1월 1일

i11년 12월 1일 – i11년 12월 1일

i11년 12월 1일 혹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소년은 흠집이 난 책상을 작고 가무잡잡한 손으로 더듬었다. 소년의 얼굴은 길고 부드러운 달걀 같았다. 밤의 어둠에 그을은 검은 달걀. 소년은 어느 날 달걀과 함께, 달걀인 채로 여자의 질에서 밀려나왔다. 아니, 소년은 어느 날 존재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를 감싸고 있는 검고 부드러운 달걀을 보았다. 소년은 서서히 자신이 … Continue reading i11년 12월 1일 – i11년 12월 1일

i11년 5월 17일

i11년 5월 17일 어째서 그 애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까? 어째서 그 애는 내 옆에 있는 걸까? 오빠 : 그건 그 애가 유령이기 때문이야 지금 말하는 건 누구지? 아이들이 둥글고 견고한 구조물을 만들며 손을 맞잡는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간격과 간격이 조금씩 좁아지고 나는 그 바깥으로 내몰린다. 어째서 그 애들은 나를 똑바로 마주볼 … Continue reading i11년 5월 17일

i12년 11월 9일 – i11년 11월 11일

끝인가? 이걸로 끝인가? 아니다. 여하간 나는 끝을 기다리고 있지만 끝은 찾아오지 않아. 왜냐하면 살아있음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꿈이니까. 교통사고로 깨져버린, 연약한 세공품 같은 비둘기의 머리통, 그 얼굴과 머리 사이의 간극은 무한한 거야. 오 그러나 오직 비둘기에게만, 로드킬 당한 비둘기 자신에게만 무한한 것이지. 나는 멍청하게도 기다리고 있어. 거미줄에 매달린 장미 조각처럼. 거미는 그걸 건드리지도 않지. 그것이 처음부터 … Continue reading i12년 11월 9일 – i11년 11월 11일

i11년 7월 15일 – i12년 11월 9일

i11년 7월 15일 오빠2는 거울 앞에 있다.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말한다. 오빠2 : 마술사의 은화 같은 태양 아래 와해되어가는 공중의 무덤들. 내가 말하는 동안 내 입술이 녹아 없어지고 내 목구멍이 녹아 흘러내리고 이제 나는 완전히 망가진 육체의 틈을 벌려 빌어먹을 비밀들을 누설하고 있어. 그녀의 길고 연약한 목에 레이스 양산을 걸어 놓으렴. 그녀의 목은 … Continue reading i11년 7월 15일 – i12년 11월 9일

WA1년 8월 12일 – WA1년 8월 12일

WA1년 8월 12일 하얀 벽, 여자는 그것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고용되지 않은 배우들의 기이한 생태계. 실종자의 언어, 유령의 언어, 이미 멸종된 짐승의 언어로 그녀는 침묵을 지껄인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녀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부들은 그녀를 떠났다. 청소부들의 시간도 청소부가 아닌 자들의 시간도 그녀를 떠났다. … Continue reading WA1년 8월 12일 – WA1년 8월 12일

엔젤 스테이크 10

여자는 남자아이가 그녀가 죽인 여자아이와 놀랄 정도로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아이의 눈은 여자처럼 검었고 남자아이의 눈은 투명한 푸른색이었지만 그들의 흰 얼굴과 부드러운 콧날, 붉은 입술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쌍둥이 동생이며 남자아이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한 여자아이가 골목에서 고양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을 여자가 발견하였고 여자아이를 여자가 살해한 것이라면, 남자아이가 발견한 것은 그의 죽은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10

i11년 7월 15일

i11년 7월 15일 인간은 기원과 끝을 가진 존재이다. 존재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존재는 시작과 끝 사이의 시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여자는 어느 날 자신의 날개를 보았다. 비둘기 :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감각하는 존재인 나는 살아있다. 교실. 오빠5는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여동생, 혹은 이름 없는 비둘기를 자기 책상 위에 … Continue reading i11년 7월 15일

C10년 10월 27일 – i11년 7월 15일

배우1 : 너 무슨 연극 같은 거 하는 거야? 고양이 : 나는 하얀 벽을 닦으면서 기다렸지.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하얘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여백, 서울의 하늘, 건물들의 텅 빈 유리창에 대고 무엇인가를 휘갈겨 쓰고 있었어. 그건 시였지. 적어도 나는 그 보이지 않는 언어가 시라는 걸 알고 있었어. … Continue reading C10년 10월 27일 – i11년 7월 15일

i12년 1월 8일 – C10년 10월 27일

i12년 1월 8일 공고문 실종자를 찾습니다. 나이 : 만 14세 특징 : 경련. 실종자는 학교에서 귀가하던 중 사라졌습니다. 그 이전에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모든 주장을 상세하게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했습니다. 실종자의 어머니는 시인 혹은 시를 쓰는 사람이었고 실종자는 그것을 습관처럼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i12년 1월 9일 공고문 아파트에서 유령이 발견된다는 신고가 몇 차례 들어왔습니다. 항의를 한 주민분들께 … Continue reading i12년 1월 8일 – C10년 10월 27일

붉은 고래 연극

갓 난 도시들의 유언이 혈관에 쌓여, 노인은 중풍에 걸리었다동작 멎은 두 다리 경련으로 묶어내고등방형의 유리 자궁으로 기어들며노인은 붉은 고래의 산미를 추억했다연인은 향일의 탯줄을 등반하여 썰물 너머 성좌로 기어든 지 오래였다그를 쫓아 적의를 응고시킨 드라이아이스연료로 삼는 로켓을 쏘았지만 고갈된 불쾌빈 불알에서 쉭쉭대는 가스는 은일의 식물과 함께 태워달을 초혼하는 제례에 쓰였다포식한 달은 환상으로 사육한 시뮬라크르의 도시만큼 비대해졌고곡물 … Continue reading 붉은 고래 연극

INANDOUT년 10월 1일 – WA1년 8월 10일

INANDOUT년 10월 1일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떤 죄를? 사랑을 했습니다. 당신은 원죄를 가지고 있군요. 원죄가 당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를 구하십시오. 참회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더 사랑하십시오. 헨젤과 그레텔은 무덤 파는 남자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도시로 갔다. 헨젤과 그레텔은 어머니가 무엇을 하러 도시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도시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고 했다. 그곳에는 검고 … Continue reading INANDOUT년 10월 1일 – WA1년 8월 10일

a12년 4월 4일 – i11년 7월 15일

a12년 4월 4일 여자는 식탁 위에 아이를 올려놓았다. 아이는 갓 도축한 돼지처럼 붉었다. 시곗바늘은 4와 4를 가리키고 있었다. 긴 바늘이 4를 초과해 넘어가는 동안에도 짧은 바늘은 여전히 4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는 여자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것의 붉은 볼이 밀려올라갔고 그것의 둥근 이마가 더 붉게, 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여자는 아이를 올려놓은 하얀 접시 옆에 놓인 투명한 와인잔에 … Continue reading a12년 4월 4일 – i11년 7월 15일

i11년 5월 3일 – 7월 15일

i11년 5월 3일 수인들은 연극 연습에 나를 부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그 애와 함께 교실에 남아 노파가 입을 푸른 비단 드레스를 그렸다. 각자 한 장의 그리고 다른 한 장 한 장 한 장의 종이에 정성껏 색연필을 문질러 칠하고 칠하고 또 칠해서 그것을 이어 붙일 작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풍선들을 불어서 그걸 붙잡고 날 수 있지 … Continue reading i11년 5월 3일 – 7월 15일

i11년 7월 15일

i11년 7월 15일 (관객들의 박수 소리. 헨젤과 그레텔과 호랑이-엄마가 손을 잡고 무대를 향해 인사한다.) 음악교사: 헨젤과 그레텔, 햇님과 달님 오누이 이야기를 변형시켜 만들어낸 아주 독창적인 극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박수. 관객 : (박수를 친다.) 음악교사 : 그럼 다음은 x반 친구들이 준비한 하얀새 연극을 보겠습니다. 박수. 관객 : (박수를 친다.) (막이 열린다. 어머니와 소녀 등장.) 어머니 … Continue reading i11년 7월 15일

i11년 7월 15일 – a년 a월 a일

i11년 7월 15일 학교장 : 7월 15일부터 7월 16일까지 양일간 연극제가 진행됩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공연 시간 동안 휴대폰 전원을 꺼 주시고 입을 다물고 앞좌석을 발로 차지 마시고 살인하지 마시고 태형을 기다리는 개 역할을 맡지 않은 배우를 때리지 마시고 자살하지 마시고 물 이외의 음료를 마시지 마시고 즐겁게 공연을 관람해주시기 바랍니다. 1막. 검은 산. 호랑이 : 곧 … Continue reading i11년 7월 15일 – a년 a월 a일

i11년 4월 24-25일

i11년 4월 24일 무기도 편지도 될 수 없는 언어는 어디로 사라지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은 탈존할 수도 없는가? 도래하지 않은 과거를 나는 끔찍하게 기다리고 있어. 웃음으로 질식한 피에로 여자의 혀로 나는 유령의 시를 쓴다. 유령에게 얼굴이 있다는 말은 농담에 불과한가? 유령의 시간에도 유령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령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유령이 얼마나 존재할 … Continue reading i11년 4월 24-25일

엔젤 스테이크 9

여자는 어항처럼 검고 축축한 경찰차에 담겨 보호소로 돌아갔다. 쥐의 얼굴에 창녀의 화장은 잘 어울릴 것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쥐 경찰의 집에는 실제로 창녀의 가면들이 있을지 몰랐다. 그는 창녀를 연기하는 것을 즐겼으므로. 첫 번째 인터뷰 이후 여자에게 접근하는 매체는 더 많아졌다. 첫 번째 방송출연, 다섯 명의 남자 패널들이 여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트장 내부에는 남자들뿐이었다. 조명이 비추어지는 반원 형태의 무대 바깥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9

i11년 4월 19일 – i11년 4월 20일

i11년 4월 19일 나 즐겼어와 너 즐겼어 사이의 심연. 가정 교사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반에서 제일 예쁘고 잘생긴 친구들을 뽑아 보지 않을래? 아이들은 종이 한 조각씩을 배분받는다. 난 널 뽑았어.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애들이 내게 말을 건넨다. 널 뽑았어 널 뽑았어 널 뽑았어. 칠판에 나와 그 애의 이름이 적히고 우리는 교단으로 불려나간다. 가정 … Continue reading i11년 4월 19일 – i11년 4월 20일

i11년 4월 13일 – i12년 1월 5일

i11년 4일 13일 나는 누군가에게 봉합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모든 너희는 있는데 나는 없다. 나는 없다. 나는 누군가의 내장에 기생해서라도 살고 싶은 걸까? 나는. 나는. Writing does not reproduce visible, rather, it makes visible what is invisible. 벤야민. 방랑하는 유대인들. 그처럼 나도 아하스베루스다. 십자가에 오르는 신을 조롱한 죄로 신이 재림할 때까지 영원히 방랑하도록 저주받은. … Continue reading i11년 4월 13일 – i12년 1월 5일

i11년 4월 10일 – i11년 4월 13일

i11년 4월 10일 꿈 속에서, 나는 베인 미소를 짓는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녀는 한 순간 바래버린 사진과도 같은 납빛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묻자 귀신 아이는 말했다. 나를 기억해. 나를 기억해. 나를 기억해 나를 기억해 신은 살아 있다 숭배자 없이 그녀의 상처 속에 그녀의 찢김 속에 그녀는 숭배자 없는 신이었다. 추종자 여인들 … Continue reading i11년 4월 10일 – i11년 4월 13일

용서 2

여자의 입술이 야릇하게 벌어졌다. 그녀는 유리 너머의 불투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평선은 그곳에 없었다. 최초의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땅이 없었던 것처럼. 여자의 몸 위에 천사들의 분진처럼 투명하고 무한한 날개들이 내려앉았다. 교실 문 앞에서 마주친 너는 사탕을 줬어. 레몬맛 노란 사탕을 너는 입 속에서 꺼내 내게 건네 줬어. 난 … Continue reading 용서 2

탈옥

감옥에서 태어난 감옥 아이들, 먼저 살아낸 수형의 죄를 늦게 갚아야 하지요. 부모의 죄를 찾으면 산달 받을 거라 믿었던근친의 아이들은 오필리아의 멜로 드라마만 건져냈지요. 아아-첸치의 낯을 한 어머니의 조상은 베아트리체의 낯을 쓴 아버지의 누이는오이디푸스였지요. 탈옥을 위하여, 아이들은 없는 죄를 심으러 가요.현화한 죄값의 수효만큼 늙어가며 햇빛을 채굴할 수 있도록불쾌마저 고갈된 간수들은 0과 1의 언어만을 뇌까리며 적외선만 투시하지요난삽한 … Continue reading 탈옥

p-3년 4월 8일 – e년 12월 25일

p-3년 4월 8일 그녀는 눈을 감는다. 그녀는 웃는다. 지하철에서 만난 거지에게 그녀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 거지는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밀쳤다. 그녀의 입술은 그의 드러난 환부보다 더 벌어져 있었고 더 젖어 있었다. 그녀는 하얗고 순결한 케이크 칼을 들고 있었다. 시간과 시간의 틈에 그녀의 생일이 있었으므로. 거지는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건포도처럼 검고 … Continue reading p-3년 4월 8일 – e년 12월 25일

k11년 4월 5일 – a-3년

k11년 4월 5일 색색의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 악기를 젓가락으로 두드려 연주한다. 온음과 반음까지 완벽하게 구현 가능하다. 방과후의 텅 빈 실험실에서 나는 남은 원색의 액체들을 유리 플라스크에 집어넣어 연주하고 있었다. 작고 촘촘한 발걸음 소리. 여자아이는 그녀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악기를 장미에 매혹당한 파리처럼 환하게 밝혀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금속 원뿔을 쓴 고양이들이 길고 유연한 꼬리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걸 … Continue reading k11년 4월 5일 – a-3년

a-5년 4월 3일, a-3년 4월 4일, a+1년 4월 4일

a-5년 4월 3일 뼈들이 눈을 악물고 잠자는 소리. 목구멍의 긴 침묵 밑에서 내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 내 뼈들이 부르는 소리. 죽은 아름다운 탄식이 가시처럼 긴 뼈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신이 나를 위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신은 나를 위해 죽지 않았다. 신은 나를 위해 죽지 않았다. 신은 나를 위해 신은 나를 위해. … Continue reading a-5년 4월 3일, a-3년 4월 4일, a+1년 4월 4일

i11년 3월 30일-4월 2일, i11년 11월 30일, i11년 12월 1일

i11년 3월 30일 유원지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유치원에서 놀이공원으로 소풍을 갔을 때 나는 길을 잃었다. 귀신의 집 안에서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손을 꼭 붙잡고 걸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뒤따라 걸었다. 내가 그 애들을 훔치고 있음을 들키지 않도록. 귀신들은 하얗게 벌어진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거나 웃었고 나는 그들을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30일-4월 2일, i11년 11월 30일, i11년 12월 1일

k11년 3월 26-29일, i11년 3월 27-29일, x666년 8월 29일

k11년 3월 26일 1+2를 가르치기 위해 나는 3에 43+41을 더한 수를 곱한 뒤 84로 나누는 법을 알려주어야 했다. 그래. 루이스 캐럴의 방식이다. 나는 언제나 루이스 캐럴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수학 교사가 되는 데 성공하였으나 루이스 캐럴이 되지는 못하였다. 스나크는 언제나 부줌이다. 부줌이 아닌 스나크는 없다. 심지어는 스나크가 아닌 것조차도 부줌이다. 나는 스나크를 찾아 헤매다 … Continue reading k11년 3월 26-29일, i11년 3월 27-29일, x666년 8월 29일

i11년 3월 19-26일, a-3년 3월 20일, m-3년 8월 1, 23일

i11년 3월 19일 그 애는 우리 연극이 연극에 대한 연극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렌지 껍질처럼 잘 벗겨지도록 개량된 과일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다른 피부를 갈망하지. 왜냐하면 우리 피부는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고 악몽처럼 검게 번져가니까. 오렌지라고 해도 벗겨진 피부를 돌이킬 방법은 없다고 나는 말했다. 오렌지 역시 단 하나뿐인 피부를 가지고 있어. 껍질을 벗겨낸 오렌지, 축축한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9-26일, a-3년 3월 20일, m-3년 8월 1, 23일

엔젤 스테이크 8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터무니 없는 착각이야. 난 모든 쥐들만큼이나 오래 살았으니까. 난 너보다 적어도 수십억 년은 더 살았을 거야. 난 내 어머니만큼이나, 아니, 내 조상들만큼이나 늙었단다. 물론 내게도 어린 시절은 있었지. 하지만 어느 밤부터는 아직 죽지 않고 내 뼈와 근육 속에 남아 있는 목소리들이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네 증조모는 처음으로 달에 도달한 쥐였어. 그녀는 훈련조차 받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우주선 속으로 숨어들었지. 최초의 우주인은 … Continue reading 엔젤 스테이크 8

i11년 12월 30일, i11년 3월 17-18일, i11년 3월 23일

i11년 12월 30일 그 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망각된 그 애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를 알아볼 방법을 잃어버렸기에, 네 얼굴을, 네 목소리를, 하나뿐인 네 가면을, 네 표징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너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눈을 둥글게 뭉쳐 만든 작은 공을 달을 향해 던져 본다. 눈 공은 순식간에 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 안에서 … Continue reading i11년 12월 30일, i11년 3월 17-18일, i11년 3월 23일

i11년 3월 14-16일

i11년 3월 14일 목소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유언을 기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저마다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날 선 언어들. 분리불가능한 모항으로부터 떨어져나오려 분투하는, 피투성이의 문장 토막들. 상승하는 바탕과 와해되는 형상. 검어지는 빛과 희어지는 어둠. 그들의 목소리는 순간순간의 차이를 통해 언명되며 동시에 공동의 운명으로 녹아내린다. 실종과 부재의 운명으로. 운명조차 분배받지 못한 내 사랑하는 노마드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를 낳은, 나를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4-16일

i11년 3월 13일

토요일이다. 아침엔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담장을 넘어서. 자물쇠가 잠긴 교실 창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창문을 위로 들어 열어젖히면 끝이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사실들은 내게 쉽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은 내게 거북스러운 표징으로 주렁주렁 매달린다. 행복해야 할 이유는 믿을 수 없이 많고 행복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나를 가죽 밑의 심연으로 몰아붙인다. 나는 나의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3일

i11년 3월 12일

하루의 간격을 나는 마치 아무런 극간과 공백도 없는 것처럼 뛰어넘는다. 기실 모든 날들이 그렇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24시간의 밤 뒤에는 24시간의 밤이 있다. 밤과 밤, 아침과 아침은 언제나 빌어먹을 연속선상에 있다. 단 하루의 텅 빔도 없이. 빛을 향해 부풀어오르던 장미, 빛이 독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시간에 붉어진 매혹적인 입술로 독을 향해 부풀어오르던 장미. 그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2일

i11년 3월 11일

지금은 12일 밤이지만 나는 어제의 일을 쓴다. 어제의 언어가 비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애에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새벽까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등교할 시간이 되어 학교에서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 애는 아마 실수로 메일을 보낸 것이 분명하다. 메일을 쓰고난 뒤 지우려고 하다가 실수로 엔터키를 눌렀던가 했겠지. 난 관대하게 그 애의 메일을 잊기로 했다. 그 애의 메일을 삭제하고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1일

i11년 3월 10일

오늘은 정시에 등교했다. 등굣길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으며 그럴 가능성 역시 상존한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 결국 오늘 죽을 가능성보다는 살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이다. 아마 내일 아침에도 나는 죽지 않겠지. 사형수는 평생 그의 단두대를 찾아 헤맨다. 언젠가 그가 반드시 사형될 것을 알면서도 찾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피부를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10일

하드록카페

썰물이 내일 뜰 달까지 납치한 밤에는 사이키델릭 웅웅대는하드록카페에서 레이싱이 시작되죠질주하는 괴성에 아이들은 저마다 여분의 환각지를 묶어내요 비색 유령이 세 번째 팔을 들어올리면 – 스타트!이름 없는 배기음 고약하게도 발정하며 야광으로 번쩍댄답니다저 침묵의 꼬리는 직녀성의 오줌처럼 미광이지요 바퀴 자욱 위에 번들거리며 잔존하는 누린내 야비한 해설자는 어린 북극성에 올라타 없는 벽을 미리 쫓죠 밀물만 사는 사내에겐 야광의 비색이 … Continue reading 하드록카페

i11년 3월 9일

눈을 계속 감고 있으면 언젠가 눈이 썩어버릴까? 깨어나지 않으면 현실에는 곰팡이가 필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일 일기 검사를 했다. 교사는 단정하고 부드러운 글씨로 편지를 쓰듯 내 일기장 한 면을 가득 채워 글을 적어넣고는 했다. 온화한 글씨들을 읽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삶은 갈수록 위태롭고 위험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불안정성보다는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9일

i11년 3월 8일

i11년 3월 8일 오늘은 어떤 여자아이의 생일이었다. 여자아이의 친구들이 여자아이의 주위를 둥글게 둘러싸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교실 전체로 번져나갔다. 여자아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여자아이는 친구들이 건네준 삼단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었고 책상이 가득 찰 정도로 선물을 받았다.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누군가가 여자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자아이의 눈은 밤처럼 젖어 있었다. 여자아이의 몸에서 … Continue reading i11년 3월 8일

i11년 12월 16일

나의 희생자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의 학대자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의 살해자들이 웃으면서 죽기를 바란다. 혹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어쨌든 그들이 불행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14살 혹은 15살에 불과한데 가끔은 내가 아주 늙은 여자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반짝이 가루가 들어 있는 붉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은 끈적한 초콜릿이다. 달콤한 냄새를 맡은 붉은 개미 떼와 검은 … Continue reading i11년 12월 16일

i11년 12월 15일

담임교사와 상담을 했다. 그녀는 내게 그 일 때문에 따돌림 당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아요. 아이들은 새에게 그러하듯 제게 관심이 없어요. 담임교사는 그 애를 괴롭히는 애들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아무도 그 애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아무도요. 그 애는 새처럼 날아가 사라졌을 뿐이에요. 선생님, 그 애는 죽었나요? 교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살아 … Continue reading i11년 12월 15일